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 개 쇠기둥의 수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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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개 쇠기둥의 수치심
  • 이승현
  • 승인 2018.02.23 17: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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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적이 ; 거리의 기록 2] 경희대학교 치과대학·치의학전문대학원 이승현 학생

인터뷰를 통해 본지와 인연을 맺은 경희대학교 치과대학·치의학전문대학원 이승현 학생의 『날적이 ; 거리의 기록』 두 번째 이야기입니다.

이승현 학생은 지난 2008년부터 지금까지 약 10년 간 '다시서기 상담보호센터'에서 상담봉사를 해 오고 있으며, 그가 거리에서 만난 노숙인들의 이야기를 코너를 통해 풀어낼 예정입니다.

이번 이야기는 노숙인 상담원으로 활동 중인 필자가 들은 이야기를 1인칭으로 기록한 날적(나날이 적기)이 일부입니다. 신원을 보호하기 위해 내용의 수정이 있었음을 밝힙니다.

- 편집자 주

 

'덜그럭'

또, 빠져버렸다. 하필 밥 먹기 직전에 떨어지다니. 조각을 뱉어 들고 건물 입구에 들어서자, 경비를 보는 이의 얼굴에 난처한 표정이 어린다. 꾸벅, 고개를 숙이고선 뒤돌아선다. 이제 나도 제법 노숙자 태가 나는 걸까. 에어컨 실외기 뒤에 숨겨둔 가방을 꺼내느라 허리를 굽혔다 펴니 유리에 비친 내가 보인다. 깨져버린 이빨 조각과 유리에 반사된 내 모습이 어딘가 닮아있다.

“아저씨.”

어느새 경비원이 옆에 와 서있다.

“미안합니다. 거울만 좀 보고 가려다가.. 금방 갈게요.”

제발 저린 대답이 얼른 튀어나온다.

“그런 거 아녜요. 들어오셔도 되는데 왜 돌아가세요.”

“아… 그럼 혹시 핸드폰으로 사진 하나만 찍어줄 수 있을까요? 내껀 켜지지가 않네.”

경비원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드러나기도 전에, 이~ 하고 앞니를 다 꺼내 보인다.

“히익!”

“아이고 많이 놀랐죠, 내가 임플란트가 다 빠져버려서 이래요. 어떻게 생겼는지 좀 보고 싶은데…”

떵떵거리며 살았더랬다.

나의 첫 사회생활은 공기업에서 시작됐다. 몇 년 열심히 일해 자리를 잡는가 싶더니 우연히 좋은 기회를 만났다. 함께 일하던 공공기관의 공무원이 된 것이다. 이런저런 벌이도 꽤 좋았기에 돈 쓰기를 아끼지 않았다. 덕분에 주변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고, 그들이 불러주는 ‘사장님’ 소리는 나를 취하게 했다. 취기 오른 인생을 얼마나 즐겼을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주위의 어떤 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보증 잘못 서면 망한다는 이야기가 내 얘기가 될 줄이야.

처음 소식을 들었을 때는 믿지 않았다. 취기가 덜 가신 채 느꼈던 잠깐의 우려, 거기에 불안이 더해져 두려움이 되었지만, 조만간 상황이 나아져 안도할 수 있을 거란 막연한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배신감과 분노가 찾아왔다. 함께 걱정하고 위로하던 이들이 하나 둘 떠나갈 때, 배신감은 더욱 커져갔다. 그리고 그 모든 감정은 수치심으로 자라나 세상 어느 곳에도 나를 쉬이 드러내지 못하게 되었다.

두 손으로 하늘을 가린다. 나를 볼 수 있겠지만, 내가 보지 못하는 것으로 족하다. 볕이 있는 동안 그렇게 숨어 지내는 것이다. 간신히 하루를 살아내면, 또 간신히 밤을 맞는다. 오늘도 경비원의 배려 덕에 건물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바람을 피하고, 수치도 가릴 수 있는 고마운 공간이다.

한동안 이곳에 자리를 펴다 보니 찾아주는 사람도 생겼다. 노란 조끼를 입은 이들이다. 자신을 상담원이라 소개하는 이들은, 상담 받을 것이 없대도 자꾸 찾아와 내 안부를 묻는다. 안부를 물으며 나누는 대화 가운데 한 번씩은 수치심이 치솟는다. 과거를 회상케 하는 물음에 답하며 하얗게 질리기도 한다. 그런데도 하루 단 한 번, 나를 드러내고 손님과 보내는 일상적인 시간을 기다리게 된다.

오늘은 늘 오던 사람이 젊은 친구를 한 명 더 데리고 왔다. 치과 공부를 하는 친구란다.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그에게 화답하는 중에도, 쇠막대가 잔뜩 박힌 내 앞니가 부끄러워 자꾸 손으로 입을 가린다. 건물과 건물 사이, 이 소박한 공간에서 요란한 검사가 이어진다. 핸드폰 불빛을 비춰가며 기둥의 모양을 관찰하는가 하면, 무엇을 기록하는가 싶더니 툭툭 건드려 보기도 한다. 떨어져 나간 이빨을 모아둔 통을 건네자 이리저리 살핀다. 도와줄 수 있으니 처음 해 박은 치과에 그와 함께 가잔다. 깨져버린 가짜 이빨을 도로 붙일 수 있다는 장담이, 깨져버린 내 파편도 찾아 붙여보자는 소리처럼 들린다.

고마운 마음 대신에, 눌러 담았던 수치심이 고개를 쳐든다. 나는 가짜 이빨과 같지 않다. 나는 진짜로, 망가진 존재다. 이 꼴로는 어디에도 갈 수 없다는 말이 입에서 맴돈다. 하지만 내뱉는 순간의 수치스러움이 두려워 차마 입을 떼지 못한다. 금요일 오후, 어떻게든 시간을 내어 찾아오겠다는 그가 내 양손을 잡고 약속을 재차 확인한다. 그러마고 했지마는 그럴 수 없음을 안다. 경비원, 노란 조끼.. 고마운 이들이 눈에 밟히지만, 이제 이 공간을 떠날 때가 된 것 같다.

내일은 청계천에 가봐야겠다. 이빨 붙이기 좋은 본드가 어디 있으려나.

후원계좌
국민은행 001501-04-136347
서울특별시립다시서기종합지원센터

 

이승현 (경희대학교 치과대학·치의학전문대학원 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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