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3일 잉카의 비극을 짚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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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3일 잉카의 비극을 짚으며…
  • 조남억
  • 승인 2018.02.23 16:49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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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남억의 남미여행 일기 6] 인천건치 조남억 회원

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 인천지부(공동회장 김영환 주재환) 전 회장이자 연세조아치과의원 조남억 원장이 지난해 11월 9일부터 12월 19일까지 약 40일간 남미여행을 다녀왔다. 한 사람의 남편이자 네 자녀의 아버지, 그리고 개원의라는 제약을 잠시 내려놓고 비록 패키지이긴 하지만 페루, 볼리비아, 잉카문명 지역, 우유니 소금사막, 안데스, 아마존, 아르헨티나, 브라질까지 로망 가득한 남미지역을 여행했다.

조남억 원장은 이번 여행에서의 소감과 정보를 『조남억의 남미여행 일기』란 코너를 통해 매주 풀어낼 예정이다.

여섯 번째 회에서는 세계의 배꼽이란 뜻의 '쿠스코'와 잉카 태양의 신전이 있는 '코리칸차'와 그곳에 얽힌 스페인 침략과 원주민 학살 등 가슴아픈 역사를 돌아 본 내용을 담았다.

- 편집자

어제 일기를 쓰고 잤는데, 2시간만 자고 새벽 3시에 눈이 떠져서 잠이 더 오지 않았다. 버스에서 많이 잤기에 그랬나보다. 그냥 일어나서 쿠스코에 대한 정보검색도 하다가, 드디어 강신주의 『철학 대 철학』책을 읽기 시작했다. 두껍지만, 긴 시간 읽을거리로 들고 온 것인데, 지금까지는 읽을 시간이 별로 없었다. 앞으로 하루 한 주제씩 읽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

오늘도 좀 빡빡한 날이었다. 짐정리를 끝내놓고서 6시 반 호텔 조식 시간에 맞춰서 식당으로 갔다. 몇 가지 조금 먹고 올라와서 7시에 로비에 모였다. 월요일 아침이어서 출근길 교통량이 많아 길이 너무 막혔고, 공항에도 사람이 많았다.

국제선과 다르게 역시나 외국에서의 국내선 이용은 어려웠다. 여기에 줄서라 저기에 줄서라 변경도 많았다. 일찍 출발한 것 같은데도 짐 부치고 탑승수속을 하고 나니 8시 반이었다. 9시 50분 출발에 13번 게이트라고 하여서 그 근처에 앉아있었는데, 출발 20분전에 12번 게이트로 바뀌었다. 이어폰을 끼고 팟케스트를 듣고 있었는데, 일행들이 불러주지 않았다면 몰랐을 뻔 했다.

한 시간 반 비행으로 11시 반에 쿠스코에 내렸다. 공항의 위치가 이미 3200m를 넘어서 고산증 위험이 있으니, 조심하고 대비해야 했다. 착륙을 하고나서 비행기에서 물 2리터를 마시고 내렸다. 물 2리터를 못 마실 줄 알았는데, 고산이어서 그런지 물이 잘 넘어갔다. 물 한통을 더 마시려고 했었는데, 윤 교장선생님 내외가 물이 없다고 하셔서 그 물을 얼른 마시시라고 드렸다.

쿠스코 아르마스 광장. 왼쪽이 대성당, 오른쪽에 라콤파냐 헤수스 교회가 보인다. (ⓒ 조남억)
쿠스코 골목 안의 한식당 '사랑채' (ⓒ 조남억)

쿠스코는 케추아어로는 ‘코스코’였었는데 스페인사람들이 쿠스코라고 부르면서 바뀐 말이라고 하고, 원뜻은 세계의 배꼽이라는 뜻이다. 그만큼 쿠스코를 만든 파차쿠티 잉카왕은 자신만만했었다.

공항에서부터 천천히 걷고, 짐을 들고 내릴 때도 천천히 하고, 조심조심 하면서 미니버스를 타고 시내로 이동했다. 아르마스 광장 근처 한식당‘사랑채’로 가서 점심식사를 했다. 머리가 띵하고 숨이 가빠서 밥도 꼭꼭 씹어 먹고 천천히 먹었다. 소화가 잘 안 되는 느낌이었지만, 김치찌개, 된장찌개, 생선구이, 제육볶음을 골고루 시켜놓고 먹으니, 밥 한 공기를 다 먹게 되었다. 입에서는 더 먹고 싶어 했지만, 위를 위해서 참았다. 대신 물을 계속 마시고 화장실을 여러 번 갔다. 물을 3리터 이상 마셔서 그런지, 얼굴을 만져보니 급격하게 부어있었다.

