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한편] 콘스탄트 가드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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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한편] 콘스탄트 가드너
  • 김형성
  • 승인 2006.07.18 00:00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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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91년도에 대학을 들어갔다.

그 해에 대학을 간 동년배들은 막바지 80년대 정서에 편승하기도 하고, 반항하기도 하고, 또 역시 무심히기도 하면서 청춘을 보내었고, 혹자는 정체성을 문제삼은 소설을 써보았으나 별 반향을 못얻기도 했으며, 서태지와 함께 신세대 논쟁을 무슨 거창한 화두인양 심각하게 토론을 벌였던 색바랜 잡지를 보면서 웃음이 나기도 하는 그런 세대였다.

그리고 지금 나는‘천박한 한 시대를 건너’갔다는 정태춘씨 말씀에 반쯤 동감하는 기분으로 오늘을 살고 있는것 같다.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의 문제는 과거의 질문이나 오늘의 질문이라기보다는 과거에 빚진 현재진행형의 질문일 때 의미를 가질 것이다.

그리고 현재진행형으로 살아가는 존경스러운 활동가들을 보면 이들에게 이런 질문은 없다. 아니 그네들의 생활 자체가 질문이자 답일지 모르겠다.

콘스탄트 가드너는 ‘성실한 정원사’쯤으로 번역할만한 조용하고 자신을 성실하게 다듬어가는 한 남자의 취미생활로 보여지는 주인공의 정체성이다.

고맙게도 영화는, 나와같이 부화뇌동에 심지가 곧지 못해 남들이 벌여놓은 사회문제에 한발짝씩 따라다니기 벅찬 사람에게 주눅이 들지 않게, 대쪽같은 인권운동가 테사의 시선이 아니라 조용한 정원사이자 외교관인 남편 저스틴의 시선으로 이야기를 끌고 가 주었다.

또한 저스틴의 고민은 내내 아내의 죽음을 둘러싼 자본과 정치권력의 부패와 음모보다는 아내가 자신을 배신하진 않았는지에 대해 더욱 맞춰져있다.

아내의 죽음을 따라가면서 그는 아내의 뜻에 감동과 연대감을 갖지 않을수 없었으며 그것이 결국 스스로를 죽음으로 몰아넣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아 간다.

거대제약회사에 관한 대량의 자료와 인터뷰로 소설을 완성시킨 존 르 카레는 다국적 제약회사들이 겉으로는 질병치료에 대한 꿈과 희망을 주는듯 현혹하는 이면에 엄청난 야욕과 부정부패, 거대한 이윤을 챙기려는 각종 음모로 분탕질 되었음을 알게된후 이 문제에 집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자연스레 한국에서 몇 해전 백혈병 치료제인 글리백 가격인하 투쟁과정에 보여준 다국적 제약회사들의 모습을 상기시키게 되고, 며칠전 다국적 제약회사들의 협의체가 우리의 약가절감정책을 반대하는 기자회견을 했다가 보건의료 활동가들로부터 신랄한 비판을 받는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그들의 주장은 환자들의 약에 대한 접근성을 위해 현상황(그들에게 즐거운)을 유지해달라는 것이었다.

접근성이라는 말로 자신들의 이미지를 현혹하려는 습관이 그대로 묻어나는 대목이 아닐 수 없었다.

자본만큼 세상을 바꾸는 일에 골몰하는 존재가 있을까. ‘콘스탄트’하게 자신을 가꾸고 살다가고픈 인생이 뜨거운 사랑과 질투와 죽음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무시무시한 세상에 눈을 뜨지 않을 수 없던 것처럼, ‘예쁘게 세상을 살아가는 것처럼 행복한것 없겠지’만 어디 살아가는게 그렇게 되는 일인가.

혹은 그런 행복한 꿈이 이웃의 절망과 분노위에 꾸려진 하늘공원같은 모습이라면 그게 어디 사람이 꿈꿀 행복이겠는가.

'천박한 90년대'가 지나온 동안 환골탈태한 자본의 모습이 이제 세상을 다시 한 번 바꿔볼 요량으로 한미 FTA를 시발로 다시 ‘예쁘게’ 살아보고 싶은 인생들을 위협한다.

자, 이제 ‘콘스탄트’하게 살 것인가, 진짜 ‘세상을 바꿀’것인가. 이건 영화가 아니라 현실이다.

김형성(건치 서경지부 사업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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론돈 2006-08-14 22:38:42
강기자님의 상상력에 감탄!!!

강민홍 2006-07-19 15:08:17
필력이 장난이 아니십니다. 영화평 잘 읽었습니다. 근데 영화가 무슨 내용인지 감은 못잡겠네요. 아내가 병에 걸려서 죽었는데, 제약회사 횡포로 약을 못먹어가지고 죽은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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