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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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다언
  • 승인 2019.01.02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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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다언’s 문학 B급 살롱] 김다언 작가

2017년 김다언이란 필명으로 『목마와 숙녀, 그리고 박인환』이란 시 해설집을 펴내며 데뷔한 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 인천지부(회장 주재환) 이창호 회원. 그가 올해부터 1940년대~1960년대의 한국문학사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뒷이야기를 본지에 ‘김다언’s 문학 B급 살롱’이란 코너를 통해 연재키로 했다. 2019년 첫 번째 원고이자, 열 세번째 화에서는 작가가 새해 첫 일출을 인천항에서 보내며, 이곳에 얽힌 근현대사의 질곡을 풀어냈다.

-편집자 주

2019년 1월 1일 인천항 해 뜨는 모습 (제공 = 김다언)

조선 초기 제물포라 불리던 인천의 작은 항구는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에 의해 1883년(고종 20) 1월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로 강제 개항됐다. 인천항은 1906년 항만 시설 개선 계획이 수립되고 1911∼1918년 사이에는 동양에서 보기 드문 갑문식(閘門式) 제1선거로 건설돼 4,500톤급 선박이 접안할 수 있게 됐다. 1974년 월미산과 소월미도 사이에 갑문 선거가 완공되면서 인천항은 우리나라 최초의 컨테이너 부두가 개장해 현대적인 항구의 위용을 보이며 산업발달의 주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갑문이 위치한 월미도는 막상 인천시민도 잘 모르는 경우가 많지만 강화도만큼이나 역사의 질곡을 온몸으로 받아낸 상처투성이의 작은 섬이다. ‘월미도’하면 수도권의 젊은 사람들은 ‘디스코 팡팡’을 중심으로 한 놀이기구가 많은 유원지를 떠올리고, 나이가 좀 들었다 싶으면 인천상륙작전이 있었던 곳으로 기억할 것이다.

인천에 정착해 25년을 넘긴 나는  2019년 1월 1일 인천항이 있는 월미도에서 일출을 맞이하며 인천항에 대해 공부하고 싶어 월미산 구석구석을 돌아보고 사진을 찍으면서 동이 터오는 산책길을 걸었다. 월미도에 ‘꿈베이커리’가 둥지를 틀고 벌써 3년이 됐는데 마음먹고 살피면서 걸으니 전에는 몰랐던 장소들이 눈에 들어온다. 월미산 중턱 둘레길을 걷다보면 커다란 화물선들이 정박해 있는 내항이 눈에 들어온다.

조금 더 가면  바로 내항이 잘 보이는 곳에 ‘러시아 석탄저장고’안내문이 있고 이는 1896년 러시아가 동아시아 대륙으로 확장하는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공관으로 아관파천 중에 있던 고종을 압박해 인천항 요충지에 군사적 주요기지를 만든 것이다. 이는 1891년 일본이 먼저 월미도 서쪽에 저탄부지를 만들어 전략적 요충지를 선점한 것에 대한 대응이었다. 청나라도 석탄저장고를 만들 계획이 있었으나 1895년 청일전쟁에서 패배해 물러나 그 계획은 무산됐다. 하마터면 작은 섬에 타국의 군대를 위한 석탄저장 3개가 들어설 뻔했으나 2개로 줄어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될까?

월미도 러시아석탄고 안내판(제공 = 김다언)

역사의 수레바퀴를 빨리 돌려 1950년으로 옮기면 월미산 입구에 ‘그린비치’라는 안내판이 있다. ‘그린비치’안내판은 6‧25전쟁 중 인천상륙작전 첫 상륙지점을 설명하고 있다. ‘그린비치’ 조금 위쪽에는 1960년에 만들어져 영문으로 표기된 미국 제7보병사단 상륙 10주년기념구조물이 있다. 당시 월미산은 인천상륙작전으로 초토화돼 풀포기조차 뿌리 뽑히고 민둥산이 된다. 아마 월미산은 현재 해발 102m라고 하는데 1950년 이전에는 더 높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1947년 시인 박인환은 마치 인천항이 과거로부터 외세의 시달림에 부대끼며 해방이 됐어도 국민들  손으로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수 없던 미군정기의 암담한 현실을 시로 담았는데 마치 미래를 예견하는 듯한 여운이 시에 담겨있다.

사진 잡지에서 본 향항 야경을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중일전쟁 때
상해 부두를 슬퍼했다

서울에서 삼십 킬로를 떨어진 곳에
모든 해안선과 공통되어 있는
인천항이 있다

가난한 조선의 프로필을
여실히 표현한 인천 항구에는
상관도 없고
영사관도 없다

따뜻한 황해의 바람이
생활의 도움이 되고자
냅킨 같은 만내에 뛰어들었다

해외에서 동포들이 고국을 찾아들 때
그들이 처음 상륙한 곳이
인천 항구이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은주와 아편과 호콩이 밀선에 실려 오고
태평양을 건너 무역풍을 탄 칠면조가
인천항으로 나침을 돌렸다.

서울에서 모여든 모리배는
중국서 온 헐벗은 동포의 보따리같이
화폐의 큰 뭉치를 등지고
황혼의 부두를 방황했다

밤이 가까울수록
성조기가 퍼덕이는 숙사와
주둔소의 네온사인은 붉고
정크의 불빛은 푸르며
마치 유니언잭이 날리던
식민지 향항의 야경을 닮아 간다

조선의 해항 인천의 부두가
중일전쟁 때 일본이 지배했던
상해의 밤을 소리 없이 닮아 간다

                                        -인천항-

월미산 둘레길 ‘러시아 석탄저장고’안내문 가까운 곳에 ‘평화의 어머니 나무’가 있다. 수령 248년인 이 느티나무는 월미도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로 인천상륙작전 때 다행히 함대가 위치한 먼 바다 반대쪽에 위치한 덕분에 만신창이가 됐지만 간신히 살아남아 인천항의 슬픈 역사를 몸으로 간직한 나무이다. 지금은 해마다 봄이 되면 벚꽃이 만개해 행락객이 몰려드는 명소가 되어 주말엔 차가 밀려 몸살을 앓는 곳으로 변모해 세월의 변화를 실감하게 된다. 숲이 조성돼가며 가을엔 단풍나무와 은행나무 아래에서 셀카를 찍는 사람들로 붐비게 되는 과정엔 오랫동안 나무를 심고 가꾼 인천사람들의 노력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세월이 흘러 나무가 자라 숲이 만들어지고 곳곳의 지난 상처를 덮었듯이 이제는 더 이상 인천항이 슬픈 역사 속에 머물지 않고 동북아평화의 중심항구가 되어 통일의 중심축으로 우뚝 서기를 기원한다.

2019년 첫 아침 월미산 아래에서.

미군 제7보병사단 상륙지점 10주년기념 조형물(제공 = 김다언)
숲이 조성된 사이로 떠오른 해(제공 = 김다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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