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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쿠바 여행기 『왜 체 게바라인가?』9. 위대한 소설가 헤밍웨이와 쿠바
송필경 | 승인 2019.01.07 17:30

“인간은 파괴될 수는 있어도 패배하지는 않지”

쿠바를 배경으로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에 나오는 으뜸가는 명대사다. 이 대사는 헤밍웨이가 작가로서 전 생애에 걸쳐 추구한 정신의 압축이었다. 이 대사 또한 볼리비아 고산지대 산골에서 체포되어 굴욕적으로 사살당한 체 게바라가 혁명의 이상을 쫓아 투쟁할 때 의식한 정신이 아니었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제공 = 송필경)

알라마르 농장을 떠나 20분 쯤 걸려 교외 마을로 갔다. 시내 중심부에서는 남동쪽으로 약 15km 거리라 한다. 관광버스 몇 대와 관광객을 태우고 온 오래된 미제 차량(올드 클래식 카) 택시가 여러 대가 있다. 버스에서 내리니 무성한 숲이 있는 나지막한 동산이 있다.

(제공 = 송필경)

동산으로 올라가는 입구 철문 바로 뒤 야자수 아래 관람료 받는 사람이 있고, 헤밍웨이 얼굴이 있는 자그마한 입간판에 이렇게 쓰여 있다.

'Museo Ernest Hemingway. Finca Vigia'
'어니스트 헤밍웨이 박물관. 전망 좋은 집'

무세오는 박물관, 핀카는 농장, 비히아는 망루 또는 전망대란 뜻이라고 한다. (쿠바에서는 'g'글자를 ‘h'로 발음한다. 핀카 비기아 했더니 가이드가 핀카 비히아로 읽는다고 했다.)
망루가 있는 농장이 즉 ‘전망 좋은 집’이란 뜻이다.

(제공 = 송필경)

외국인으로는 체 게바라 다음으로 쿠바 대중의 사랑을 받는 사람은 의외로 미국인 대문호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1899~1961)다. 헤밍웨이는 20년간 아바나(1939~59)를 들락거리며 살았다. 미국 고향에서보다 그리고 자신의 휴양지로 삼았던 플로리다 키웨스트에서 산 12년보다 더 오래 머물렀다. 헤밍웨이는 아바나에 있으면서 위대한 소설 몇 편을 썼다. 아바나는 헤밍웨이의 감수성을 자극하고 키운 셈이었다. 아바나에서 헤밍웨이의 문학은 영광을 맛봤다.

헤밍웨이는 1928년 4월에 쿠바에 처음 방문했다. 헤밍웨이는 그때부터 쿠바의 매력에 푹 빠졌다고 한다. 헤밍웨이는 투우 경기에서 죽음의 미학을 발견하여 찬양했으며 투우를 신앙처럼 받들었다. 헤밍웨이는 그런 투우 경기가 왕성한 스페인을 사랑했다.

1936년 스페인에서 내전이 일어나자 헤밍웨이는 공화파 정부군을 지원하기 위해 참전했는데 파시스트 프랑코 반군이 승리하자 더 이상 스페인에 갈 수 없었다. 또한 자신이 고향처럼 머물던 플로리다주 키웨스트가 1936년부터 관광지 개발로 북적이자 그곳을 떠나는 대신 불과 150km 떨어진 스페인 풍의 도시 아바나에 눌러 앉다시피 했다.

‘핀카 비히아’ 관람권을 끊고 승용차가 다닐 수 있게 잘 닦인 아스팔트 도로를 30m정도 올라가니 기념품 파는 곳이 있다. 헤밍웨이와 카스트로가 악수하는 사진이 있는 현수막(배너)이 있고 기념품과 엽서를 팔고 있었다. 엽서는 거의 체 게바라 사진이다.

(제공 = 송필경)

카스트로는 철저한 반미주의자였지만 헤밍웨이에게는 호감을 나타냈고, 헤밍웨이 또한 이 젊은 반항아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쿠바 독재자 바티스타의 부패에 반대하고 나선 카스트로는 그런 파시스트 정치인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였다. 바티스타의 부패와 잔학상에 환멸을 느끼던 헤밍웨이는 카스트로를 속으로 지지했다.

