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의 기쁨‧거리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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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의 기쁨‧거리의 눈물
  • 이승현
  • 승인 2017.12.28 18:12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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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적이 ; 거리의 기록] 경희대학교 치과대학·치의학전문대학원 이승현 학생

인터뷰를 통해 본지와 인연을 맺은 경희대학교 치과대학·치의학전문대학원 이승현 학생이 『날적이 ; 거리의 기록』이란 코너로 정기연재를 시작합니다.

이승현 학생은 지난 2008년부터 지금까지 약 10년 간 '다시서기 상담보호센터'에서 상담봉사를 해 오고 있으며, 그가 거리에서 만난 노숙인들의 이야기를 풀어낼 예정입니다.

이번 이야기는 노숙인 상담원으로 활동 중인 필자가 나눈 이야기를 1인칭으로 기록한 날적(나날이 적기)이 일부입니다. 신원을 보호하기 위해 내용의 수정이 있었음을 밝힙니다.

- 편집자 주

 

차가운 아스팔트에 맞닿은 얼굴이 까시럽다. 달아오른 숨을 후후 불어 한기를 참아본다. 얼마나 지났을까, 누군가 내 몸을 잡고 거칠게 흔든다.

“주영아 이놈아! 일어나봐, 이 새끼 이거 술을 얼마나 먹은 거야.”

영진이 형 목소리다. 형이랑 한잔하다가 잠들었던가? 몸을 일으킬 힘이 없어 게슴츠레 눈만 떠본다.

“어휴 이게 무슨 냄새야, 아이고 똥까지 지리곤 여태 이러고 있어.”

지나는 사람들 다 들리게 큰소리로 떠벌린다. 쪽팔리게. 그러고 보니 온 거리가 북적인다. 오늘이 무슨 날이던가?

성탄이란다.

성스러운 탄생이라니. 없는 집에서 원치 않는 자식으로 태어난 나는 여기서 난장을 치고 있는데, 부모의 사랑을 받고 자란 예수는 마구간에서 났다는 이유만으로 성스럽다 하는가.

건너편 시장골목에는 형형색색 성탄의 기쁨이 가득해 보인다. 거니는 저 가족은 아이들 선물을 사러 왔는지. 아버지 품에 안겨 어머니가 건네는 과자를 받아먹는 아이를 보니 괜한 기억이 떠오른다.

어머니. 나를 낳고선, 핏덩이를 내버리겠다는 아버지의 폭행을 홀로 당해내던 내 어머니. 참다못해 집을 떠나는 그때에도 나를 붙잡고 미안하다 울던 내 어머니. 하지만 이제 그 어머니의 모습조차 온대 없이 흐려져 떠오르지 않는다. 대신에, 그녀가 떠난 이후로도 줄곧 나를 학대해온 아버지란 인간의 얼굴이, 학대당한 그때의 장면만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아버지가 다른 여자를 집에 들인 후 나는 집을 나왔다. 아는 것도, 배운 것도 없어 몸뚱어리 하나 믿고 노가다부터 시작했다. 고생뿐인 나날이었지만 학대하는 이가 없어 좋았고, 노력한 만큼 내 돈이 생겨 좋았다. 조금씩 모은 돈으로 작은 인테리어 가게를 차리고 아내를 만나 두 아들과 오순도순 행복했는데, 그 찰나의 시절로 이젠 돌아갈 수 없겠지.

참을 걸 그랬다. 아내가 숨겨둔 카드빚을 알게 된 그때. 온갖 사치품을 구매한 명세서를 손에 쥐어 들고는, 열어보지 않을 것을 그랬다. 말다툼 끝에 울화통이 치밀어 주먹을 꽉 쥐었지만, 차마 아내를 때릴 수는 없었다. 내 아버지와 같은 사람이 될 수는, 아이들에게 내가 보고 자란 그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으니까. 그러나 결국 분을 못 이겨 유리창을 비롯한 온갖 집기를 때려 부순 내 양팔은 크게 망가졌고, 상처를 돌본 의사는 앞으로 내가 힘쓰는 일을 할 수 없을 거라 말했다. 그러나 그 의사는 틀렸다. 내 마음이 양팔보다 더 심하게 망가져, 어떤 일도 할 수 없게 됐으니까.

“이놈아 이 불쌍한 자식아, 형이 술 좀 작작 먹으랬잖아.”

형이 운다. 복수로 가득 차 빵빵해진 형의 배가 보인다. 저는 간이고 콩팥이고 온통 고장 난 알코올 중독자인 주제에 누굴 걱정하는지.

형이 우니까 나도 눈물이 난다. 고아원에 보낸 아이들이 보고 싶다. 올해가 지나면 꼭 같이 살자고 약속했는데. 적어도 내 아버지와 같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지는 않았는데.

건너편 골목에서 경쾌한 노래가 새 나온다. 소절마다 성탄의 기쁨이 가득하다. 말 밥통에서 태어난 주제에 수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 신으로 추앙받는 저 사내는 무슨 복을 타고난 걸까. 그 복을 내게 조금이라도 나눠줬다면 어땠을까. 아니 나는 이미 늦었으니 아이들에게라도 조금만….

 

이승현 (경희대학교 치과대학·치의학전문대학원 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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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양호 2017-12-29 11:05:03
아이고 말도 잘 하더니 글까지 잘 쓰시네요...감동적인 글 너무 잘 읽었습니다. 글 말미에 후원계좌같은 걸 올려주면 좋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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