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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송학선, 그와 함께 한 모든 날이 좋았다27일 영결식‧건치장으로…가족‧환자‧동료 100여 명 배웅 속 영면
안은선 기자 | 승인 2018.09.28 15:08
(좌) 송준규 씨와 (우) 문혜영 여사가 고인의 영정사진을 들고 행사장으로 향하고 있다.

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공동대표 김기현 홍수연 이하 건치) 故송학선 전 공동대표(콩세알튼튼치과)의 영결식이 지난 27일 엄수됐다.

건치장(葬)으로 진행된 영결식은 이날 오후 7시 30분부터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 1층 행사장에서 진행됐다. 영결식에는 송 전 대표의 가족과 그와 동고동락한 건치 동료, 선후배, 친우, 문화예술계 인사들까지 100여 명이 모여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했다.

영결식은 건치 김기현 공동대표의 사회로 ▲건치 홍수연 공동대표의 고인 약력보고 ▲고인의 살아 생전의 모습을 담은 추모 동영상 상영 ▲동료 선후배 등의 추모사 ▲유족 대표 인사 ▲김광석‧장사익 선생의 추모 공연 ▲헌화 순서로 진행됐다.

“‘학’처럼 날아가 신'선'이 되시게”

추도사에 나선 故송 전 대표의 오랜 친구인 박성우 씨는 고등학생 시절부터의 고인과의 추억을 회상하며 추도문을 담담히 읽어 내려갔다.

그는 “학선이는 서울치대에 오케스트라단을 만들고, 서울시내 음대를 돌며 찬조연주를 모아내기도 했다”며 “서예, 시조, 거문고, 전각, 문인화, 사진 등 한번 시작하면 정통으로 배우고 끝까지 해내는 친구였다. 여행도 즐길 뿐 아니라 공부하는 여행을 하고 그 사람들을 엮어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뜻을 같이 하는 학교 선후배를 모아 청년치과의사회, 건치 등을 조직하며 정직한 리더십을 펼쳤고, 구성원이 아무리 복잡해도 그걸 하나로 잘 섞어내는 재주도 있었다”며 “8남매 중 막내라 남들과 잘 나누기도 참 좋아했다”고 전했다.

추도사를 전하는 故송학선 전 대표의 친구 박성우 씨

특히 그는 “학선이가 남들보다 2년 늦게 졸업해, 큰누님이 걱정을 많이했다. 그 때 내가 위로조로 ‘누나 걱정마세요. 학선이가 남들보다 늦게 의사가 돼도 다른 동기들보다 훨씬 더 많은 환자에게 사랑받고 인기 있는 의사가 될거에요’라고 했다”며 “그런데 그 말이 맞았네. 이렇게 많은 환자와 의사들이 자네와의 이별을 애도하고 있으니 말이야”라고 눈시울을 붉혔다.

또 그는 “학선이가 이기지 못할 병에 걸렸단 소식에, 많은 친구들은 ‘그 재주 많은 친구가’라며 안타까워하며 울었다”며 “꼭 열흘 전에 나보고 담배 끊으라고 했을 때, 나는 ‘너 때문에 답답해서 피는거야’라고 했다. 학선아 내일 네 장례 때까지만 피우고 그만 피울게. 약속해. 걱정말게”라고 안타까움을 전해 장내를 숙연하게 했다.

故송학선, 술과 노래 그리고 따스한 사랑방

건치의 후배인 건치 부산‧경남지부 정효경 회원은 남부터미널역 인근 송학선치과를 ‘사랑방’으로 칭하며 고인과의 추억과 이별의 아쉬움을 나눴다. 참고로 건치의 첫 사무실도 남부터미널역 근처에 자리했다.

정효경 회원은 “졸업 즈음에 학선이 형이 이 사회를 같이 바꿔야 한다고 선‧후배들을 불러모았을 때 처음 만났다. 그와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내진 못했지만 중요한 시기에는 늘 함께였다”며 “결혼 후 학선이 형이 자신의 치과로 불러 신고식과 환영식을 해 준 일이 기억에 남는다. 송학선치과는 동료들의 사랑방과 같았다. 그는 암울한 시기에 사랑방을 이끌며, 노래 한곡조 뽑아내며 그 시기를 견디게 해 줬다”고 회상했다.

이어 그는 고인과의 지키지 못한 약속을 짚으며 안타까움을 표했다. 정 회원은 “형의 페이스북을 보다 복사꽃 사진이 예뻐서, 어설픈 실력이지만 그림으로 그려보고 싶어 형에게 허락을 구했다. 그러자 학선이 형은 기꺼이 ‘그려서 가져오면 이번 전시회에 걸어줄께’라고 했다”며 “하지만 나는 끝내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전시회 기간에도 한국에 없었고, 추석 때 찾아가야지 하고서도 놓쳤다”고 전했다.

