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0일 잉카제국을 엿보다
상태바
11월 10일 잉카제국을 엿보다
  • 조남억
  • 승인 2018.01.26 14:56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조남억의 남미여행 일기 3] 인천건치 조남억 회원

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 인천지부(공동회장 김영환 주재환) 전 회장이자 연세조아치과의원 조남억 원장이 지난해 11월 9일부터 12월 19일까지 약 40일간 남미여행을 다녀왔다. 한 사람의 남편이자 네 자녀의 아버지, 그리고 개원의라는 제약을 잠시 내려놓고 비록 패키지이긴 하지만 페루, 볼리비아, 잉카문명 지역, 우유니 소금사막, 안데스, 아마존, 아르헨티나, 브라질까지 로망 가득한 남미지역을 여행했다.

조남억 원장은 이번 여행에서의 소감과 정보를 『조남억의 남미여행 일기』란 코너를 통해 매주 풀어낼 예정이다.

세 번째 회에서는 잉카제국과 그 문명, 역사를 따라간 이야기가 담겨 있다.

- 편집자

리마 시간으로 새벽 5시가 넘어서 잠이 들었다. 아침 알람으로 7시 40분에 기상하여 8시에 조식을 먹으러 갔다. 대도시에 있는 호텔이니 만큼 모두 입맛에는 맞는 음식들이었는데, 샐러드로 먹을 만한 채소가 적어서 먹기 힘들었다.

다시 방으로 와서 짐정리와 샤워 후 10시에 모여 시내 관광을 나섰다. 오늘의 현지 가이드인 이 득진 가이드는 중년 이상으로 보였고, 페루로 이민 오신지 꽤 오래되었다고 하시며, 한국 방송국에서 잉카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찍을 때마다 가이드를 많이 해주셨다고 하셨다. 버스 안에서 잉카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는데, 들으면 들을수록 마음 아픈 일들이 많았다.

잉카라는 말은 사실 왕을 뜻하는 말인데, 그 국가는 1300년경에 건국하고, 8대 잉카인 비라코차에 이르러 주변부족을 정복하며 성장을 시작하였습니다. 그의 아들인 9대 잉카 파차쿠티가 동서남북을 다 정복하여 제국으로 만들었는데, 그 제국의 이름이 타완틴 수유(4개의 땅이 합쳐진 땅, 잉카제국의 정식 명칭)였습니다.

그 파차쿠티가 1463년 아들에게 군령을 물려주고, 그 자신은 세상의 중심이자 제국의 수도인 쿠스코를 만드는데 힘을 씁니다. 그 당시 쿠스코의 인구가 25만 명 이었고 후에는 100만 명까지 살았다고 하니, 그 당시 유럽의 어느 도시보다도 훨씬 큰 도시였습니다. 그 후 12대 잉카이후 몰락의 길을 걷습니다. 12대 잉카 와이나 카팍과 그 장남은 북쪽에 이상한 사람들이 출몰한다는 소식을 듣고 순행을 떠났다가 황제의 부자가 천연두에 걸려 사망하게 되고, 제국은 내전에 휩싸이게 됩니다.

한편 스페인 탐험가 피사로는 1524년 첫 항해를 한 후, 실패만 계속하였으나, 그 시절 잉카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실체를 파악하게 되었습니다. 1530년 12월 스페인 이사벨 왕비의 승인서를 받고 168명의 남자들은 잉카로 황금을 찾아 떠나게 됩니다. 그는 서두르지 않고 기회를 엿보다가 마침내 내전에서 승리한 새로운 잉카 아타우알파를 생포하고, 잉카제국을 손쉽게 장악했습니다.

그 후 잉카제국은 멸망하고 스페인의 식민지로 전락하였습니다. 피사로는 쿠스코에서 반란군에 시달리고, 본국과의 연락도 힘들어서 1535년 리마를 건설하도록 시작하였고, 리마는 282년 동안 스페인의 부왕령으로서 남미의 대표도시가 되었습니다.

스페인은 잉카와 남미에서 가져간 금과 은으로 부유한 시절을 보냈지만, 잉카인들에게는 재앙만 남았습니다. 1000만 인구였었는데 유럽에서 온 천연두와 아프리카 노예들에서 온 홍역이 번져서 90%가량이 줄었다고 하니, 그 결과가 참혹할 따름입니다. 지금은 페루의 인구 3천만 명에서 그 구성이 백인 10%, 전통유민 40%, 혼혈 50%라고 합니다.(나중에 다른 나라들을 돌아보았을 때, 원주민이 그만큼 살아남은 곳도 별로 없었으니, 그나마도 감사하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피사로는 가득 긁어모은 금을 다 녹인 후 원래의 계약대로 8:2로 나누어 8은 왕실로 보내고, 나머지는 원정대가 가졌는데, 그 양이 5720kg이었다고 합니다. 그 중 본인은 200kg을 챙기고 나머지를 분배했는데, 그에 불만을 품은 부하 알마그로가 반란을 일으켰다가 사형을 당했고, 얼마 후 그 추종세력에 의해 피사로도 목에 칼이 찔린 채 암살당했다고 하니, 금은 그때나 지금이나 꿈이면서도 독이 되는 것 같습니다.

