영국 사례로 본 ‘자율규제’ 이상과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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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사례로 본 ‘자율규제’ 이상과 현실
  • 최규진
  • 승인 2017.12.11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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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인하대학교 의과대학 의학교육학 최규진 조교수

스캔들 풍년

최근 몇 해를 돌이켜보면 다른 건 몰라도 의료계 스캔들만큼은 풍년인 것 같다. 다나 의원 사건, 신해철 사망 사건, 여대생 청부살인사건 관련 허위진단서 발급, 카데바 사진 SNS 공개, 수술장 유령 의사 문제, '프로포폴 사망 환자' 시신 유기 사건, 국정농단 의료 게이트, 백남기 농민 사망진단서 사건 등 언제부턴가 의사들이 연루된 스캔들이 메인 뉴스를 차지하고 있다. 병원 내 성희롱ㆍ성폭력 그리고 폭언 및 폭행은 이제 보도되지 않는 날을 찾기 어려울 정도다.

Lull과 Hinerman의 고찰에 따르면, 스캔들은 '사회 공동체의 이상화된 지배적인 도덕성에 흠집을 내는 사적 행위가 미디어에 의해 공개적으로 서술되어 이데올로기적ㆍ문화적 긴축(retrenchment)에서부터 혼란과 변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효과를 창출할 때' 일어난다고 한다.

이러한 기준으로 보면, 현재 한국 사회는 의료계에 기대하는 도덕성에 흠집을 내는 일부 의사들의 사적 행위가 도를 넘어 적절한 규제가 필요한 상황이라 할 수 있다.

문제는 누가 어떻게 하느냐 일 것이다. 물론 가장 이상적인 것은 자율적인 방식이다. 그러나 자율적인 방식에 대해서도 의료계는 아직까지 신뢰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단적으로, 현재 대한의사협회(이하 의협)는 자율규제의 초보적 형태로서 ‘문제가 있는’ 회원들(의사)에 대한 행정처분(면허취소 및 정지)을 요청할 수 있는데, 2011년부터 2015년까지 의협에서 행정처분을 요청한 사례는 단 두 건에 불과했다. 실제 행정처분을 받은 의사는 2011년 404건, 2012년 797건, 2013년 197건, 2014년 241건, 2015년 무려 1,592건에 달했는데 말이다.

이것만으로 자율규제는 불가능하다고 속단할 것은 아니지만, 스캔들이 늘어남에도 불구하고 자율규제 가능성이 계속 보이지 않는다면 칼자루는 국가와 시민사회로 넘어갈 수밖에 없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국가나 시민 사회 주도로 해결이 쉽지 않다는 데 있다. 우선 그 내용의 판단에 있어 전문적인 의학 지식이 필요한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시적으로는 이러한 규제의 목적이 그 사회가 신임할 수 있는 의료계를 만드는 것인데 지나치게 타율적인 경우 목적의 대상인 의료계의 수용성을 떨어뜨려 정작 목적 달성을 어렵게 만드는 모순을 낳기 때문이다.

결국 ‘자율’과 ‘타율’ 사이 적절한 지점을 찾을 수밖에 없다. 지금은 진지하게 그 지점을 찾는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몇 년 전 영국은 의료계 자율규제제도에 대한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했다.

특히 그 개혁에 의료계 스캔들이 발단이 된 것으로 알려져 있어 한국에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아직까지는 상대적으로 ‘자율적’ 운신의 폭이 커 보이는 치과계가 미리 고민하고 선구적으로 ‘묘책’을 찾는다면 전체 의료계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을 거란 생각에 이 지면을 빌려 살펴볼까 한다.

영국의 교훈

영국 의료계의 규제는 1858년 설립된 GMC(General Medical Council)를 통해 이루어진다. 1858년 만들어진 의료법은 의료계 스스로 그 구성원들의 업무를 관리하는 표준을 설정하고, 그런 표준의 준수를 보장할 수 있는 메커니즘을 확립했다. 그리고 이를 범죄 행위하는 경우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하고 또 동시에 의무로 규정했다. 최종적으로 이를 집행할 기구로서 GMC를 탄생시켰다. 말 그대로 규제 권한을 전적으로 의료계에 부여한 '자율규제'를 실현한 것이다.

그러나 영국의 자율규제 제도는 몇 개의 '나쁜 사과'가 썩어가는 조짐이 보였음에도 이를 미리 솎아내는데 실패하고 결국 대형 스캔들이 되어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게 되는 문제점을 낳았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시프만 사건이었다. 맨체스터 근교 진료소에서 약 3천5백 명의 시민들을 관리하고 있던 일반 의사 시프만은 24년간 의사로 재직하며 모르핀 과다 투여 등의 방법으로 약 230명의 환자를 살해했다(그 살해 이유는 불분명하다). 그는 이미 의사 경력 초기에 통제 대상 약물 및 위조 약물 소지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GMC로부터 특별한 관리감독을 받지 않았고 결국 ‘무난하고 꾸준하게’ 살인을 할 수 있었다.

자신이 치료한 여성에 대한 10여 건의 성폭행으로 2000년 유죄판결을 받은 에일링 역시 1971년도부터 그의 부적절한 성적 행동, 무능력 및 잔인함으로 여러 차례 문제가 드러난 것으로 확인됐다.

