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가 의학 공부하면 가슴이 없어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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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의학 공부하면 가슴이 없어진대”
  • 이소희 학생기자
  • 승인 2018.06.20 09:45
  •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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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조각] 최초의 서양 근대 여성 의사·치과의사

여성이 시민이 아니던 시절이 있었다. 여성이 참정권을 획득하고 자신의 자유의지로 직업을 갖고 그에 대한 적절한 보상을 받기 위해 수많은 이들의 노력이 있었고, 현재도 진행 중이다. 기원전부터 시작된 의학의 긴 역사 중 여성이 치료의 대상이 아닌 의료행위의 주체로 등장한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이는 의‧치학뿐 아니라 사회 전 분야에서 비슷한 양상이 발견된다.

서울대학교 치과대학 1회 졸업사진에는 단 한 명의 여성도 등장하지 않는다. 2018년 현재 ‘치의학의 역사’를 배우는 수업에서도 여성 치과의사에 대해서 다루지 않는다. 여성들이 치의학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못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한국인 ‘여성’ 치과의사들이 존재했음에도 무슨 이유에선가 이들의 존재가 배제되고 축소된 건 아닐까? 그건 비단 그땐 그럴 수밖에 없었지, 하는 옛날이야기의 후렴구일 뿐일까?

최초의 (남성)치과의사를 기억하는 일과 마찬가지로 최초의 여성 치과의사 역시 기록될만한 역사적 가치를 지닌다. 의도적으로 지워진 여성 치과의사들에 대해 그 의미와 가치를 복원해내는 과정이 필요하다.

여성으로 태어났든 혹은 여성으로 길러졌든, 여성 치과의사들은 ‘여성’과 ‘치과의사’라는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게 되는 순간이 있을 것이다. 이 두 가지 고민은 ‘여성 치과의사’의 삶에서 선택적으로,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혼재되고 연결돼 마음 속에서 오랜 기간 부유하는 질문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문직업인인 ‘여성치과의사’가 그 정체성을 세우고 ‘치과의사’로서 ‘남성 치과의사’와 같은 지위를 성취해 가는 과정에서, 앞서 걸으며 길을 만들어 낸 선배들의 흔적을 찾고 또 현재의 ‘여성 치과의사’가 지난 길을 다시 거칠 후배들을 위해 좋은 흔적을 만드는 것이 만드는 것이 이 정체성 찾기의 시작일 것이다.

서울대학교 치의학대학원 본과 3학년 이소희 학생이 ‘치의학의 역사’ 수업 시간에 이러한 문제의식을 갖고 쓴 『여성 치과의사들의 흔적을 모아 만든 조각보』란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다.

이소희 학생은 논문의 결론 부분에서 “접근가능하고 기록이 남겨진 인물들에 대한 자료 외에는 구할 수 없었고 자료의 양과 질도 한정적이라, 연결고리를 찾기가 쉽지 않아 어떤 ‘흔적들’을 조사하는 기분이었다”며 “드문드문 남겨진 기록들을 엮다 보니 남은 천 조각을 모아 조각보를 만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밝혔다.

특히 그는 “이 분야에 대한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고, 더 많은 자료가 발굴, 수집되고 이를 이용가능한, 의미 있는 형태로 정리하고 가공하는 ‘의미화’ 작업이 필요하다”며 “현재 여성 치과의사들이 겪는 현실적 어려움, 성취 등 또한 잘 기록해 놓을 필요가 있다는 게 논문의 출발점”이라고 강조했다.

본지는  『여성 치과의사들의 흔적을 모아 만든 조각보』를 총 4회로 나눠 연재할 예정이며, ▲최초의 서양 근대 여성 의사와 치과의사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여성치과의사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을 중심으로 본 여성 치과의사 ▲흩어진 조각을 이어붙이기 위해서… 등의 주제가 다뤄질 예정이다.

