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당나귀와 사슴 그리고 여우
상태바
흰 당나귀와 사슴 그리고 여우
  • 김다언
  • 승인 2018.12.07 17:5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다언’s 문학 B급 살롱] 김다언 작가

2017년 김다언이란 필명으로 『목마와 숙녀, 그리고 박인환』이란 시 해설집을 펴내며 데뷔한 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 인천지부(공동회장 김영환 주재환) 이창호 회원. 그가 올해부터 1940년대~1960년대의 한국문학사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뒷이야기를 본지에 ‘김다언’s 문학 B급 살롱’이란 코너를 통해 연재키로 했다. 열 두번째 화에서는 백석 시인과 노천명 시인의 관계(?)에 얽힌 이야기를 전한다.

-편집자 주

1936년 1월 백석은 시집 『사슴』을 출간하고 일제강점기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백석 시인은 아름다운 시를 썼을 뿐만 아니라 여성들의 마음을 뒤흔들만한 미남이었다. 노천명의 ‘사슴’이라는 시가 바로 백석을 흠모해서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물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는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 데 산을 바라본다
                           

-사슴-

노천명이 백석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시로 만들었지만, 백석은 천명에겐 관심을 두지 않고 ‘자야’란 여인과의 사랑을 담은 명시를 남겼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백석 시인의 모습 (출처 = https://blog.naver.com/kcis_/30143203255)

노천명은 연극을 하다가 만난 대학 교수와 연애를 했던 적은 있으나 결혼에 이르지 못하고 독신으로 살았다. 그러나 노천명이 마지막까지 그리워 한 사람은 백석이었던 모양인지 그를 그리며 시를 한 편 더 남겼다.

어느 조그만 산골로 들어가
나는 이름 없는 여인이 되고 싶소.

초가 지붕에 박넝쿨 올리고
삼밭엔 오이랑 호박을 놓고

들장미로 울타리를 엮어
마당엔 하늘을 욕심껏 들여놓고

밤이면 실컷 별을 안고
부엉이가 우는 밤도 내사 외롭지 않겠소

기차가 지나가 버리는 마을
놋양푼의 수수엿을 녹여 먹으며

내 좋은 사람과 밤이 늦도록
여우 나는 산골 얘기를 하면

삽살개는 달을 짖고
나는 여왕보다 더 행복하겠소

-이름 없는 여인이 되어 -

‘이름 없는 여인이 되어’라는 시가 왜 백석을 그리는 시인지는 백석의 시 한 편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박을 삶는 집

할아버지와 손자가 오른 지붕 우에 한울빛이 진초록이다
우물의 물이 쓸 것만 같다

마을에서는 삼굿을 하는 날
건넌마을서 사람이 물에 빠져 죽었다는 소문이 왔다

노란 싸릿닢이 한불 깔린 토방에 햇츩방석을 깔고
나는 호박떡을 맛있게도 먹었다

어치라는 산(山)새는 벌배 먹어 고읍다는 골에서 돌배 먹고 아픈 배를
아이들은 띨배 먹고 나었다고 하였다.

-여우난골-

‘여우난골’ 속에서 ‘이름 없는 여인’이 되어 살고 싶은 노천명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를 떠올리면 누구나 한 번쯤 경험해 봤을 풋사랑 기억에 마음이 후끈해진다. 올 겨울 눈이 푹푹 나리는 날에는 달궈진 사춘기의 마음으로 시인의 옛이야기들을 떠올리며 시 한 편 읽어보는 건 어떨까? 

Tag
#N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