아르마스광장으로 가서 대성당을 보았다. 그 옆에 비슷한 모양으로 잘 지어놓은 예수교 라콤파냐 헤수스 교회도 멋지게 보였는데, 우리는 대성당만 구경했다. 여러 번의 대지진으로 인하여 수리를 여러 번 한 흔적이 있었고, 통일되지 못한 여러 가지 양식들로 혼합이 되어있었다. 성당 건설 94년 동안 책임자로 여러 사람들이 왔기에, 바로크양식, 고딕양식 등 유럽의 여러 양식들이 포함되었다고 한다.

내부의 여러 조각상들과 그림들 중에서 재미있었던 것은 검은 얼굴의 예수상이었다. 1950년 대지진이 일어났을 때, 사람들이 여러 가지 예수상을 들고 밖으로 대피시켰는데, 이 검은 예수상을 옮겼을 때 지진이 멈췄다고 한다. 그래서 지진의 신으로 검은 예수상이 채택되어 성당의 중앙에 위치하게 되었다.

쿠스코 아르마스 광장 - 날씨 변화가 심하고 기온도 급격하게 변한다 (ⓒ 조남억)

또 새로운 것은 성모상이었는데, 원주민들이 산과 땅에 대한 믿음이 강하다보니, 성모상의 뒷 망토를 점점 더 크게 펼쳐서 산처럼 보이게 했다고 한다.

또한 최후의 만찬 그림이 특이했는데, 밀라노에 있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과 다른 점이 있었다. 모두들 식탁 뒤에 있는데, 식탁 앞에 유일하게 앉아있는 사람이 유다가 아니라 피사로였다는 점이었다. 자신의 얼굴을 넣으라고 시켰다는데, 피사로가 열두 성인이 되고 싶었나보다.

화장실도 자주가고, 천천히 걷고, 가이드의 영어 설명을 들은 후 최 가이드의 한국어 설명을 다시 듣게 되니 시간이 많이 흘렀다. 성당에서 나와서 아툰루미욕 거리라는 뒷골목으로 가서 정교한 석축과 12각 바위를 구경하고, 꽃보다 청춘에 나왔던 가게와 골목을 구경했다. 청동기와 석기밖에 없던 시절에 이 큰 돌을 어떻게 다듬고 이동시켰는지 아직도 풀리지 않는 미스테리다. 대지진이 있어도 잉카인들의 석축은 전혀 무너지지 않고, 그 위에 새로 올린 석축들만 무너졌다고 하니, 잉카인들의 돌 다루는 기술은 엄청났던 것 같다.

아툰루미욕 거리 석축. 면도날도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정교하게 맞춰져 있고, 안쪽으로 약간 경사져 있어 지진이 나도 무너지지 않는다. (ⓒ 조남억)
잉카의 벽이라 불리는 지름 115cm의 12각 ㄷㄹ(ⓒ 조남억)

다음으로 코리칸차로 갔다. 코리칸차는 잉카의 태양의 신전이었는데, 외관에 온통 황금으로 치장되어있었다고 하는데, 태양이 뜰 때 눈부시게 빛나는 신전이었다고 한다. 내부에도 황금으로 만든 많은 동상들과 물건들이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피사로와 그 일당들은 신전 안팎의 모든 황금을 다 긁어가서 녹여버렸고, 더욱이 상부를 허물고 산토도밍고 교회를 세워버렸다. 코리칸차를 돌아보면서, 아름답고 대단한 기술이라고 놀라기 보다는 가슴이 아프기만 했던 것은 아마도 이런 이유를 들어서였나보다.

마지막 잉카 아타우알파는 자신의 몸값으로 자신이 갇힌 7×5×3미터 크기의 방을 금으로 가득 채워주겠다고 말했다. 잉카의 백성들은 태양의 아들을 위해 금을 방안 가득 채워주었는데, 그 금이 모두 코리칸차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니, 코리칸차의 안팎에 있던 황금의 양이 어마어마 했었던 것 같다.

태양의 신전자리에는 산토도밍고 교회를 세웠다. 아르마스 광장 주변의 와이나 카파쿠 궁전 자리에는 라콤파냐 헤수스 교회를 세웠다. 뒤에 간 삭사이 와망에도 주춧돌의 잔해만 남아있을 뿐이다.

태양의 신전 코리칸차, 현재는 산토도밍고 교회로 쓰인다. 아랫쪽 잉카의 석축과 윗쪽 스페인의 석축이 함께 공존한다. (ⓒ 조남억)
이 신전의 석축에 2kg짜리 황금판 700개가 덮혀있었다고 한다. (ⓒ 조남억)

원주민의 문화와 삶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는 약탈자 같은 침략자들과 제국주의는 정말로 역사적으로 문제인 것 같다. 이런 식민지를 약탈하는 제국주의는 지금 해소되었는가? 아직 아니다. 다시금 ‘체게바라’의 이상을 봐야할 때인 것 같다.

