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쿠바 여행기 『왜 체 게바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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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쿠바 여행기 『왜 체 게바라인가?』
  • 송필경
  • 승인 2018.12.10 14:41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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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쿠바의 음악과 춤

역사의 아버지 사마천이 역사 자료를 보면서 부닥친 가장 큰 고민은 역사 사건이 발생한 지역의 지리 환경과 풍속을 몸으로 느낄 수 없었다는 점이다. ‘공자세가’를 집필하면서 공자가 성장한 분위기를 이해하기 위해 자신이 활동하고 있는 섬서성 장안에서 공자 고향인 산동성 곡부까지 수천 리 길을 걸어갔다.

교통과 통신 수단이 발달하지 않았던 먼 과거에는 역사 배경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직접 발로 찾아가 눈으로 보아야만 했다. 그래서 나온 말이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 아니겠는가.

요즘은 과거와 달리 역사 배경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직접 찾아가 보아야(一見)할 필요는 없다. 인터넷이 워낙 발달해서, 어설프게 본 것보다는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면 나오는 정보와 첨단 영상의 ‘일견’이 훨씬 더 풍부하고 정확하게 지식을 전달해 주기 때문이다.

사실적인 지식은 온갖 정보를 저장한 디지털의 풍부한 양을 따라가기 힘들지만 그럼에도 인간 체취를 맡기 위해선 아무래도 아나로그 수법인 발품을 파는 게 최선이지 않겠는가.

일반적으로 쿠바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이미지가 혁명이다. 혁명이란 과실은 저절로 결실을 맺어 입안으로 뚝 떨어지지 않는다. 수많은 고통을 겪어야만 손으로 잡을 수 게 혁명의 과실이다. 나는 성공한 혁명의 속살에만 있는 그 체취를 맡기 위해 쿠바에 갔다.

1934년 10월 15일 밤, 중국 남부 장시(江西)에서 남자 약 8만 명과 여자 35명이 길을 나섰다. 작전상 후퇴를 한다고 했지만 사실은 도망자 신세였다. 이들은 총 9654km 길, 중국에서, 아니 어쩌면 지구상에서 인간이 걸을 수 있는 가장 길고 험준한 지대를 368일 동안 걸었다. 산 18개를 넘었고, 강 24개를 건넜으며 수많은 늪지대를 통과했다.

대장정에서 홍군이 걸어간 길(제공=송필경)

마오쩌둥이 이끄는 홍군(紅軍)들은 미국 지원을 받은 장제스 국민당군의 추격과 비행기 폭격을 수없이 받았다. 굶주림과 질병에 시달리면서도 평지도 아닌 험한 길을 제대로 된 신발도 없이 하루 평균 26km 걸었다. 이른바 5천년 중국 역사에서 가장 장엄한 투쟁이었다. 그들이 눈 쌓인 산을 넘고 급류의 강을 가까스로 건너 넝마주의 차림으로 옌안(延安)에 도착했을 때는 겨우 1만 명뿐이었다.

미국 언론인 에드거 스노(Edgar P. Snow; 1905∼1972)는 1936년 6월에 홍군이 머물던 옌안으로 들어가 마우쩌둥, 주언라이, 주더 등 홍군 지도부를 비롯해 어린 병사들까지 4개월 간 직접 취재하면서 스스로 이렇게 물었다.

『그토록 장기간, 그토록 맹렬하고 용감하게, 그토록 불패의 싸움을 벌인 이 전사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이들의 운동을 뒷받침한 혁명적 기반은 무엇인가? 이들을 도저히 믿을 수 없을 만큼 완강한 전사로 만들어 대장정을 이겨내게 한 이들의 희망과 목표와 꿈은 어떤 것이었는가? 이들의 지도자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그들의 이상과 이념, 신조를 열렬하게 신봉하는, 교육받은 사람들인가? 아니면 사회적 예언가들이거나 또는 생존을 위해 맹목적으로 투쟁하는 무지한 농민에 불과한가?』

