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란이 피기까지는·떠나가는 배·향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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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란이 피기까지는·떠나가는 배·향수
  • 김다언
  • 승인 2018.06.15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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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다언’s 문학 B급 살롱] 김다언 작가

 2017년 김다언이란 필명으로 『목마와 숙녀, 그리고 박인환』이란 시 해설집을 펴내며 데뷔한 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 인천지부(공동회장 김영환 주재환) 이창호 회원. 그가 올해부터 1940년대~1960년대의 한국문학사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뒷이야기를 본지에 ‘김다언’s 문학 B급 살롱‘이란 코너를 통해 연재키로 했다. 여섯 번째 이야기에서는 『시문학』동인의 대표 시인들인 김영랑, 박용철, 정지용 시인의 관계에 대해 다뤘습니다.

편집자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5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1934년 4월 『문학(文學)』 -김영랑

모란 (출처 = 네이버 이미지)

영랑 시인의 ‘모란이 피기까지는’은 봄이 되면 자주 낭송되는 한국인의 애송시이다. 거의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영랑과 정지용은 『시문학』 동인으로 함께 활동했다. 『시문학』은 1930년 3월 김영랑(金永郎), 박용철(朴龍喆), 정지용(鄭芝溶), 정인보(鄭寅普), 이하윤(異河潤) 등이 창간하였으며, 1931년 10월 통권 3호로 종간되었다. 박용철, 김영랑, 정지용 3인이 주도적인 활동을 하였는데, 특히 박용철의 노력이 많았다. 박용철 시인을 모르는 사람이 많지만, 그의 대표작은 가수 김수철의 노래로 우리의 귀에 매우 익숙하다.

나 두 야 간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거냐

나 두 야 가련다

아늑한 이 항군들 손쉽게야 버릴거냐

안개같이 물어린 눈에도 비최나니

골잭이마다 발에 익은 묏부리 모양

주름살도 눈에 익은 아, 사랑하던 사람들

버리고 가는 이도 못 잊는 마음

쫓겨가는 마음인들 무어 다를거냐

돌아다보는 구름에는 바람이 희살짓는다

앞 대일 언덕인들 마련이나 있을거냐

나 두 야 가련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거냐

나 두 야 간다

                 떠나가는 배, -박용철

‘떠나가는 배’는 1930년 3월 『시문학(詩文學)』 창간호에 발표되었다. 박용철은 영랑과 정지용의 시집을 발간해서 당시 유명시인으로 발돋움하는 데 공이 많았으나 정작 본인의 시집을 내는 것엔 소홀했다. 한마디로 희생정신이 투철한 사람이랄까. 『시문학』을 만들고 동인들의 시작 활동을 독려해 조선 문단을 풍성하게 했으나 결국 박용철 시인은 이른 나이에 사망하고 시집은 사후에 발간된다.

박용철 시인과 영랑은 절친한 사이였으나 지향점은 차이가 컸다. 당시 카프(KAPF : Korea Artista Proleta Federatio)가 조선 문단의 주류를 이루고 있을 무렵 박용철이 그에 관심이 많았다면 영랑은 반대였다. 그러나 그들은 개인적인 차이는 접고 공통의 관심사인 문학 활동에 매진하기로 합의를 본 것이다. 정지용 시인이 국토순례를 하며 글을 쓰고 기고를 하는 과정에 강진에 들러 영랑의 집에서 머물고 함께 제주에 다녀오는 등 『시문학』 동인 활동을 하면서도 또한 사적으로도 매우 친밀한 사이였다. 카프의 맹장 ‘임화’가 폐 질환으로 병석에 있을 때 이들은 함께 문병을 하고 측은한 마음을 드러내며 안타까워했던 기록이 있다. 그때는 좌우의 차이가 있더라도 지금의 극단적인 대립양상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친일파의 매국적 행위가 문제였고 대부분 문인은 그에 대한 반감이 컸을 것이다.

영랑은 창씨개명을 않고 일본의 식민지 정책에 저항했던 시인이다. 그러나 해방 후 발간한 영랑시집이 나올 때는 대표적인 친일시인인 서정주가 발문을 쓰고 정지용과는 아주 멀어졌다. 영랑은 1948년 제헌의회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했다. 이승만 정부에 지지를 보내는 지주 출신으로 출마한 영랑과 토지개혁을 바라는 농민들의 정서는 메울 수 없는 거리가 있었다. 결국, 영랑은 낙선하고 그 후 고향을 떠났다. 해방 전과 해방 후의 이념적 갈등 양상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일본이 강제로 빼앗은 농지를 해방 후 친일파의 처벌과 농지의 공정한 배분을 바라던 대다수 국민들의 요구가 있었다. 그러나 이승만 정부는 지주계층과 친일파를 주요 지지층으로 두고 국민 대다수의 요구를 묵살하고 극한의 대결로 치달았던 때이다. 결국,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로 과거의 정이 생존이 걸린 대결 구도 사이에 들어설 여지는 없었던 것이다.

미국과 소련의 합의 하에 만든 ‘남과 북’ 한국사의 비극은 종교계나 문단 등 그 어느 곳도 피할 수 없는 38선을 만들어 놓았다. 아직까지 우리에게는 70여 년간 고향을 찾아갈 수도 가족을 만날 수도 없는 이산가족이 존재하며, 세계사에서도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비극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그리움이 다하여 눈물마저 말라버린 지금, 이제 곧 고향을 찾아갈 수 있을까?

옥천에 있는 정지용 시인의 생가 ( (출처 = 네이버 이미지)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즐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의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조름에 겨우 늙은신 아버지가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마음
파아란 하늘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섬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바다에 춤추는 밤물결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지고 이삭줍던 곳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짓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향수, 조선지광(朝鮮之光) 1927

 

 

김다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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