정 회원은 “인생을, 사람을 사랑하고, 재기 발랄했던 형. 무엇을 하던 너희는 살아야 한다고 가르쳤던 형. 나중에 꼭 다시 뵙겠다”고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

(좌) 건치 정효경 회원 (우) 송필경 회원이 故송학선 전 대표에 대한 추도사를 전했다.

고향 후배이자 건치 후배인 건치 대구‧경북지부 송필경 회원도 추도사에 나서 故송학선 전 대표에 대한 그리움을 전했다.

송 회원은 “6‧10 항쟁 후, 대구에서 후배들을 소집했을 때 처음 만났다. 항쟁을 이끈 분이라 해서 투사가 오실 줄 알았는데, 고운얼굴에 청아한 목소리를 가진 분이 오셔서 놀랐다. 하지만 선언문을 읽을 땐 완전한 운동가였다”며 “건치가 만들어진 후에 다들 밤을 세워가며 토론하고, 취중엔 말싸움을 할 때면 항상 학선이 형은 나를 불러 함께 노래하길 청했다. 1920년 가요부터 1970년대 가요까지 몇바퀴를 돌고나면 날이 밝아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항상 형과 함께한 자리는 술과 노래가 있었다. 30평 남짓 되는 시골집에 모여 낮에 학선이 형은 탁본을 뜨고, 저녁에는 잔디밭에 모여 노래 부르고 술을 마셨다”며 “건치에서 송학선은 우리 시대 새로운 유행의 선봉이었고, 인생의 윤활유 같은 부드러운 분이었다. 이런 분을 보내는 게 너무 아쉽다. 치과의사 중 보기 힘든 분을 힘들게 보내야 한다”고 전하며 애통해 했다.

이외에도 故송학선 전 대표와 가까이 지낸 녹색병원 양길승 전 원장, 직지사 흥선 스님, 임옥상 화백, 건강보험공단 김용익 이사장 등이 고인과의 인연을 생각하며 추모사를 전했다.

임옥상 화백은 故송 전 대표의 부인인 문혜영 여사를 위로하며 “발군의 재주를 가진 그를 결정적으로 키운 한 가지가 있다면 문혜영 여사를 만난 이후다”라며 “송학선에게 있어 문혜영은 연인이자, 아내이자, 비서였고 무엇보다 엄마였다”라며 “목소리가 큰 엄마 밑에서 송학선은 말도 잘 들었다. 말도 많은 그가 말수도 줄었다. 그렇다고 주눅 든 건 아니었다. 그 아래서 시도 쓰고 서예도 하고 사진도 찍고 거문고도 뜯었다. 그렇게 놀면서 대성한 것이다”라고 짚어 참석자들의 공감을 얻었다.

그러면서 임 화백은 “문혜영이 있어 송학선이 아름답고 멋있는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다. 그렇게 기량과 재량을 남기고 떠났다”라며 “그래 너 잘났다. 그런데 왜 먼저 가니? 윤기 형 먼저 만나려고 가는 거니. 말기 암 진단을 받고서, 오랫동안 그를 보낼 준비를 했는데 쉽지가 않다. 그래도 우린 그냥 보내야만 한다”고 말을 맺었다.

장사익 선생과 김광석 선생이 고인을 기리며 추모곡을 열창했다.

故송학선, 환경‧반핵운동 1세대 이끌다

故송 전 대표는 우리나라 보건의료계 반핵운동과 환경운동 1세대를 대표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환경 1992년 반핵세계의사회(IPPNW) 한국대표로 총회에 참석하면서 보건의료계 반핵 운동을 주도했다. 이어 우리나라에서 반핵운동에 대한 관심이 크지 않았을 때부터 환경운동연합 반핵특위 위원장을 꾸준히 지내며 운동을 지원했다. 또 환경재단136포럼 운영위원, 과천 NGO연대 대표, 과천생명민회 공동대표를 지냈다. 1995년엔 환경후보로 첫 지자체 선거에 과천시장 후보로 출마했다.

홍수연 공동대표는 “1995년 당시 신한국당의 아성인 과천에서 시장후보로 출마했으나, 1등과 근소한 표차이로 낙선했다”며 “하지만 당시 환경운동연합의 젊은 활동가, 나를 포함해 갓 졸업한 건치의 젊은 치과의사들이 1달간 같이 살면서 선거운동기간 동안 동고동락했다. 그 것이 이후의 모든 조직의 끈끈함을 만드는 힘이 된 것 같다”고 전했다.

1997년부터 故송학선 전 대표와 환경운동연합에서 탈핵운동을 해 왔다는 한 활동가는 식 말미에 나와 “꼭 이 말씀을 드리고 싶다”며 “지금은 후쿠시마 원전사고로 반핵, 탈핵 운동이 많이 알려졌지만, 1995년 무렵의 핵발전소 폐기 운동은 거의 알려지지 않아 활동가들이 많은 고생을 했다. 동물 보호가 주 사업인 생태운동과는 달리 매우 거칠었다”고 운을 뗐다.

