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선생의 영화한편]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상태바
[강선생의 영화한편]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 강재선
  • 승인 2004.06.05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불친절하다.
비루한 일상사를 자질구레하게 늘어놓고는 별 설명도 없다. 치졸하고 유치한 주인공들에게 밥맛없는 실체를 드러내게 해놓고 나를 웃기면서도 불편하게 한다. 아...이런 영화를 보면 뭐라고 말을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딱히 할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  겨울 어느 날, 유학생활을 마치고 온 영화감독 지망생 헌준과 서울 유명대학에서 미술 강사를 하고 있는 문호가 만난다. 그들은 중국집에서 낮술을 마시다 문득 둘 모두의 옛사랑으로 남은 선화를 떠올리고 그녀를 찾아가 선화의 집에서 하룻밤을 보낸다. 담뱃불로 제 손을 지져서라도 용서를 구하겠다는 헌준이나, 헌준보다 자기가 더 보고 싶어 찾아왔다는 문호나, 분명한 것은 그들이 선화와 다시 시작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는 거다.

젊은 시절에는 첫사랑이었지만, 지난밤에는 취기 어린 객기의 대상으로 남은 선화를 위해 ‘나의 것’을 버릴 수는 없다.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데’하며 울고 있는 선화 역시, 실상 두 방에 따로 잠든 두 남자를 하룻밤 사이에 상대할 만큼 무덤덤해졌다.

-  술에 취하면 술 취한 사람들끼리 대화가 이어진다. 그 자리에 맨 정신의 사람은 끼어 들기 힘들다. 사랑의 감정도 마찬가지다. 사랑에 취한 사람끼리 대화가 이어지고 관계가 이어진다. 밍밍한 상태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말들과 행동이 오고간다.

지독한 감정에서 헤어나올 때의 고통은 지독한 폭음 후의 숙취와 흡사하다. 절대고독과 후회와 부끄러움과 혼자 감내해야 하는 괴로움. 소통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함께 술에 취하든지, 술을 깨든지, 함께 사랑에 빠져버리든지, 감정을 정리하든지.
어쨌든 함께 취했던 그들은 모종의 일탈에 합의를 본 셈이다. 그러한 일탈이 그들이 꾸역꾸역 살아나갈 힘이 될지 부끄러운 기억으로 남을지 그저 취했던 하루로 남을지는 모르겠지만. ‘너무 쉬운 거 아냐’라는 선화의 마지막 대사는 헌준에게만 향한 것이 아니다. 헌준이 이기적이라고, 문호가 비열하다고, 선화가 생각이 없다고 탓할 마음이 없는 이유다. 홍상수에게서 가을동화나 겨울연가를 기대한 건 아니니까.

-  낄낄대며 영화를 보고 나왔는데 좀 찝찝하다. 한편으로는 다들 유치하군 하는 생각에 내 과거를 단순하게 일반화시키기도 한다. 너무 쉬운 건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