페루를 독립시킨 호세 데 산마르틴 장군 동상 in 산마르틴 광장(ⓒ조남억)

우리는 제일 먼저 산마르틴 광장에 갔다. 스페인 식민 지배를 끝내고 페루를 독립시킨 산마르틴 동상이 중심에 서있는데, 그 주변에서는 여러 단체들이 모여 피켓을 들고 시위도 많이 하고 있었고, 쉬는 사람도 많이 있었다.

아르마스 광장으로 걸어갔는데, 이 광장 주변이 피사로가 리마를 만드는 핵심 지역이었다. 피사로가 주춧돌을 놓았다는 바실리카 대성당과 대통령궁이 광장 주변에 있었는데, 마치 유럽의 구시가에 들어와 있는 느낌이었다. 여러 차례의 지진으로 부분부분 복구한 돌이 다르게 보이는  대성당 안에는 입구에 피사로의 무덤이 있었다. 사실 얼마 전에 성당 입구 근처에서 유해가 발견되었는데, 목에 칼이 찔린 자국과 연대를 조사해보아 피사로의 시신으로 판명되어, 무덤을 그 안에 만들어 놓았다고 했다. 지진이 많은 도시여서 인지 대성당의 기둥을 만들 때 돌이 아닌 나무로 연결해서 세워놓고 지진에 대비했다고 한 점도 특이한 점이었다.

아르마스 광장에서 본 바실리카 대성당 (오래된 돌과 새로 올린 돌의 차이가 보인다) (ⓒ조남억)

그 후 지하무덤인 카타콤베 프란시스코 수도원으로 걸어갔는데, 시간상 안에는 들어가지 않고 설명만 듣고 지나쳐서 좀 아쉬웠다.

최대 규모의 민간박물관인 라르코 박물관에 가서 수많은 황금 유물과 잉카 문명의 흔적들을 설명을 들으면서 볼 수 있었는데, 신라의 유물과 비슷하게 보이는 황금 왕관이나 장신구들이 대단해 보였고, 글을 쓰는 문자 대신, 의사소통에 쓰인 매듭문자도 신기했다. 매듭문자의 해독을 22세의 청년이 얼마 전에 성공하여 조만간 발표된다고 하니, 그동안 모르던 잉카인들의 삶에 대한 비밀이 풀린 수 있을지 궁금하다. 남성과 여성의 성기들과 성행위들을 묘사해 놓은 토기들도 많이 전시하고 있었는데, 고대문명의 어디에서나 성에 대한 유물들은 공통으로 나오나보다.

대성당안의 피사로의 무덤 (ⓒ조남억)
대성당 지하의 공동 무덤 (ⓒ조남억)
라르코 박물관에 따로 전시되고 있는 성박물관 유물들 (ⓒ조남억)
예수 상의 머리 위에 잉카의 태양신의 상징을 함께 설치 했다. (ⓒ조남억)
잉카의 매듭 문자 (ⓒ조남억)

박물관과 붙어있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lomo saltado라는 메뉴가 소고기 볶음 덮밥과 비슷하여 입맛에 맞았다. 세계 맥주 품평회에서 상을 받았다는 쿠스퀘냐 맥주도 종류별로 먹어보았는데, 밀맥주와 흑맥주보다 라거가 좋았다.

모두들 너무 피곤하여 4시 반 즈음(한국시간으로 오전 6시 반) 다시 호텔로 돌아와 잠을 잤는데, 2시간을 꿀잠자고 일어나서 저녁을 먹으러 나갔다. 저녁시간에 돌아가면서 자기 소개를 하기로 해, 오늘은 제일 젊은 내 소개를 먼저하고, 와인으로 서로 건배하면서 좋은 여행이 되기를 기원했다.

페루의 대표 맥주 쿠스퀘냐 (ⓒ조남억)

2018년 러시아 월드컵 플레이오프 최종 경기로 남미 5위 페루와 오세아니아 1위인 뉴질랜드가 한 장의 출전권을 놓고서 벌이는 1차전이 이곳 시간 새벽에 있었다. 모든 거리 상점마다 페루 국가대표의 유니폼을 걸어놓았고, 아르마스 광장에도 야외응원전을 하는 준비를 많이 하고 있었고, 사람들도 많이 모였다. TV로 새벽까지 보았는데 0:0으로 비겨서 페루 국민들이 매우 아까워했지만, 며칠 후 페루로 와서 홈경기를 또 하게 되니, 그나마 다행이라 여기는 듯 했다.

산마르틴 광장에서 (ⓒ조남억)
Tag
#N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울타리 2018-08-02 10:40:35
인간의 시대는
야만의 시대로 점철됐다고 봐도 좋아.
1500년대는 야만의 시대였지
엘~도라도, 그것은 황금이 문제였어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지
그것은 사람이 문제였어
,
에스파냐 사람들은 아메리카 정복에
나섰고,
구아타비타호수 속에 황금이 있다고 믿었어
탐험가라는 이름의 정복자들은
멕시코와 콜롬비아와 페루의 마을을 샅샅이
뒤지며
황금 옷을 입었던 왕을 찾았지
황금 옷을 입은 왕이 호수로 가는 열쇠를 가졌기 때문이야

그러나 호수와 왕은 전설 속에 있었고
무수한 원주민은 고문과 살륙을 당했지.

잉카제국이 그렇게 무너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