첫 번째 ‘최초의 서양 근대 여성 의사와 치과의사’편에서는 여성이 의료행위의 주체로 등장하게 된 배경과 여성의 의‧치대 입학이라는 벽을 문으로 바꾸어 낸 여성 의료인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편집자 주 : 논문의 서문과 결론 부분을 발췌‧정리한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서울대학교 치과대학 1회 졸업 사진(ⓒ 이소희 논문)

근대 의학은 스스로를 과학적이라 주장하며 권위를 얻었다. 그러나 근대 의학‧치의학 역사에서 권위를 가진 의료인들은 비과학적이고 비논리적인 방식으로 여성 의료인의 자격을 제한하고자 했다. 영국의 정신과 의사이자 멕시코 카를로타 황녀의 주치의인 헨리 모즐리는 여성이 의학을 공부하면 가슴이 볼품없어질 것이라며 여학생들에게 경고했다. 의료계 종사자들과 의대 남학생들은 여성들이 의사 자격시험을 치르는 것을 막기 위해 가는 길을 막고 콩과 쓰레기를 던졌다고 한다.*

1847년에 Elizabeth Blackwell은 미국 의과대학의 입학을 허가받은 첫 여성으로 뉴욕의 Geneva Medical College에 입학했다. 알려지기로는 당시 이 학교는 장난삼아 입학을 허락했는데 정작 입학을 한 후 Elizabeth Blackwell이 열심히 공부하는 것을 보고 당황하며 실습실이나 강의실 출입을 금지 시켰다. 그 정도로 당황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방해에도 불구하고  결국 Elizabeth Blackwell은 공식 면허를 취득한 최초 근대 여성 의사로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당시 의사 면허를 취득했다 하더라도 여성의사가 공공병원에 취직 하는 것은 물론, 개인병원을 내도 환자가 오지 않는 등 실제 취업에 있어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Elizabeth Blackwell은 1857년 뉴욕 빈민가에 ‘The New York Infirmary for Women and Children’이란 이름의 진료소를 열게 된다.

이후 Elizabeth Blackwell의 여동생인 Emily와 다른 여성의사인 Maria Zakrzewska가 진료소에 합류하면서 ‘The New York Infirmary for Women and Children’은 최초의 여성이 운영하는 병원으로서 다른 여성의사들에게 전공의 교육을 실시키도 했다.

영국에서는 Elizabeth Blackwell보다 먼저 의대에 진학한 여성이 있었다. 그는 Margaret  Ann  Bulkley(1789~1865)라는 본명 대신에 공식적으로 James Barry라는 남성 이름으로 평생 군의관으로 살았다. 그가 여성이라는 사실은 그의 사망 이후에나 알려졌다.**

치의학 분야에서도 이와 비슷한 역사가 존재했다. 남동석(1992)***에 따르면 영미권 국가에서 최초의 여성 치과의사는 치과의사인 남편 Povey가 사망한 후 그 일을 이어 한 인물로 정작 본인의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여성에 대한 정보는 1917년 영국에서 발간된 『The Port Bay of London』에 실린 광고에를 통해 알려진 것뿐이다. 이와 유사한 사례로 미국  Connecticut 주의 Emeline Rubert Jones도 치과 의사인 남편과 함께 치과 의료인으로 활동을 한 인물이 있다.
 
그는 1854년 치과의사인 남편과 결혼 후 그 치과 치료실에 보조인이 되려 했으나 여성을 치료실에 조수로 쓸 수 없다는 남편의 주장 때문에 실패했다. 그러나 Emeline은 남편 몰래 수백 개의 치아에 filling을 연습 해 그 노력과 능력을 인정받아, 남편의 허락하에 소수의 환자를 치료 할 수 있었다. 이후에도 Emeline 해부학 및 치의학 공부를 지속했으며 남편 사망 이후에야 치과의사로 온전히 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지역에서 60년 동안 호평을 받으며 진료를 계속했으며, 1893년에는 Connecticut 치과의학회원으로 선출됐고 1914년 National Dental Association의 명예 회원이 되었다.