취재를 마친 에드거 스노는 모든 사람이 골고루 잘 사는 세상을 그리는 꿈이 그들을 고난의 행군으로 이끌었음을 확인했고, 꿈을 꾸며 행군한 홍군 행적을 <중국의 붉은 별(Red star over China)>이란 책으로 소개했다. 이 책은 1917년 러시아 혁명을 직접 목격한 존 리드(John Reed; 1887-1920)의 <세계를 뒤흔든 열흘>이란 책과 함께 20세기 세계 최고의 르포문학(기록문학; Reportage)으로 평가 받는다.

책 『중국의 붉은 별』과 『세계를 뒤흔든 열흘』(제공=송필경)

『중국의 붉은 별』에서 묘사한 대장정은 호메로스의 『오딧세이』에 비견할 대서사시였으며, 중국 역사에 가장 웅장한 발자취로 평가 받고 있다.

나는 에드거 스노가 취재하면서 스스로에게 한 질문을 베트남에서 되새겼고, 이제는 쿠바에서 되새기고자 한다.

중국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큰 나라를 가장 오랫동안 유지했다. 비록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외세에 침탈당하면서 굴욕은 있었지만 큰 나라답게 주체를 잃지는 않았다.

그에 비해 베트남은 19세기 중반부터 100여 년 동안 프랑스에게 주체를 잃고 굴욕의 지배를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 끝난 뒤 냉전을 강요한 미국에게 베트남 인민이 당한 직접 고통은 30년(1945~1975)이었다. 다시 말해 베트남 전 인민은 10,000일 이란 세월 동안 그 하루하루가 혹독한 대장정에 다름없는 고난을 이어갔다.

1492년 콜럼버스가 쿠바에 첫발을 내디딘 후 1898년 미국이 쿠바를 점령할 때까지 쿠바 인민은 스페인 식민 체제 아래서 노예 삶을 강요당했다. 20세기 쿠바를 지배한 미국은 1958년까지 60년 동안 카리브해의 보석보다 아름다운 섬을 매춘과 도박과 마약이 난무하는 환락가로 이용했다.

쿠바는 1959년 혁명 성공 이후 미국하고 관계가 아슬아슬하다가 1961년 단교했다. 그 후 2015년 수교할 때까지 미국에게 경제 봉쇄를 당했고, 특히 1990년 소비에트가 해체하자 경제 후원의 줄이 떨어져 국가 경제가 곤두박질했다. 식량 사정이 얼마나 어려웠으면 쥐는 물론 고양이까지 잡아먹었을 정도였다고 했다. 

중국 문명은 현재까지 온존하고 있는 문명 가운데 최장(最長), 최고(最古)다.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나라다. 중화(中華)라는 자기중심의 자존심이 굉장한 나라이다. 힘으로도 미국과 견줄 수 있는 지구상 유일한 나라다. 이런 나라가 이룬 대장정은 기적에 가까운 과업이었지만 그만한 저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었던 나라다.

100년 동안 프랑스 식민 착취에 찌든 베트남은 미국의 국력에 1/1000도 안 되는 가련한 농업 국가였다. 사탕수수 농장밖에 없었던 쿠바의 국력은 그 베트남의 국력의 반도 채 안 되는 그러니까 많이 봐 봐야 미국 국력의 1/3000 정도인 나라다.

누더기 입은 다윗인 베트남과 쿠바는 갑옷을 입고 총 든 골리앗인 미국을 상대로 돌멩이만 들고 싸운 셈이었다. 골리앗이 질 조건이 전혀 없었고, 다윗이 이길 조건이 전혀 없었는데 다윗이 이겼다. 

신화인가 기적인가? 도대체 달리 표현할 어떤 말이 있겠는가?

