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치의학 120년] 일제하 한국 치과의료계의 봄, 치과의사 함석태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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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치의학 120년] 일제하 한국 치과의료계의 봄, 치과의사 함석태의 등장
  • 이주연
  • 승인 2006.04.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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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합병 당시 한국 내 일본인 치과의사는 총 10여명(서울 4명)이었고, 한국인 치과의사는 한명도 없었다.  그러던 중 함석태가 조선총독부치과의사면허 제1호(1914.2)를 취득함으로써 한국인으로서는 최초의 치과의사가 되었다.

 

 함석태는 평안북도 영변에서 태어났다(1889). 김소월의 ‘진달래꽃’에 등장하는 영변지역은 일찍이 민족자본을 축적하고 친서구적 근대의식을 겸비한 민족주의운동이 성행했던 지역이었다. 부친 함영택은 조선시대 성균관 진사를 지낸 재력가로서 애국계몽사업에 일조하였다.

 

신학문인 치의학을 공부하는데에도 개방적이어서, 함석태는 유학을 통해 일본치과의학전문학교를 졸업(1912)하였다 .서울 삼각동(광교)에 치과・구강외과라는 진료과목으로 개원(1914)한 함석태는 한국인으로서의 민족적 자각과 치과의사로서의 사명감을 지닌 선각자로서 활동하였다. ‘구강위생-긴급한 요건’이라는 동아일보 기고문(1924)에는 당시의 사회상과 그의 생각이 잘 드러나 있다.

 

 ‘目下 우리 사회의 제반상태는 無非, 缺乏, 不足, 不進, 無備로 오로지 完全의 境이나, 庶幾의 望이란 그것을 발견키 어렵고, 특히 구강위생상의 주의가 부족하다’고 하였다. 이어 ‘한국인 소학교의 구강검진도 허락되면 一個人의 微力으로라도 하겠으며, 자기영업 이외의 치과의사로서의 사회봉사적 어떤 노력이든지 사양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특히 그는 한국인 치과의사 수가 적고 개원유지가 어려운 것에 대해 염려했다.. ‘경성에 거주하는 일본인의 수는 조선인의 ¼-⅓인데 일본인 치과의사는 20인 이상 된다. 그런데 조선인 치과의사 2-3인의 개원을 유지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함석태 이후로 일본에서 치의학교를 나온 김창규(1919, 광화문), 이희창(1921, 무교동)이 서울에 개원하였으나 개원유지가 어려웠던 것 같다. 이와 같은 함석태의 민족적 자각은 얼마 뒤 한국인 치과의사회인 한성치과의사회를 창설(1925)하고 초대 회장을 맡는 것으로 이어졌다. 한성치과의사회의 활동은 이후에 재조명하겠으나, 함석태는 일제하 개인적인 방식으로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을 지속하였다. 조선의 문화를 담은 골동품 수집에 골몰하였으며, 사이또 총독을 저격한 강우규가 처형되자 그의 손녀 강영재를 양녀로 맡아 키우기도 하였다.

 

해방 전(1944)에는 미국의 폭격을 피해 고향으로 가있으라는 소개령에 따라 영변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해방 후 다수의 치과의사들처럼 월남의 대열에 합류하다 실종되었다. 이렇게 일제하에 한국내 정규적인 치과교육기관이 서지 않은 상태에서 등장한 치과의사 함석태는 한국 현대사속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함석태의 등장은 일제하 근대적 치과의료기술 및 자원을 한민족의 자산으로 축적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실질적인 주체의 등장을 의미하는 뜻깊은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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