카스트로는 공식적인 자리에서 단 한 번 헤밍웨이에 대해 언급했다.
“헤밍웨이가 한 많은 일에 대해 정말 감사를 표하고 싶습니다. 위대한 작가 헤밍웨이는 우리나라에 살면서 주요 작품을 써 우리에게 영광을 안겨 주었습니다. 그는 가장 위대한 작가 중 한 사람입니다. 『노인과 바다』는 내가 읽은 다른 작품과 달랐습니다. 그의 작품은 소설이나 픽션이라고만 부를 수 없습니다. 나는 헤밍웨이를 읽으면서 역사를 배웠습니다.”

카스트로는 쿠바를 배경으로 쓴 소설로 퓰리처상과 노벨상을 받은 『노인과 바다』 같은 중요한 작품을 써서 쿠바를 알린 데에 고마움을 나타내면서 헤밍웨이를 위대한 작가라고 극찬했다. 카스트로는 헤밍웨이가 스페인 내전에 참전한 경험으로 쓴 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읽으며 게릴라전을 배웠다고 하며 헤밍웨이를 존경했다.

"『누구를 위해 종은 울리나』는 내 인생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어요…우리 역사 속에는 농부를 땅에서 쫓아낸 지주에 대한 복수의 이야기들이 있죠. 그런 때는 한 사람의 농부라도 제대로만 역할을 한다면 군대를 물리칠 수 있다고 헤밍웨이는 설명했습니다. 나는 늘 적진 깊숙한 곳에서 헤밍웨이 이야기를 기억했습니다. 나를 일깨워 준 이 책을 잊어버린 적이 없습니다.”

헤밍웨이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전쟁을 싫어합니다. 전쟁을 기어코 일으키는 정치가들의 나쁜 처신과 이기심과 야심을 혐오합니다. 전쟁이 일어난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이겨야 합니다. 전쟁에서 지면 전쟁터에서 일어나는 그 어떤 일보다 더 나쁜 결과를 낳습니다."

베트남의 국민시인으로 추앙받는 탄 타오는 베트남전쟁에서 군인과 종군기자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한 용사였다. 탄 타오 역시 이런 말을 남겼다.
“전쟁은 침략 전쟁과 저항 전쟁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침략 전쟁을 해서는 안 되지만, 저항 전쟁은 반드시 이겨야 합니다.”

탄 타오는 조국이 침략 받은 전쟁에서 국민으로서 당연히 저항했겠지만, 헤밍웨이에게 전쟁은 사실 남의 나라 일이었지만 인류의 양심이란 가치를 따라 참전했다.

스페인내전(1936~1939)은 1936년에 스페인에서 공화파가 집권하자 우익 군부의 우두머리인 프랑코 장군이 반란을 일으켜 국제적으로 확산한 전쟁이었다. 히틀러의 독일과 무솔리니의 이탈리아가 파시스트 프랑코 반군 측을 강하게 지원했고 공화파는 겨우 소련이 지원했을 뿐이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방관했다. 프랑코의 승리는 나치 독일과 파시스트 이탈리아의 승리를 의미했으며, 이 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지는 빌미를 만들었다.

베트남전쟁(1960〜1975)은 미국이 민족해방과 통일을 염원하는 베트남인민을 미국이 공산주의로 몰면서 인류최대의 폭력을 행사한 전쟁이다. 스페인내전과 베트남전쟁은 20세기 인류 양심을 실험한 전쟁이라고도 일컫는다.

스페인내전이 터지자 나치 독일의 위협을 느낀 자유주의 여러 국가의 문인 혹은 신문기자가 의용군으로 스페인에 몰렸다. 헤밍웨이도 예외는 아니었다. 『동물농장』으로 유명한 조지 오웰도 참전했다.

헤밍웨이는 가끔씩 스페인을 방문했다. 스페인을 사랑했고 스페인의 투우를 사랑했던 헤밍웨이는 열렬한 공화 정부군의 지지자였다.

1937년 6월, 스페인에서 귀국한 헤밍웨이는 카네기 홀에서 개최한 '제2회 전 미국 작가 회의'에 참석하여 파시즘의 폭력주의를 부정하고 전쟁에 대한 문인의 책임을 통렬하게 주장했다.

스페인내전에 반파시스트 공화파로 참전한 헤밍웨이를 그 점에서 행동하는 인류 양심인의 반열에 올려도 손색이 없다.