나는 베트남을 26차례 방문하면서 베트남 역사에 느낀 점은 이렇다. 미국과 30년 전쟁에서 베트남 인민이 보여준 헌신성은 베트남의 2천년 역사를 살펴보지 않고 이해할 수 없다. 그 저항의 역사라는 거대한 강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격언과 믿음의 시냇물이 항상 흘러들어왔으니, 선조들은 침략에 대한 치열한 항쟁으로 온 강산을 신선한 피로 붉게 물들였고, 20세기 후손들은 그 숭고한 역사를 결코 잊지 않았다.    

인간은 긴장의 연속으로만 살 수는 없다. 현실의 가혹함을 잠재울 심리적 도구가 필요했다. 베트남 민족의 심리적 특성 가운데 하나는 고난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낙관을 지녔다는 점이다. 
베트남 땅은 남북으로는 길지만 동서로는 짧다. 베트남 서쪽에는 높고 긴 증선(長山)산맥이 있다. 베트남에는 일 년에 10번 이상 태풍이 온다. 그 태풍은 서쪽 산맥에 부딪히면서 엄청난 비를 뿌린다. 그래서 베트남에서는 홍수는 다반사다. 그런 환경에 놓인 베트남 민족은 이렇게 말한다. “홍수와 같이 살자.” 홍수를 재난이 아닌 일상사로 받아들였다.

베트남은 예부터 외침이 엄청 많았다. 그런 전쟁을 맞이할 때마다 “전쟁과 함께 살자.”고 했다. 이런 낙관이 고통스런 전쟁을 치르면서도 좌절 않고 신화와 기적을 만들어내는데 큰 몫을 했다고 말 할 수 있다.

그럼 쿠바 인민은 혹독한 시련을 어떤 심리적 도구를 가지고 견뎌냈을까? 여러 글들을 찾아보면 쿠바인들은 노래와 춤을 일상으로 즐긴다는 점이 그들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라 한다. 카리브해의 뜨거운 태양이 담긴 쿠바 ‘음악과 춤’이 ‘혁명’ 다음으로 쿠바를 연상하는 이미지로 자리 잡고 있다.

쿠바인들이 힘든 상황에서도 웃을 수 있는 까닭은 춤과 음악을 사랑할 수 있는 문화 덕분이라 한다. 현실의 고통을 잊게 만드는 무기로써 말이다. 쿠바에는 집집마다 음악 소리가 들리고 거리에서 춤추는 사람을 많이 만날 수 있다. 마약은 현실을 회피하게 하지만 노래와 춤은 현실을 정면으로 바라보게 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아닐까? 

‘가난해도 넉넉한 웃음’이라는 강력한 무기로 열정을 간직하며 그 어떤 역경도 이려낼 수 있는 희망을 간직했다고 나는 본다.

중국인이 우리 민족을 글로써 나타낸 최초의 문헌이 삼국지 위지동이전이라고 한다. 이 책에서 중국인의 첫 눈에 우리 민족인 동이족을 봤을 때 아주 독특한 특징을 ‘음주가무’라고 했다. 

나는 대학생활을 유신시대에서 보냈다. 그 시절 정치 억압에 따른 학생 저항이 많다보니 툭하면 휴교였다. 그러니 학점을 얻는데 까다롭지 않았고 대충 공부를 해도 그럭저럭 졸업을 할 수 있었다. 대학 졸업장만 있으면 취직 걱정은 하지 않았으니 요즘 젊은이들은 상상할 수 없는 아주 다른 세상이었다.

휴교를 강제한 유신시대는 학생에게 공부를 강요하지 못했다. 그러니 수업 끝난 저녁이면 바로 시장 술집을 찾았다. 드럼통을 개조해서 둥그런 양철판을 올려놓고 중간에는 연탄불을 피워 안주 거리를 굽거나 찌개를 끓었다. 술이 익으면 금속 젓가락을 들고 양철판을 두드리며 돌아가며 노래했다. 아니면 지금은 사라진 ‘고고클럽’에 가서 마구잡이 춤을 추었다. 이는 암울한 시대의 울분을 빙자해 스트레스를 푸는 핑계 좋은 놀이였다. 

