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원한·증오 내가 안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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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원한·증오 내가 안고 간다"
  • 정선화 기자
  • 승인 2018.04.26 17: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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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연 현장기록] 하미마을 생존자 故팜티호아 집 방문…학살 이후 생존자의 삶과 용서 전해

베트남평화의료연대 19기 진료단이 지난 2월 24일부터 3월 4일까지 7박 8일의 진료활동을 마치고 귀국했습니다. 일정 세번째 날, 진료단은 하미마을 학살의 생존자였던 팜티호아 할머니의 집에 방문해 그의 제단에 향을 바치고, 큰아들인 록아저씨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편집자 주

진료단은 故팜티호아의 큰아들 록을 만나 생전 팜티호아의 이야기를 들었다. 사진은 팜티호아와 그의 남편.

평연 19기 진료단은 하미마을 위령비를 참배한 뒤 팜티호아의 집을 방문해 학살 당시 다낭에서 일을 하고 있어 화를 모면했던 팜티호아의 큰아들 록을 만나 생전의 팜티호아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팜티호아는 하미마을 민간인 학살사건의 생존자로 한국군에 의해 아들과 딸, 두 발을 잃었으며 지난 2013년 사망했다.

록은 종전 후 1975년 어머니와 함께 하미마을로 다시 돌아왔으며 땅을 개간하다 지뢰가 터져 두 눈을 다쳤다. 현재는 시력을 모두 잃은 상태다.

록은 “멀리서 찾아와주신 진료단 여러분에게 감사드린다”며 “어머니가 살아계셨다면 여러분을 보고 너무 좋아하셨을 텐데, 이야기가 끝난 뒤 어머니의 제단에 향을 바쳐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어 록은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풀어놓았다.

하미마을 학살 생존자인 故팜티호아의 큰아들 록.

“학살 이후 한국군이 마을을 불도저로 다 밀어버렸기 때문에 어머니는 저와 동생을 데리고 다낭의 친척집으로 갔어요. 그런데 그 집도 상황이 너무 안 좋은데, 어머니는 두 발이 없으니 노동을 하기 어려워서 결국 동냥을 다니셨어요. 그때 별명이… 어머니가 걷는 걸 보고 미군들이 스카이콩콩이라고 부르기도 했대요. 그렇게 동냥을 다녔는데 베트남 사람들은 돈이 없으니 결국 미군부대 앞, 한국군부대 앞으로 갈 수밖에 없었어요.”

“어머니는 꼭 주머니를 두 개를 가져가셔서 한국군에게서 받는 돈을 따로 모았어요. 그리고 집에 돌아오면 저희를 앉혀놓고 인두를 달궈서, 한국군에게 받은 지폐를 한 장 한 장 빳빳하게 다렸어요. 그때 어머니의 표정이 얼마나 무서웠는지 감히 말을 걸 수도 없었어요. 그 후엔 돈을 셌는데, 이건 우리 씨의 목숨값… 이건 우리 판의 목숨값……. 씨와 판은 학살 당시 죽은 제 동생들이에요. 그리고 어머닌 ‘아들아 이렇게 해서라도 살아내야 하는 것이 인생이다’ 라고 가르쳐 주셨어요.”

진료단이 록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다.

한베평화재단 구수정 이사도 “동냥 이야기는 할머니 생전에 저희에게 한 번도 해주지 않았던 이야기라 장례식날 처음 알았다”며 팜티호아가 세상을 떠날 때의 일화를 전했다.

"팜티호아 할머니는 저희를 정말 아껴주셨어요. 다른 분들이 선물로 주고가신 차나 떡이 있으면 꼭 저희가 올 때까지 숨겨놨다가 꺼내주시곤 했어요. 그런데 돌아가실 즈음에, 아마 징후가 아니었나 싶어요. 할머니가 갑자기 저희에게 ‘내가 억울해서 내 자식에게 장례를 못 맡기겠으니 너희들이 장례를 책임져라’, ‘내 자식이 얼마나 고생하면서 살았는데, 너희들이 내 관을 사내라’고 고함을 지르셨어요. 그 자리에 계시던 다른 분이 저희가 장례를 치르겠다고 약속을 드리니까 가장 좋은 나무로 관을 짜달라고 하셨어요. 그리고는 저희가 없을 때, 아들을 불러다 앉혀놓고 ‘만약 한국 친구들이 오면 곡 내가 용서하고 떠났다’고 전해달라고 하셨대요. 제가 20년 동안 굉장히 많은 생존자분들을 만났지만 용서라는 말을 하고 떠나신 분은 처음이었어요…."

"할머니는 마을 사람들도 불러모아 ‘내가 원한도 미움도 증오도 다 가져갈테니 한국사람들 그만 미워하라’고도 말씀하셨대요. 또 할머니는 하미마을 위령비 비문을 지키기 위해 앞장서신 분이었는데 ‘이제 세월도 지났고 한국에서 아이들도 많이 오는데 그들이 보면 마음이 얼마나 아플까’, ‘이제 그냥 둬도 될 것 같아’ 이렇게 마지막 당부를 남기고 그날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이후 록은 진료단에게 베트남의 전통민요 중 하나인 ‘어머니 올봄에 저는 못 가요’라는 노래를 들려줬다.

록은 "전쟁 당시 집에 못 가는 사람이 많았고, 특히 하미는 죽어서 못 가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이 노래가 마음에 남았다“며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이 나기도 해서 이 노래를 들려주고 싶다"고 전했다.

진료단은 이야기가 끝난 뒤 팜티호아의 제단에 향을 바치고 록과 포옹으로 인사를 나눴다.

진료단은 팜티호아의 제단에 향을 올렸다.
록은 진료단 한명한명에게 포옹으로 작별인사를 전했다.

아래는 ‘어머니 올봄에 저는 못 가요’ 노래의 가사 전문이다.

어머니 올봄에 저는 못 가요

저물녘에 하늘 높이 제비가 날고 들녘에는 노란 매화가 피었어요
고향길 저 멀리 안개처럼 아득하네요
어머니 올봄에 저는 고향에 돌아가지 못할 것 같아요
어머니는 문간에 기대어 해질녘까지 저를 기다리겠죠
집을 떠나던 날 약속 드렸어요
매화꽃잎이 떨어져 마당에 수북이 쌓일 때쯤 돌아오겠다고
어쩌나 이제 봄이 와 버렸는데
어머니와 저 사이에는 길이 가로막혀 있네요
어머니가 그리워도 찾아 뵐 수 없네요
아 기다림이 어머니의 머리카락을 안개빛깔로 물들일지 모르겠습니다

올해 설은 우리 집이 참으로 쓸쓸하겠어요
뒷 뜰의 골목길은 서글프게 고요하고
봄은 왔는데 우리 아이는 돌아오지 않네요
제단에 향 세개비를 피웠어요
축문의 문구가 제 속내처럼 들렸어요
할아버지, 정월 초하루가 되었는데 우리 아이는 정녕 돌아올 줄 모르네요
집에 닭이 있어도 할아버지 제사에 올릴 엄두가 안나요
아껴두었다가 우리 아이가 돌아오면
설날 사흘을 흥겹게 보내고 싶어서요
밤새워 쌀과자를 빚고 설떡을 찌는 날인데
기력이 다하도록 기다리고 기다려도
녀석은 돌아오지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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