헤밍웨이는 스페인 민중을 대변하면서 이런 글을 남겼다.
"우리는 민주선거를 통해서 우리 땅을 경작할 권리를 얻었다. 그런데 군벌들과 부재지주들이 우리 땅을 다시 빼앗으려고 공격한다. 그러나 우리는 귀족들이 자기들의 오락을 위해 방치한 스페인 대지에 물을 대고 경작할 권리를 얻기 위해 싸운다."

헤밍웨이는 어떤 이데올로기에 확신을 갖고 참전한 것은 아니었다. 파시즘, 자유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무정부주의가 뒤섞여 이데올로기적인 각축장이었던 스페인내전에서 어떤 이데올로기를 내세우지 않았다. 헤밍웨이의 참전은 양심이 판단한 지시에 따랐다.

헤밍웨이는 제1차 세계대전에 의용군으로 참전했고 그 경험으로 『무기여 잘 있거라』는 소설을 세상에 내놓았다. 제2차 세계대전에는 물론 참전했고, 중일 전쟁에 기자 역할을 하며 참가하여 저우언라이(周恩來)를 취재하기도 했다.

헤밍웨이는 1937년 카네기홀에서 열린 미국 작가회의 연설에서 파시즘의 폭력주의를 부정하고 전쟁에 대한 문인들의 책임을 주장했다.

"정말로 훌륭한 작가들은 그들이 참을 수 있는 정부라면 거의 모든 현존하는 정부 체제 아래서 항상 보상을 받습니다. 훌륭한 작가들을 배출할 수 없는 정부 형태가 딱 한 가지 있는데 바로 파시즘입니다. 파시즘은 골목대장들이 하는 거짓말이기 때문입니다. 거짓말을 하지 않는 작가는 파시즘 아래서 살거나 창작을 할 수 없습니다.“

작가가 지녀야 할 기본 자질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정의와 불의에 대한 의식 없는 작가는 소설을 쓰기보다는 영재학교 졸업앨범이나 편집하는 게 나을 것이다…좋은 작가의 가장 핵심적 재능은 충격 방지 처리가 된 헛소리 감지기를 내장하는 것이다. 그게 작가의 레이더이며, 모든 위대한 작가는 그걸 가지고 있었다.”

‘깊은 호감’에도 불구하고 헤밍웨이와 피델 카스트로의 만남은 낚시 대회에서 단 한번 만났다.
아바나에는 1950년 5월부터 현재까지 헤밍웨이 이름을 내건 '청새치 낚시 대회'가 있다. 1960년에 카스트로가 참가해 1등 했다. 그때 헤밍웨이가 카스트로에게 시상하면서 만난 장면 사진이 몇 점 있다.

헤밍웨이는 아바나에서 살면서 쿠바 바티스타 독재 정권의 사회 부조리에 눈 감지 않았다. 쿠바인 친구들과 모종의 계획을 세우고 몰래 혁명군을 도우기 위해 무기를 다량으로 갖고 있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 2018년 7월 5일 개봉한 『헤밍웨이 인 하나나(원제: Papa Hemingway in Cuba)』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가 있다. 아름다운 아바나의 풍광을 실제 아바나에서 촬영했다고 한다. 헤밍웨이의 인간적 내면세계(전신 질환, 우울증, 알코올 중독, 자살 충동 따위가 일으킨 정신 혼란)와 혁명 직전의 쿠바 상황과 아내와 친구들 사이 몇 가지 비화를 잘 묘사하고 있다.

헤밍웨이는 극단적인 반공주의였던 매카시즘 열풍에 휩싸인 미국에서 FBI 감시를 받았고, 쿠바정부는 헤밍웨이가 카스트로에 호의적이었음을 눈치 채고 스파이로 몰아 쿠바를 떠나도록 공작을 하는 등 무언의 압력을 가했다. 헤밍웨이는 FBI 국장인 존 에드거 후버의 감시로 정신적 괴로움을 당했고, 후버의 공작으로 세금 폭탄을 맞기도 했다,

기념품 가게 주위로 여러 작은 부속 건물이 있고 30m쯤 올라가면 언덕 정점 중앙에 옅은 노란 색 건물이 있는데 헤밍웨이가 살았던 집으로 지금은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실내는 들어갈 수 없으나 주택 창문을 다 열어놓아 바깥에서 실내를 충분히 볼 수 있고 사진을 마음대로 찍을 수 있었다. 방마다 헤밍웨이가 남겨 놓은 유물이 가득한데 살아있을 때의 모습 그대로 라고 한다. 집 주인이 잠시 외출을 한 동안 주인의 사생활을 몰래 훔쳐보는 그런 느낌으로 집 구경을 했다.