3세기 우리 조상의 특질이었던 ‘음주가무’를 20세기의 우리에게도 이어졌으니 이런 걸 풍속이라 하지 않을까?

21세기 지구상에서 ‘노래방’이 가장 성업을 이루고 있는 나라가 우리나라다. ‘강남 스타일’의 싸이와 현재 미국 대중음악계 최정점에 있는 방탄소년단의 출현이 단순한 우연이 아닐 것이다. 바로 동이족의 ‘음주가무’가 뼛속 유전자로 자리 잡은 전통이 한류의 원천이 아닐까. 음주가무에 대해서는 일본인도 중국인도 결코 우리를 따라 오지 못하리라.

음주가무와 관련한 우리 민족의 또 하나 특징은 ‘신바람’이다. 음주가무를 즐기는 특성이 동이족의 토속적인 샤마니즘과 결합해서 나타나는 마음의 현상을 ‘신바람’이라고 한다. 이윤추구를 개인의 자유에 맡기면 무서운 저돌성을 발휘하는 ‘신바람’을 낸다. 20세기 후반 남한의 경제 성장 동력은 박정희의 영도력이 아니라 자본주의 이익에 ‘신바람’ 근성을 지닌 대중의 잠재력이라고 나는 본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논의를 하면 끝이 없으니 더 이상 나아가지 않겠다.

말레콘을 구경하고 말레콘 끝나는 지점에서 조금 더 동쪽으로 가서 해변가에 자리 잡은 숙소인 4성급 호텔 ‘파노라마’로 갔다.

아바나의 파노라마 호텔과 로비-로비에는 음악 연주자들이 항상 있다(제공=송필경)

짐을 풀고 간단히 샤워를 하고 로비로 내려갔다. 호텔 중간 공간은 천정까지 빈 공간이고 객실은 그 공간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위치했다. 맨 꼭대기 층에서도 복도 아래로 보면 로비가 다 보인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데 로비에서 노래 소리가 들린다. 로비에 내려가 보니 어떤 커플은 소파에 앉아 있고 남자 2명은 기타 여자 한명은 타악기를 들고 노래를 하고 있었다. 유심히 보고 있으니 노래 두 곡을 불러주고 CD 한 장을 내밀어 10달러를 커플에게 받았다. 커플 쪽이 끝나서 내가 우리 쪽 소파로 오라고 했다. 먼저 자신들이 한 곡을 부르고 다음은 내가 ‘관타나메라’를 신청해서 두 곡을 듣고 CD 한 장 받고 10달러를 줬다. 일행 중 한 사람이 10달러를 주고 CD를 샀다. 이들 3인은 앞 커플과 우리 일행에게 약 20분간 노래를 부르고 30달러를 벌었다. 쿠바는 노동자와 전문직 월급이 거의 비슷하다고 한다. 노동자나 의사나 변호사나 교수나 월급이 50달러에서 100달러 사이라고 한다. 

로비에서 돈 받고 연주하는 연주자들(제공=송필경)

노래로 버는 수입이 꽤 짭짤하리라는 짐작이 갔다. 기타 들고 혼자 노래를 부르는 사람도 있었고 많게는 7~8명으로 밴드 만든 팀까지 쿠바에서 우리가 간 식당에는 거의 다 노래하는 연주자가 있었다.

저녁은 호텔이 아닌 시내 레스토랑으로 갔다. 이름은 ‘El Tocororo’, 쿠바에 있는 깃털이 예쁜 새의 이름을 딴 식당이었다. 가이드 말에 따르면 해산물 요리가 일품이라 한다.