느릿느릿 걷고, 화장실도 자주 가다보니, 삭사이와망으로 가는 시간이 늦어서 못 들어갈 뻔했다. 5시가 넘었지만, 다행이 입장이 되었다. 삭아이와망은 그 거대하고도 정교한 돌들로 인하여 그 제작 목적이 무엇이었을지 미스테리한 곳이었는데, 최근에 신전이 있던 주춧돌, 주술사가 살던 집터 등이 발견되면서 신전이었다는 설이 제일 유력하다고 한다.

잉카인들이 성스럽게 여기던 동물이 하늘의 콘돌, 땅의 퓨마, 지하의 뱀이었다고 한다. 이곳 쿠스코의 전체 모습이 퓨마의 모습이라고 하는데, 이 삭사이와망의 위치가 퓨마의 머리부위라고 하고,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해서 도시를 다 볼 수있다보니, 신전이라는 설이 더 설득력이 있는 것 같다.

‘삭사이’는 배부르다, 많다는 뜻이 있고, ‘와망’은 머리라는 뜻이 있어서, 원래 지혜가 충만한 곳이라는 뜻이라는데, 스페인군이 마지막까지 저항하는 잉카군을 여기에서 다 죽인 후에, 그 시체들 때문에 민머리 독수리가 배부르게 되었다는 뜻으로 삭사이와망이라고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500년 전 상대도 안 되는 석기 무기들을 들고 끝까지 대항하다가, 몇 명 안 되는 스페인 용병들에게 학살을 당하는 잉카인들의 모습을 상상해보니, 공주 우금치 계곡에서 동학농민군들의 모습과 비슷했을 것 같다.

시간이 부족해서 삭사이와망 아래의 큰 돌들만 보고 끝날 줄 알았는데, 그 석문 안으로 들어가 보자고 하다가 결국 전망대까지 가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보는 쿠스코의 야경이 멋졌다. 사진 몇 장 찍고 어둑어둑해져서 내려올 때는 우리밖에 없었다.

쿠스코 뒷쪽 언덕 위로 오르면 넓은 공터와 커다란 석축의 삭사이와망에 도착한다. (ⓒ 조남억)
석축 하단의 큰 돌 앞에서 단체사진 (ⓒ 조남억)
이곳 돌들을 가져다가 성당도 짓고, 집도 지었다고 한다. 그래서 커다란 돌들만 남았다. (ⓒ 조남억)
삭사이와망 정상에서 바라본 쿠스코 야경. (ⓒ 조남억)
삭사이와망의 쿠스코 파노라마 뷰(ⓒ 조남억)

버스로 곧장 2시간가량 달려서 우루밤바에 있는 호텔로 왔다. 덜컹거리는 도로를 따라 2시간 달리는 것이 쉽지는 않았는데, 그래도 쿠스코에서 자지 않고 2800m 고도로 내려와서 진다고 하니, 고소증 적응을 위해서는 이렇게 이동해서 자는 게 나을 것 같다.

호텔 시설도 새 것 같고, 우루밤바 강도 바로 호텔 바로 옆에 있어서 풍경도 좋은 호텔이었다. 저녁으로는 소고기 볶음 생선조림이 나왔는데, 고소걱정과 내일 일정걱정, 피곤함이 겹쳐서 오늘은 맥주를 한모금도 안하고, 자기소개도 생략하고, 밥도 다들 조금씩밖에 못 먹고 곧장 10시에 방으로 들어왔다.

나 역시도 너무 피곤하고, 고소걱정 때문에 샤워도 생략하고 그냥 잠을 잤는데, 또3시에 눈이 떠져서 그냥 일어나서 일기 쓰고, 내일 일정을 검색하다보니 벌써 새벽 5시 반이 되고, 창밖이 밝아졌다. 잠깐 나가서 호텔주변과 우루밤바강도 구경하고 들어와야겠다.

우루밤바 호텔의 전경 (ⓒ 조남억)
호텔 뒤의 우루밤바 강. 이 강물이 마추피추를 지나 아마존으로 간다. (ⓒ 조남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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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울타리 2018-08-02 11:29:58
내가 이런 말 안 하려고 했지만~^^
난 여행배낭을 챙기면서 혹시라도 실수로 책이 배낭에 들어갔나 살피는 편이다.
여행하면서 독서하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는 까닭이다.
여행하면서 이어폰으로 음악을 듣는 사람들도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내가 이해력이 부족한지도 모르니 이 문제는 걍 공간으로 두자.
그러게, 여행 중 독서와 음악감상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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