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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치‧인의협‧청한‧건약의 탄생까지…건치 정책연‧서경지부 주최 ’2018 열린강좌‘ 성료…근‧현대 보건의료운동의 역사적 순간 포착
안은선 기자 | 승인 2018.06.15 10:28
건치 정책연과 서경지부가 공동주최한 '2018 열린강좌 인문의학' 마지막 강연 참석자 일동

어렵게 느껴질 수 있는 ‘한국 근대 의학사’를 알기 쉽게 풀어내 호평을 얻은, 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이하 건치) 구강보건정책연구회(회장 전양호)와 서울‧경기지부(회장 김의동)이 공동기획한 ‘2018 열린강좌 인문의학’이 지난 7일 강연을 끝으로 마무리됐다.

이번 강좌는 인하대학교 의학전문대학원 최규진 교수 초청 강연으로, 한국의 의료역사가 어떻게 정립돼 왔는지 살펴봤다. 강연은 ▲서양근대의학 도입의 상징 ‘우두법’ ▲한국 최초의 의대‧병원‧의사 ▲731부대와 낙태죄를 통해 본 의료윤리 ▲한국 보건의료운동사 등을 주제로 꾸려졌다.

특히 최 교수는 ‘한국 보건의료운동의 역사 – 우리의 뿌리를 찾아서’를 주제로한 마지막 강연에서, 항일운동에 나선 의사 출신 독립운동가들을 소개하고 해방 이후 독재정치 하에서의 의료인들의 사회 참여 87′ 호헌철폐 선언으로 건치,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이하 인의협), 참의료실현청년한의사회(이하 청한) 등 전문가 단체 설립에 이르는 과정을 다뤘다.

항일운동의 산실…경의전

최 교수는 1899년 조선 민중의 요구로 세워진 근대식 의학교육기관인 ‘의학교’가 1905년 본격적인 일제 식민지가 시작되면서 ‘대한의원 부속 의학교’로 1910년 ‘조선총독부의원 부속 의학 강습소’로 강등되는 등 수난을 겪었다고 밝혔다.

이와 더불어 의사 출신 독립 운동가가 배출되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라고 짚었다. “각각 세브란스의학교 졸업자 김필순과 이태준은 중국 신해혁명에 가담하면서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며 “이들은 각각 상해와 몽골에서 독립운동을 지원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1916년 일제에 의해 만들어진 경성의학전문학교(이하 경의전) 출신 독립운동가에 대해 소개했다.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상해 임시정부에서 활동을 시작한 ▲유상규 ▲나창헌 ▲안효구 ▲이미륵 ▲한위건 등은 모두 경의전 출신이다.

참고로 3‧1운동 당시 경성에서 체포된 학생은 총 171명이며 그 중 경의전 출신이 31명으로 가장 많았다.

유상규는 안창호의 최측근으로 임시정부의 핵심인 교통국 조사원에서, 흥사단원으로 민족운동과 위생계몽운동을 이끌었으며 조선의사협회 창립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건치 정책연과 서경지부가 공동주최한 '2018 열린강좌 인문의학'

1930년대 움튼 보건의료운동의 원형…

최규진 교수는 현재의 보건의료운동의 원형은 1930년대에 시작됐다고 봤다. 그는 대표적 인물로 경의전 출신 양봉근과 세브란스의학교 출신 유석창, 도쿄제국대학 의과대학 출신 최응석을 꼽았다.

최 교수는 “양봉근 역시 3‧1운동을 겪고 바로 고향인 부산에 내려가 3월 29일 시위를 주도했고, 1927년 신간회 창립에도 참여했다”며 “1931년엔 경성협화의원을 개원하고 독립운동을 지원했을 뿐 아니라 조선인 노동자에 대한 무료 검진을 실시했다”고 밝혔다.

그는 “양봉근은 의원 거물에 ‘보건운동사’를 설립하고 『보건운동』이란 잡지를 발간했지만, 일제의 탄압때문인지 1933년 3호 발간을 끝으로 폐간됐다”고 말했다

유석창은 이른바 ‘실비진료 운동’을 펼쳤는데, 이는 재료값만 받고 가난한 민중들을 진료하는 활동이었다. 이를 계기로 경성에 ‘실비진료병원’을 짓는 것이 하나의 운동으로 등장했고, 이 병원은 후에 민중병원으로, 현재의 건국대병원으로까지 이어졌다.