해물요리가 일품인 토코로로 식당(제공=송필경)

우리가 넓은 식당으로 들어서니 8-10명 앉는 식탁에 벌써 6팀이 있었다. 음악 연주는 한참 무르익었고 백인 가수 한 명은 마이크를 들고 식탁을 돌며 노래하다가 무대로 올라갔다. 예약을 해서인지 곧 음식이 나왔다. 듣던 대로 바다 가재를 비롯한 해물요리가 가득했다. 인천공항을 떠난 지 3일 만에 처음으로 푸짐한 진수성찬을 맞았다. 게걸스럽게 먹으며 와인을 쭉쭉 들이켰다. 금방 취기가 올랐다. 귀에 익은 연주가 흘러 자세히 들으니 베사메무쵸였다. 이 노래는 멕시코 대중가요라 생각했는데, 이후 웬만한 연주에서는 빠지지 않고 들었다. 돌아와서 인터넷 검색해 보니 원곡은 스페인 작곡가의 피아노 작품이었으나 이를 멕시코 작곡가 겸 가수가 편곡하여 불렀다고 한다.

손님 자리를 가서 연주하는 연주자(제공=송필경)

나는 동이족인데도 불구하고 ‘음주’와 ‘가’와 ‘무’ 유전자 가운데 ‘음주’와 ‘가’는 어느 정도 세고, ‘무’에는 춤치다. 음주를 했으니 ‘가’가 나와야 하는데, 외국이니 ‘가’가 쉽지 않았다. 대신 얼큰 취한 우리 일행 몇몇과 더불어 자리에 일어나 어설프게 몸을 흔들었다. 그러자 루이 암스트롱과 닮은 섹스 폰 주자는 우리 자리에 찾아와 연주를 했다.

무대 연주자는 여섯 명이었다. 여자 가수 한 사람과 드럼 치는 사람은 백인이고, 피아노, 기타, 색스폰, 또 다른 여가수는 흑인이었다. 체격이 우람한 흑인 여자 가수는 성량이 폭발적이어서 노래에 박력이 넘쳤다. 아프리카적인 요소가 저런 것이 아닐까 하는 느낌을 받았다. 쿠바에 있는 동안 많은 식당 연주를 들었지만 가장 강력한 인상을 이 여성의 노래와 몸짓에서 받았다.

아프리카의 힘이라 할까, 박력 있는 여자 가수와 루이 암스트롱을 닮은 섹스폰 연주자(제공=송필경)

1492년에 콜럼버스가 오기 전까지 쿠바는 소수 종족이 평화롭게 살아가던 섬이었다. 스페인 식민지가 되자마자 원주민은 혹독한 노동 착취와 유럽에서 옮겨온 전염병인 천연두로 멸종하다시피 했다. 원주민의 노동력을 착취하지 못하자 대신 19세기 중반까지 대략 350만 아프리카인들이 노예로 끌려왔다. 쿠바의 푸른 땅은 담배 농장과 사탕수수 농장으로 변하여 검은 노예들의 붉은 피와 한 맺힌 눈물이 깊게 베인 땅이 되었다.

아프리카 노예들은 16세기 초 자신들의 고달픈 운명을 함께 나눌 모임인 ‘카빌도 공동체’ (Cabildos de nación)를 만들었다. 인류가 만든 제도 가운데 가장 잔인한 노예제도의 사슬에 묶여 뼈에 사무치는 극도의 불안, 고난, 좌절, 분노를 달래줄 심리적 연대감과 상호 믿음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원시를 간직한 아프리카 대륙에서는 문자를 통한 문화가 발달하지 않았고 음악과 춤이 언어를 대신한 가장 역동적인 예술 표현이었을 것이다. 카빌도에서는 아프리카 선조들이 조상과 신을 숭배한 종교의식의 유산인 음악과 춤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 풍부한 예술적 유산에 식민 지배자들이 문화 변용을 강압하자 오히려 노예들로 하여금 향수를 뼈저리게 느끼게 했다. 그 결과 아프리카 선조들의 유산은 온전히 보존될 수 있었다.