그는 “송학선 선생님은 그런 어려운 상황에서 항상 반핵특위 위원장의 자리를 지키며, 사비를 털어가면서까지 반핵 운동의 든든한 후원자가 돼 주셨다”며 “어려운 자리를 끝까지 지켜주셨다는 걸 꼭 알리고 싶었다”고 밝히며 울먹이기도 했다.

고인의 마지막을 알리고 인사말을 전하는 문혜영 여사

“아버지, 행복했다”

유족을 대표해 문혜영 여사가 나와 故송학선 전 대표의 마지막과 남편과의 추억, 조문객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했다.

문 여사는 “내 옆자리에 이제 송학선은 없다. 이렇게 산화돼 가버릴 줄은 몰랐다”며 “남편은 시한부 판정을 받고, 주치의 앞에서 생명연장을 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하고, 투병 생활을 했다”고 말했다.

“죽기 전 날, 나는 저녁 8시 무렵에 잠자리에 들었다가 중간에 깨니 남편이 없었다. 마루에 나가보니 남편이 가만히 앉아 있었다. 뭐하냐고 물어보니 남편은 ‘여보, 나 얼마 못갈 거 같아. 애들 좀 불러 줘’라고 했다. 남편은 아픈 8개월 동안 화장실 수발 한번 시킨 적 없었는데, 그 날은 거의 기다시피해서 화장실에 가 토혈을 두 번했다. 내가 우니까 울지 말라면서 ‘내가 여기까지인 거 같아’라고 했다.

앰뷸런스를 불러 서울대병원 응급실에 자기 발로 갔다. 사실 며칠 전부터는 수분을 충분히 섭취하라는 주치의 말을 듣고도 곡기를 끊었다. 아마도 본인은 다 알고 있었던 거 같다. 작정한 것 같았다. 아들은 ‘아버지는 무슨 계획서 써놓고 죽냐’고 타박까지 했다.

40년을 같이 살았지만 나는 아직도 남편을 잘 모르겠다. 남편은 누구에게도 부담이나 고통을 주는 걸 싫어했다. 작정하고 가는 게 아마 자식들과 나를 힘들지 않게 하려는 것 같았다. 응급실에서는 원래 말기암 환자는 받지 않아서 그날 12시에는 다른 병실로 옮겼어야 했다. 연명치료 받지 않겠다는 서약을 해서 끝까지 자가 호흡을 했다. 그날 오후 12시부터 남편의 호흡이 잦아들었고 약속시간을 좀 넘긴 새벽 2시 30분에 갔다. 끝까지 남에게 폐 끼치지 않고 그랬다.

정말로 남편은 햇빛 좋고, 바람 좋은 날 그렇게 갔다. 야속하다. 본인은 무대에 점찍고 사라졌다. 가면서까지 마지막으로 나에게 숙제도 주고 갔다. 생전에 비굴함을 보이지 않는 삶을 살라고 했고 자존감 꺽지 말고, 결코 무겁지 않고 따뜻하게 밝히며 살다 갔다. 나한테는 목소리가 크니까 사람에게 적대감 갖지 말고 잘 지내라고 했다.

남편 보란 듯이 잘 살 것이다. 앞으로 여러분과 만나며 인사하며 그렇게 지낼 것이다. 와 주셔서 감사하고 송구하다“

추도사를 전하는 故송학선 전 대표의 아들 송준규 씨

故송학선 전 대표의 둘째 아들인 송준규 씨는 “‘아버지 행복하게 살았다’고 말했다. 그 말의 의미를 빈소를 지키며 많이 생각했다”며 “아버지 물건을 정리하려고 치과에 갔다가 한 상자를 여니까 소독약 냄새가 훅 올라오는 데 아빠 냄새였다. 여러분과 작당하고 여러 인연이 얽히고 설킨 그곳이 아마 아버지가 말한 행복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송학선 치과는 여기모인 사람들의 복덕방이었고, 아버지의 고향과 같다”며 “아버지는 마지막에 ‘사람들이 노래하면 내가 따라 부를 것’이라고 말했다. 마지막 가는 길, 노래를 함께 해 달라. 분명 듣고 있을 것”이라고 말하며 눈물을 보였다.

김광석‧장사익 선생의 추모공연과 헌화를 끝으로 한 시간 반가량의 영결식이 끝났다. 고인은 오늘(28일) 오전 8시 30분 안성 천주교공원묘지에서 영면에 들어갔다.

고인 영정 앞에 헌화하는 문혜영 여사
고인 영정 앞에 헌화하는 건치 홍수연 공동대표
흥선 스님이 고인이 영전 앞에 헌화하고 있다.
추모객들이 고인의 영정 앞에 헌화하고 있다.
헌화 행렬
헌화가 끝난 뒤 故송학선 전 대표의 아들 송준규 씨와 부인 문혜영 여사가 '아버지 밉다'며 사진을 남기고 있다.

안은선 기자  gleam0604@gunch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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