도쿄제국대 의대 출신 최응석에 대해 최 교수는 “보건의료운동에 가장 체계적으로 접근해 운동을 인물”이라며 “그는 당시에 의료제도의 국영화, 사회보험제도의 확충을 통한 무료진료, 자격의사에 의한 치료, 약품 제조 및 수입의 국영화, 국영병원에서 의료관계자의 근로시간을 6~8시간으로 단축하는 것 등을 주장했다”고 설명했다.

해방 이후 최응석은 서울대의 전신인 경성대 교수로 재직했으나, 미군정 눈밖에 나 월북했다. 그는 북한의 공적 보건의료 시스템의 기초를 다진 것으로 알려졌다.

호헌철폐 시위에 나선 서울의·치대 학생 및 의료인들 (출처 = 최규진 강의 자료)

4‧19혁명부터 87′호헌철폐 선언까지

최 교수는 해방 이후 미군정 하에서 보건의료인들의 운동성이 약간 떨어졌으나 4‧19 이후 다시 회복했다고 봤다. 4‧19 혁명 당시 의‧약대생은 가운행진을 펼쳤으며, 간호협회는 협회차원에서 봉사대를 파견해 부상자들을 돕기도 했다.

1965년엔 한일국교정상화에 반대하는 6‧3항쟁에 의대생들이 참여키도 했으며, 1960년대 말 박정희가 정권을 잡고 ‘교련교육’을 대대적으로 실시했으나 이에 대한 반대운동이 거세자 박정희는 위수령을 발령했고, 이어 유신헌법을 밀어뭍이기 위해 ‘긴급조치’를 발령했다.

이에 처음으로 저항한 시위는 서울의대에서 일어났으며, 당시 시위를 주도한 3명은 체포되고 5년형을 살았다. 이어 인의협 심재식·양길승 선생 등이 ‘사회의학연구회(이하 사의연)을 창립했으며, 이들은 1974년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약칭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됐다. 사의연은 1976년 박정희가 일으킨 간첩사건으로 사실상 해체됐다.

이후 1986년 사의연 멤버들은 시흥에 ’신천연합의원‘을 개원하고, 의료사업을 펼치고 사회운동을 지원했다.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하고, 당시 중앙대 전임강사였던 오연상의 증언이 87′항쟁의 기폭제가 됐다.

최규진 교수

박정희 사망 이후 정권을 잡은 전두환은 ’호헌‘을 선언했고, 의료인들 중 최초로 부산에서 1987년에 5월 29일에 ’치과의사‘ 16명이 호헌 조치 반대 성명을 발표했다. 여기에 참여한 이들은 모두 건치 부산‧경남지부의 중심 멤버가 됐다.

이에 자극을 받아 같은 해 6월 1일 약사 37명이 선언에 동참했으며, 연세대와 서울대 전공의들을 중심으로 137명의 의사들이 호언조치에 반대하는 시국성명을 발표했다. 서울대 의‧치대 학생들도 ’호헌철폐‘와 ’독재타도‘를 외치며 거리로 나왔다. 이런 흐름은 6‧10 민주항쟁으로까지 이어졌다.

인의협은 그해 11월 창립됐으며 이어 1988년, 1989년에 건약, 건치, 청한이 설립됐다. 최 교수는 “조선말부터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보건의료인, 의학도들이 자신의 의술과 열정을 살려 괜찮게 운동을 만들어왔다”며 “해방이후, 독재정권 등 암울한 역사 속에서 여러분도 그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고 소감을 전했다.

안은선 기자  gleam0604@gunch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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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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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언 조 2018-06-21 10:32:55

    음, 건치가 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군요.
    이탈리아 레스토랑, 오스테리아 프란체스카나가 올해 1위를 했다는 소식의 링크를 타고 여기에 오게 되었습니다.
    좋은 정보가 많군요. 감사합니다.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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