초기 여성 치과의사들은 치과의사인 남편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가능성은 긍정적 혹은 부정적인 영향을 모두 포함하는데 전문직업인의 모습을 가까이서 관찰한 것이 새로운 지식에 대한 자극, 동기가 되었을 수 있으며 교육과 지식에 접근이 쉬워지는 경로가 되었을 수 있다. 또한 과거 도제식 교육 방식으로 의학이 전수되던 시절에 여성은 본인을 지도해 줄 선생을 찾기가 어려웠고, 의료인 남편을 둔 여성들은 다른 여성 보다 가까운 가족인 남편으로부터 지지와 응원까진 아닐지라도 적절한 수준의 지식과 기술을 전달받았을 가능성을 추측해 볼 수 있다.

Lusy B.Hobbs는 최초로 정규 치과 교육을 받고 D.D.S. 학위를 취득한 여성이다. 그가 처음 치과 진료를 배우려 했을 때 남성들의 반대로 도제식 수업에서 배제당했고 ‘주제 넘는다’는 평가를 받았다. 당시에는 학위 없이도 치과 진료를 할 수 있었기에 Hobbs는 어렵게 치과 관련 기술과 지식을 익힌 후 Cincinaati에 본인의 진료소를 열었다. Iowa로 이주 후에는 ‘the woman who pulls teeth(이 잘 뽑는 여성)’으로 불릴 정도로 유능한 치과의사로 인정받게 되었다. 이후에 정규 교육 과정을 받기 위해 Ohio Dental College에 지원하여 입학 허가를 받았지만 교수단의 번복으로 취소되었다. 결국 그녀는 Iowa Dental Society에 회원이 된 후에야 사람들의 도움으로 정규 학생으로 입학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학위 취득은 당시 논란이었다.

1865년 6월 8일 『Dental  Times』의 사설에서 Dr. Baker는  “여성은  치과시술에  필요한 힘을 신으로부터 부여받지 못 했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Hobbs는 1865년 Iowa 주 대표 3인 중 1명으로서 National Dental Association 파견됐다. 이는 최초의 여성 대표이기도 했다. 이에 Dr. Baker는 National Dental Association에 지역치과의사회의 대표를 남성만 그 자격을 가지도록 정관을 수정할 것을 제안했지만 부결되었다.****

Hobbs 이후의 여성들에게도 치과대학 입학과 졸업은 쉽지 않았다. 아주 어렵게 입학 허가를 받더라도 학생회로부터 심한 반대에 부딪혔다.***** 이는 의과대학, 치과대학 모두에서 공통적으로 여학생들에게 나타난 다른 동료 학생들의 반응이었다.

19세기 서양의 사례를 언급한 이유는 사람들이 이성적, 과학적, 논리적이라고 여기고 그에 합하는 권위를 부여한 ‘근대 서양 의학’이 여성들에게는 얼마나 협소했고 비논리적이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그 근대 서양 의학은 한국에 들어와 자리 잡으며 비슷한 역사를 반복했다.

<주석>
*제키 플레밍, 여자라는 문제, 노지양 옮김, 서울:책세상, 2017: 104-105쪽
**제키 플레밍,  앞의 글:  127쪽
***남동석, 대한치과의사협회지 30(11), 1992, 833-834쪽
****기창덕, 의학, 치과의학의 선구자들, 서울: 아카데미아, 1995: 121-122쪽
*****여기서 학생회는 당연히 남학생들로만 이루어져 있다. 이 시절 학생이라는 일반 명사는 남학생만을 칭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대학에 여학생은 없는 존재(혹은 비체)이기 때문이다.

 

이소희(서울대학교 치의학대학원 본과 3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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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ㅡ 2018-10-22 10:47:00
치의학 발달 과정에서, 아니 어쩌면 인류 문명의 발달 과정에서 여성은 철저히 배제되다 못해 억압

박인필 2018-06-29 12:59:45
연재가 기대되는 기사에요~ 기사 고맙습니다!

조수민 2018-06-29 11:24:25
치의학의 역사라는 문제에 굳이 남성과 여성이라는 프레임을 들이밀어야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치의학의 발달 과정이 중요한 것이지 그 업적을 이룬 사람이 여성인지 남성인지가 왜중요한 것인가요. '여성'이라는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여성의 흔적을 어떻게든 찾아내려고 하는 집착이 보이는 기사네요.

김경일 2018-06-26 15:47:04
좋은 내용 잘 읽었습니다. 우리나라 이야기도 기대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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