(제공 = 송필경)

모든 방에는 헤밍웨이의 삶이 농축해 있는 것 같았다. 드넓은 거실과 침실, 헤밍웨이가 듣던 음반들, 글을 쓰던 책상, 사냥 도구들, 사냥할 때 입던 옷, 특히 9천여 권에 달한다는 엄청난 책은 어느 방에나 다 있고, 잡지, 신문들을 가지런히 정리해 놓았다.

(제공 = 송필경)

방마다 벽에는 아프리카 사파리여행 때 잡은 버팔로며 사슴 같은 동물 머리 박제들이 걸려 있다. 헤밍웨이가 낚시로 잡은 새치를 자랑하는 모습, 주위 사람들에게 권투를 가르쳐 주는 모습 같은 흥미로운 사진들이 실려 있는 책이 있다고 한다. 또한 유명한 화가의 그림도 무수히 걸려 있는데 피카소의 그림도 있다고 했으나 시간이 없어 찾아내지는 못했다.

(제공 = 송필경)

욕실에는 체중계가 있고 욕실 벽에는 낙서 같은 것이 있었다. 당뇨를 비롯한 여러 성인병을 앓고 있어 매일 체중을 기록해서 써놓은 숫자라 한다. 자신도 건강에 대해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는 증거라 볼 수 있다.

(제공 = 송필경)

이 ‘핀카 비히아’는 3번 째 아내 마시 겔혼과 함께 살기 위해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의 인세로 1940년에 구입한 주택이다. 저택만 약 4천 평방미터(1200평)라 한다. 수영장, 야구 놀이마당 등 야외 시설까지 합하면 훨씬 더 넓다. 그 주위는 마치 수목원처럼 가꾸어 놓았다.

1950년대에는 4번 째 부인 메리 월시와 쿠바를 떠날 때까지 살았다. 어떻게 여기에 살게 됐느냐는 질문을 하자 헤밍웨이는 이렇게 답했다.

"아바나 위쪽 언덕의 이른 아침에 대해 설명하기란 난감한데 여름의 가장 더운 날에도 그곳의 아침은 서늘하고 상쾌합니다…당신은 그들에게 일 년 내내 농장을 떠다니는 낯설고도 사랑스런 새들에 대해 얘기하지 않으며 지나가는 그 모든 철새들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습니다…당신은 사람들에게 쿠바에 사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당신이 글을 써보았던 세상의 다른 어떤 곳만큼이나 그곳의 서늘한 이른 아침에 글쓰기에 좋기 때문이라고 말이죠."

아바나는 미국 플로리다 남단에서 보면 바로 코앞이다. 미국과 가까우면서도 조용히 지낼 수 있고 미국에서 언제든 쉽게 오갈 수 있었다. 아바나에서는 스페인에 가지 않고도 스페인 풍 문화를 만끽할 수 있고, 좋아하는 바다낚시를 매일 즐길 수 있다는 점에서 더할 나위 없는 매력을 간직한 곳이었다.

주택 바로 옆에 비히아(Vigia)라는 3층 짜리 망루 또는 전망대가 있다. 아바나 시내가 거의 평지라서 주택에서도 시내가 잘 보이지만 비히아에 오르니 아바나 전경이 드넓게 보였다.

(제공 = 송필경)

언덕 위에서 주택으로 올라온 길 반대편으로 내려가니 수영장이 있다. 가이드는 여기서 배우 에바 가드너가 알몸으로 수영했다고 한다. 영화 『헤밍웨이 인 하바나』를 보면 헤밍웨이 부인이 남자 손님과 알몸으로 수영하는 장면이 나온다.