2000년과 2003년 성폭행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은 두 명의 정신과 의사 커와 하슬람 사례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건이 언론을 통해 보도되며 진상조사가 이루어지기 이전에도 자신에게 정신과 상담을 받는 취약한 여성 환자들을 수년 동안 성적으로 학대하여 이미 적지 않은 문제가 노출된 바 있었다. 남성 환자에 대한 9건의 성폭행 혐의로 2000년 유죄 판결을 받은 피터 그린 역시 첫 범행은 1985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브리스톨 병원 사례는 한 개인 의사의 은폐가 아닌 병원 차원의 관리 문제를 보여준다. 이곳에서 근무하는 두 명의 외과의사가 부적절한 심장수술 프로그램을 시행하여 30여 명의 아이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경우였는데, 1988년부터 시행된 두 의사의 수술이 표준 치료와 상당한 거리가 있고 과도한 사망률로 명확히 드러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해당 병원과 GMC는 적절하게 개입하지 못했다.

이밖에도 캐나다에서 이미 부적절한 치료로 두 명의 환자 목숨을 앗아 1979년 의사 등록에서 제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 GMC하에서 버젓이 의사로 등록하여 수십 년간 온갖 비윤리적이고 부적절한 치료로 문제가 쌓일 대로 쌓인 후 2004년에야 GMC로부터 제제를 받은 닐의 경우 등 2000년을 전후해 영국 GMC가 더 이상 자율규제제도를 자율적으로 운영하기 어려운 상태임을 보여주는 스캔들로 넘쳐났다.

타율적 조율

이러한 굵직한 스캔들이 연이어 터져 나오자 국민들의 비판 여론은 거세졌고, 이러한 여론을 등에 업은 언론 매체와 보건당국의 조사관들은 의사단체나 GMC가 방어할 수 없는 수준까지 사건을 파헤쳤다. 보도와 조사보고서를 통해 드러난 스캔들의 정도는 너무 커, 상처를 입은 의료계는 저항할 위치가 아니었다.

결국 150년 동안 '의사를 위한, 의사에 의한, 의사의' 규제라는 자율규제 원칙을 유지해왔던 GMC는 보건당국에 의해 강제 조정됐다. 표준을 설정하고, 실천을 모니터링하고, 의무 불이행을 관리할 수 있는 권한이 상당 부분 의료계 외부로 배당되었다.

국가가 적극적인 통제력을 가지는 CHRE(Council for Healthcare Regulatory Excellence)가 설립되었고, GMC의 구성 자체가 비의사회원과 의사회원이 동수로 위임되어 ‘공동규제’의 형태로 바뀌었다.

또한 국민들의 의사에 관한 우려를 낮추고 불평에 반응하기 위한 광범위한 새로운 절차 및 정책들이 수립되었다. 의사들의 비윤리적 행태에 개입하는 민감도를 높이기 위해 의사들의 행위 적합성에 대한 판단 기준이 합리적 의심을 넘어 확실한 증거를 요구하는 수준에서 개연성만으로도 개입할 수 있는 수준으로 바뀌었다. 아울러 면허 갱신제도를 강화하여 지속적인 관리감독이 이루어지도록 했다.

한국은 지금…

스캔들이 있다고 해서 곧장 사회제도가 바뀌는 것은 아니다. 소비자주의(consumerism)의 부상과 같은 배경이 중요하다. 지금 한국은 그런 시대적 정황을 보더라도 의료계가 ‘처절하게’ 자정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다(원격의료, 한의사 의료기기 사용 문제 등 최근 다양한 의료문제에 여론조사 결과가 중시되고 있다).

즉, 의료계에 대한 국민의 신뢰와 자율규제에 대한 경험이 미약한 만큼, 시프만 사건 같은 결정적 사건이 터질 경우 영국보다 훨씬 강력한 제재가 진행될 수 있단 얘기다.

서두에 언급했듯이 상황이 그렇게 흘러가면 의료계는 물론 사회 전체에도 부정적 결과를 초래한다. 의료계가 하루빨리 자정 능력을 보여주어야 해결의 실마리가 보인단 얘기다. 현재 상황에서는 일단 권한 먼저 달라고 요구할 것이 아니라 지금 가진 권한이라도 십분 활용해 사회적 신뢰를 쌓으며, 국민들의 목소리를 담을 수 있는 관리감독체계를 모색해야 한다. 그래야 의료계가 전문가로서의 목소리를 충분히 낼 수 있는 형태의 ‘공동규제’라도 가능할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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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eming, N. (2005) The Kerr/Haslam inquiry. London: The Stationery Office
Smith, J. (2004) The shipman inquiry fifth report. London: Stationery Office

이 글은 본지의 논조와 다를 수 있음을 알립니다. (편집자)

 

 

(인하대학교 의과대학 의학교육학 최규진 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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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의동 2017-12-12 10:00:23
좋은 글, 감사합니다. 우리나라도 자율규제에 대한 구체적인 노력이 가시화되지 않는다면 의사들이 정부에 의한 강력한 규제 대상이 될 날이 멀지 않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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