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위령비의 차이…진정한 뉘우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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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위령비의 차이…진정한 뉘우침
  • 정선화 기자
  • 승인 2018.04.20 18: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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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연 현장르포] 19기 진료단, 퐁니‧퐁넛·하미마을 위령비 참배…같은 듯 다른 위령비의 기억

베트남평화의료연대 19기 진료단이 지난 2월 24일부터 3월 4일까지 7박8일의 진료활동을 마치고 귀국했습니다. 일정 세번째 날, 진료단은 1968년 학살이 일어났던 꽝남성 퐁니‧퐁넛마을과 하미마을 위령비를 참배하고 마을에서 자행된 학살과 위령비에 담긴 기억을 돌아봤습니다. 

-편집자 주

퐁니마을 위령비.

진료단 일정 셋째 날, 평연 19기 진료단은 1968년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일어난 하미마을과 퐁니‧퐁넛마을의 위령비를 참배하고 과거의 기억을 되새겼다.

퐁니‧퐁넛마을은 베트남의 남과 북을 잇는 1번 국도 옆에 위치해 있으며, 당시 여러 미군 초소와 한국군 초소와도 인접해 있었기 때문에 미군 및 한국군과 교류가 많았던 곳이다.

하지만 마을을 지나가던 한국 청룡여단 1중대가 1번 국도에서 부비트랩에 공격당한 직후 퐁니‧퐁넛 마을로 총부리를 돌리면서 35가구 74명이 살해됐다.

학살 이후 마을로 찾아온 미군 병사는 이 참상을 사진으로 남겼고 이 사진들은 30년 뒤 한국군의 과오를 밝히는 데 일조했다.

19기 진료단이 퐁니마을 위령비로 향하고 있다.

이날 한베평화재단 구수정 상임이사는 당시의 상황을 피해자에게 들은 이야기를 토대로 재구성해 진료단에게 들려줬다.

그날은 음력 1월 14일로 정월대보름 제사를 앞두고 있었고, 그날따라 굉장히 조용하고 폭격도 없어서 여성들이 제사에 쓸 재료를 사려고 길을 나섰대요. 이 일행엔 득 할머니와 그녀의 10살이 채 안 되는 찐저라는 아들이 있었어요. 그런데 마을 입구 쪽으로 걸어나오니 한국군들이 총을 들고 뛰어오고 있었어요. 같이 가던 사람들과 득 할머니는 막 달아났고 마을 입구에 도착하고 보니 찐저가 없더래요. 그래서 아들을 찾으려고 득 할머니는 다시 한국군 쪽으로 뛰어갔고, 결국 총을 맞았어요. 득 할머니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지만 찐저는 결국 죽었죠. 득 할머니는 평생을 찐저의 손을 놓친 걸 괴로워하며 살았고 미군이 찍은 찐저의 마지막 사진을, 피해자들이 뒤엉켜 있는 사진을 소중하게 간직했어요…

퐁니‧퐁넛마을의 위령비는 이런 사실을 알고 베트남에게 사죄하고자 했던 민간단체인 ‘나와우리’가 2010년 건립을 추진해 세워졌다.

이 과정에서 부족한 예산은 마을 사람들이 십시일반으로 모았으며 직접 돌을 나르는 등 건립에 참여했다고 한다.

퐁니마을 응우옌티탄의 집에도 방문해 제단에 향을 올렸다.

이날 학살 피해자이며 당시 8살 아이였던 응우옌티탄은 진료단이 지나가는 모습을 보고 직접 찾아와 이야기를 나누고 집에 찾아와 제단에 향을 피워줄 것을 부탁하기도 했다.

이에 진료단은 그의 집을 방문해 제단에 향을 피우고 사죄의 묵념을 올렸다.

하미마을 위령비.

진료단이 이어서 방문한 하미마을은 1968년 음력 1월 24일 일어난 학살로 135명의 주민이 희생됐던 곳이다. 이들은 대부분 노약자와 여성들이었으며 갓 태어나 아직 이름을 짓지 못했던 영아도 다수 포함돼 있었다.

하미마을 주민들 역시 한국군과 교류하며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어느 날 갑자기 한국군에 의해 소집돼 영문도 모르고 학살당했으며 한국군은 철수한 뒤 다시 돌아와 살아남은 마을 주민들이 겨우 수습해놓은 시신들마저 불도저로 깔아뭉개는 일까지 저질렀다.

하미마을에서 잔인하게 학살된 이들의 넋을 기리는 위령비는 2000년 월남참전전우복지회(이하 참전군인회)의 기금 지원을 받아 세워졌다.

뒷면이 연꽃그림으로 가려진 하미마을 위령비.

애초에 위령비 뒷면에는 학살의 내용과 함께 한국군을 용서한다는 내용의 비문이 적혀있었지만, 준공식 당일 이 비문을 없애지 않으면 준공하지 않겠단 참전군인회의 강경한 입장과 정부의 압력에 부딪쳐 2001년 결국 연꽃 그림으로 가려지고 말았다.

하미마을 사람들은 한국군이 처음 우리를 학살한 게 1차 학살이었다면 불도저를 끌고들어와 시신을 뭉개버린 것은 2차 학살이며, 많은 세월이 지난 후에도 비문까지 닫게 한 것은 우리의 정신을 말살하려는 3차 학살이라고 말했어요.

구수정 이사는 “당시 한국군의 지시에 의해 모였고 명령처럼 고함지르는 군인들이 있었다는 증언이 있는 것을 보면 하미마을 학살은 퐁니·퐁넛 학살처럼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계획된 학살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며 “한국의 과오를 인정하고 사과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피력했다.

구수정 이사가 진료단원들에게 위령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한편, 퐁니마을의 생존자 응우옌티탄은 동명의 하미마을 생존자와 함께 지난 21일, 22일 베트남 민간인 학살의 책임을 묻기 위해 열린 시민평화법정에 원고로서 참석했다.

이날 시민평화법정에서는 학살 피해자들의 증언과 참전 군인의 증언 및 증인 신문 등 재판 절차가 진행됐으며 재판장으로 참석한 김영란 전 대법원장 등 재판부는 ▲퐁니·퐁넛 학살과 하미 학살의 피해자에게 배상하고 사과할 것 ▲두 사건 이외에 베트남전쟁 당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에 대해 진상규명에 나설 것 ▲한국군의 베트남전쟁 참전을 홍보하는 모든 공공시설 전시물에 민간인 학살이 있었음을 함께 전시할 것 등을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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