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광장] 어험, 조선남녀상열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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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광장] 어험, 조선남녀상열지사
  • 편집국
  • 승인 2003.11.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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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캔들’로 들여다본 조선시대 성 풍속도


통하였느냐?

조선시대 남녀상열지사 ‘스캔들’이 뒤늦게나마 대한민국의 극장가를 강타하고 있다. 전도연, 이미숙, 배용준의 화려한 캐스팅으로 지난달 3일 개봉한 영화 ‘스캔들’은 지난달 19일 현재 전국에서 총 2,771,399의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에 성공을 거두고 있다.

이러한 성공에는 여러 가지 이유를 들 수 있겠지만 ‘조선시대 최고의 요부와 바람둥이의 정절녀 후리기’라는 기상천외의 섹스 스캔들이 몰고 온 바람몰이도 한 몫 했을 듯싶다. 공자와 맹자, 그리고 주자성리학이 지배했던 봉건사회, 조선에서 감히 섹스 스캔들이라니?

그런데 정말 조선에서 이런 섹스 스캔들이 있기나 한 일이었을까? 결론부터 말한다면 생각보다는 상당히 많이 있었던 일이라는 것이다. 특히 조선시대 초기에는….

아무리 무지막지한 조선시대라 하더라도 이런 정도의 섹스 스캔들을 원천봉쇄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또한 백번 양보해 영화의 시대적 배경이 조선 초기가 아니라 조선 후기인 정조시대라 할지라도, 더욱이 영화라는 예술작품에 대해 역사적 사건으로의 진위여부를 따지고 드는 것은 무의미한 일일 것이다.

그래서 문제는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섹스 스캔들이 지니고 있는 이데올로기, 말하자면 남녀차별의 성 관념과 그에 따른 성 풍속도 일지도 모른다.

요부와 정절녀

사실 우리가 상식처럼 알고 있는 ‘남녀칠세부동석’과 ‘열녀문’으로 대표되는 조선시대의 성 풍속도는 조선을 개창하고도 한참 뒤인 16세기 중반이후에나 조금씩 전 사회적으로 자리 잡게 된 일이다. 고려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왕가의 근친혼과 난삽한 성관계에서 볼 수 있듯 성문제에 관한한 상당히 개방적이었다.

그래서인지 조선시대에 전 사회를 강타한 대표적인 섹스 스캔들은 유교 이데올로기가 전 사회적으로 정착하기 이전인 조선시대 초기에 벌어졌다. 이것이 바로 조선시대 최고의 요부인 감동과 어을우동(어우동) 사건이다.

세종 재위 시절 사대부 출신 유부녀인 감동은 음행으로 남편에게 버림받은 후 스스로 창기라 지칭하며 수많은(그가 발설한 상간자는 39명) 남자들과 관계를 맺었다. 물론 이들은 사헌부 지평 및 공조판서를 비롯한 공신 자제, 수령 등 남편의 매부까지 포함한 사대부 계층이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에 대한 세종의 판결. 상간자들은 “감동이 음녀이기에 남자들만의 잘못이 아니다”는 이유로 장형과 파직으로 일단락했고, 감동 역시 “남녀의 욕구를 어찌 법령만으로 막을 수 있겠는가?”하는 세종의 선처로 사형을 면하고 관비에 처해졌다.

그러나 성종 재위 시절 어을우동은 달랐다. 역시 음행으로 남편에게 버림받은 우동은 숱한 남자들과 성관계를 맺다 사헌부로 잡혀왔는데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처벌을 모면한 대부분의 남자들과는 달리 교형(사형)에 처해졌다.

당시 주자성리학이 점차 조선 사회의 지배이념으로 자리를 잡아가던 시대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사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후 사대부가의 음녀 섹스 스캔들은 거의 자취를 감추고 만다.

이는 어을우동의 사형이라는 정부의 일벌백계 방침에도 영향을 받은 듯하지만, 그것보다는 주자성리학이 자리를 잡으면서 ‘남녀칠세부동석’으로 대표되는 내외법과 삼가녀 자녀안 등록(3번 결혼한 여자를 간통녀 목록에 등록. 태종), 재가녀 자녀 출세금지(성종), 재가금지(중종) 등의 법 제정 이후 자식들의 출세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을 두려워한 여인들의 자기 희생의 결과가 더 컸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초기까지 왕조실록에 심심치 않게 등장했던 간통녀 대신 정절녀, ‘열녀문’의 시대가 개막하게 된 것이다.

바람둥이는 없다?

그런데 여기서 더욱 주목해야할 점은 조선시대 전 사회를 강타한 간통사건에 ‘요부는 있어도 바람둥이는 없었다’는 사실이다.
사실 조선시대 여자들에게는 재가를 금지하고 열녀되기를 협박했지만, 남자들에게는 축첩은 물론이고 관기 등과의 혼외 성관계를 허용하고 있었다.

물론 이것이 양반 사대부가에 한정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조선시대 양반 사대부가의 남자들은 성문제에 관한한 사대부가의 유부녀와 간통하지 않는 이상 사회생활에 전혀 지장을 받지 않았다. 특히 기생뿐만 아니라 계집종의 경우 그 남자 주인은 당연히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정말? 정말이다. 그러면 어디 한번 그 증거를 찾아보기로 하자.
조선 인조대 함경도 회령과 경성의 병영에서 근무했던 박취문(1617-1690)이라는 사람이 쓴 ‘부북일기’를 보면 목적지로 부임해 가는 동안 주막에서 동침했던 여인들의 인적사항과 이름을 기록해 놓은 것이 있다.

세상엡 인조 22년 12월 11일부터 23년 2월 23일까지 약 70일 동안 그가 짧게는 2~3일, 길게는 열흘 간격으로 주막에서 관계를 맺은 유녀(매춘녀)는 총 14명(기생 6명, 주탕 3명, 비 4명, 주모 1인)이었다. 물론 부임해서는 외방기녀의 일종인 방직기나 방직비를 공식적으로 제공받았다. 지방 수령의 휘하에 있던 춘향전의 춘향모, 관기들처럼….

다시 ‘스캔들’로

이제 다시 조선남녀상열지사 ‘스캔들’로 돌아가 보자. 조선 중기 이후 남녀간의 내외법이 강화되면서 집안에서도 안채에 갇혀 외간 남자와의 만남 자체를 통제받았던 사대부가의 여인들. 이들이 혹 외도를 시도했다면 사촌간인 ‘스캔들’의 조씨부인과 조원처럼 인척(특히 외척)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이러한 외도가 들통 났을 때, 그들의 운명은 무엇이었을까? 감동과 어을우동? 그러나 그 피해가 자식(남편의 자식이기도 하다)들에게도 미치게 된다면… 그러한 외도를 공식화할 사대부가는 아마도 없었을 것이다. ‘스캔들’의 한 장면처럼 자객을 시켜 쥐도 새도 모르게 살해하거나 자결을 요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남편과 집안의 살해 음모를 당연히 사전에 알아채고 몸종과 함께 미리 줄행랑을 쳐 청나라로 가는 배에 오른 요부 조씨 부인의 운명은? 그녀가 금붙이들을 얼마나 빼돌렸는지는 알 수 없으나, 여성의 직업이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던 봉건사회 속에서 그녀의 운명은 유녀, 즉 매춘녀로 전락하는 길 뿐이었을 것이다.                                   

문화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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