(제공 = 송필경)

수영장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낚시 요트 필라(Pilar)를 전시해 놓았다. 길이가 12m, 폭이 3.7m이며 최대속도 16노트라 한다. 겉면은 검은색, 배안 바닥은 녹색, 배 뒷면은 노란색, 배 겉면 바닥은 빨강색으로 칠해 낚시 배로는 매우 고급스러웠다. 낚시 배 필라는 그의 삶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했다. 헤밍웨이는 스페인에서는 투우를 즐겼고, 아프리카에서는 사냥을 즐겼고, 이곳 아바나에서는 바다낚시를 즐겼는데 이 배를 사용했다.

배 이름 필라는 아내 롤린(Pauline)의 별명이었고 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 나오는 여성 빨치산 지도자 이름이다. 1934년에 당시로는 거금인 7천 5백 달러에 구입했다 한다. 헤밍웨이는 이 배를 타고 낚시를 하면서 거대한 물고기 청새치와 사투를 벌이는 소설 『노인과 바다』를 쓰는데 영감을 얻었다.

필라호를 전시한  곳 앞에 자그마한 비석 네 개가 있는 데, 비석의 주인공은 헤밍웨이가 키우던 애완견이라고 한다. 유명인 부잣집의 개는 사람보다 훨씬 상팔자라는 걸 보았다.

(제공 = 송필경)

위대한 소설가 헤밍웨이의 흔적은 전 세계 이곳저곳에 남아 있지만 쿠바에서 흔적이 가장 큰 의미를 갖고 있다.  헤밍웨이는 한 장소에서 지긋이 살지 않았다. 4대륙 20여 개 나라를 찾아다니며 삶의 흔적을 남겼고, 이름난 도시의 호텔을 옮겨 다니며 많은 글을 썼다. 여성 편력도 만만찮은 데 네 명의 여성과 결혼했으며 애인도 여러 명이었다. 핀카 비히아에서 3번 째 4번 째 부인과 살았으며 여기서 여러 유명 배우와 염문을 뿌렸다고 한다.

쿠바 혁명 이후 외국인 소유의 재산은 몰수당했는데 헤밍웨이의 핀카 비히아도 예외는 아니었다. 혁명군 사령관이었던 피델 카스트로의 아버지는 시골에서 넓은 농장을 가지고 있었다. 이 땅 역시 국가 소유로 당연히 몰수당했다.

헤밍웨이는 혁명 다음해에 미국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고 그 다음해 1961년 여러 정신과 육체 질환을 앓다가 자살로 추정할 수 있는 총기 사고로 생을 마감했다.
   
나는 문학의 깊이를 잘 모른다. 헤밍웨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내 세대에서는 헤밍웨이 소설로 만든 영화가 제법 있었다.

내가 본 영화는 게리 쿠퍼와 잉글리드 버그만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1943년 작)와  록 허드슨과 제니퍼 존스가 나온 『무기여 잘 있거라』(1957년 작)다. 1960년대 중반 내가 중학교 우리나라에서 개봉 또는 재개봉 했을 때 보았다. 두 영화의 남녀 주인공은 세계영화사에서 대표할 미남‧미녀 배우였다.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로 사춘기 가슴에 깊이 새겨진 영화 정도로만 느꼈지 헤밍웨이가 실천 문학으로 깊은 발자욱을 남긴 것은 몰랐다.

그리고 70년대 초 고등학교 때 성격파 배우 스펜서 트레이시의 『노인과 바다』(1958년 작)를 보았다. 이 세 영화는 명절 때 TV에서 아주 단골로 방영이 되어 그 뒤 각각 영화를 명절 때 심심풀이로 몇 차례 더 보았다.

글쓰기 공부를 하면서 헤밍웨이의 불필요한 수식어가 없는 ‘하드 보일드’란 메마른 문체에 대해 관심을 조금 가졌을 뿐이다. 이번 쿠바 여행을 통해 헤밍웨이가 쿠바에 남긴 여러 흔적을 보았고, 괴팍했지만 현실 참여에 열정이 남달랐던 헤밍웨이를 다시 보게 되었다.

나는 헤밍웨이의 이런 낙관을 좋아하게 되었다.
“세상은 아름답고 싸워볼 가치가 있다.”

나는 이 어록을 간단히 변조해 보겠다.
“가치를 위해 싸운다면 세상은 아름다워지리라.”

송필경  spk5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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