음악과 춤은 종교 의식에서 차츰 오락거리로 변했다. 노예들에게 음악과 춤은 서로 소통하고 고달픈 일상에서 잠시라도 억압된 그들의 의사나 감정을 표출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아프리카 음악 특징인 북과 타악기의 리듬이 빗어낸 춤은 살아있음의 가장 순수한 표현으로 삶의 중요한 은유의 수단이 되었다. 참혹한 노예 생활에서 나오는 서글픈 가락이 스페인의 강렬한 음악에 점차 녹아들면서 특유의 음악이 생겼다. 여러 친목공동체가 서로 춤과 음악을 주고받으며 새로운 문화로 점차 바꾸어갔다.

또한 쿠바는 지리적으로 유럽과 중남미가 교역하는 통로에 있어 다양한 문화를 접촉할 수 있었다. 특히 스페인의 음악과 아프리카에서 기원한 음악 요소가 합쳐 쿠바 음악의 특질을 만들었는데 이를 <아프로 쿠바 음악(Afro Cuban Music)>이라 한다.

이 음악 유산이 이웃 여러 나라에 퍼져 종교 의식이나 축제에 아용되고 대중오락으로 발전했다. 이렇게 발전한 음악들은 미국과 유럽뿐만 아니라 이제는 전 세계에서 사랑받고 있다. 쿠바의 음악은 팝(Pop)과 록(rock), 그리고  재즈(jazz)와 블루스(Blues)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음악은 춤과 더불어 세계 수많은 애호가를 불러 모았으며 이제는 보편성을 지닌 월드 뮤직이 되었다.

쿠바의 음악에 따른 다양한 춤(제공=송필경)

지배 계층에게 멸시받으며 성장한 쿠바인들의 대중문화는 서구 중심적 가치관이 평가 절하 하여 하위문화로 취급받았으나 끈질긴 생명력으로 이어져 이제는 현대 대중음악 문화의 주도적 위치를 차지하게 됐다.

쿠바 민중들의 중요 표현 수단인 대중문화의 핵심은 쿠바 문화의 전반적 특징을 형성하는 혼종성에 있다. 소수의 백인 지배문화에 억압받는 다수의 흑인 문화는 그 바탕에 지배 문화에 대한 저항성이 깔려있다.

스페인의 오랜 식민 지배로 말미암아 다인종 다문화를 형성하게 된 쿠바는 스페인계의 백인과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 사이에서 탄생한 혼혈족 뮬라토(mulato)가 바로 ‘아프로 쿠바’라는 자체적 문화를 구축하였다. 아프리카의 원초적 감성과 유럽의 세련된 화성, 쿠바 인구의 절반을 넘는 뮬라토가 창조한 다양한 음악들이 절묘한 조화를 이룸으로써 쿠바 음악의 특질이 되었다.

인상적인 아프리카의 리듬 위에 스페인 풍의 선율이 전개하는 쿠바 고유의 음악 손(Son)의 구성은 쿠바의 다수를 차지하는 혼혈종 뮬라토의 문화가 반영된 것이며, 사탕수수 노동자로 온 중국인들의 문화와 1940년대 바티스타 정권 시절에 들어온 미국문화의 영향과 쿠바 주변국들의 음악까지 혼합되었다.

맘보, 치차차, 살사, 룸바, 볼레로 등 쿠바 리듬은 다양하고 그 리듬으로 만든 음악은 다채롭다. 음악과 춤은 쿠바인 모두가 지니고 있는 아주 오랜 문화유산으로서 그 속에서 쿠바인들은 열정을 발산하며 흥을 낸다. 나는 ‘El Tocororo’ 식당의 여성 가수에게서 아프리카 음악의 강렬한 느낌을 맛보았다.

7월 5일 오후 2시에서부터 8시까지 불과 반나절 만에 호세 마르티 국제공항, 혁명광장, 말레콘 해변 그리고 쿠바 음악의 한 단면을 보았다.

엄청난 압축이었다. 그렇지만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직접 보는 것이 최고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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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경 2018-12-12 07:41:33
삶과 문화 저편에 역사까지 꼼꼼히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우리민족도 미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신명나게 음주가무를 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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