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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쿠바 여행기 『왜 체 게바라인가?』10. 코히마르, 『노인과 바다』의 마을
송필경 | 승인 2019.01.21 16:59

2003년, 프랑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편집장인 이냐시오 라모네(Ignacio Ramonet)는 카스트로를 인터뷰하기 위해 카스트로 집무실을 찾았다. 책상 선반과 소파 옆 테이블에 호세 마르티와 시몬 볼리바르 그리고 링컨 흉상과 돈키호테 모습을 철사로 만든 조각품이 있었다.

벽에는 카밀로 시엔푸에고스의 유화 초상화와 액자 세 개가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헤밍웨이가 헌정한 사진이었다.

그 액자 사진에는 이렇게 써 있다고 했다. “피델 카스트로 박사에게, 코히마르의 바다에서 이것과 같은 놈을 하나 찍기를.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사랑으로.”

카스트로는 라모네와 대담에서 얼마간 과장은 있었는지 모르지만, 솔직하고 거침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냈다. 카스트로를 알기에는 가장 좋은 책이다.(제공 = 송필경)

1959년 혁명군이 정권을 잡았을 때 헤밍웨이는 쿠바에 있지 않았지만 뉴욕 타임스 기자 매튜스(Herbert Matthews)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 … 카스트로가 타협하지 않고 정치를 할 수 있다면 그보다 멋진 일이 없을 것이네.”

매튜스는 미국 기자로서는 처음으로 카스트로가 마에스트라 산맥에서 게릴라 활동할 때 인터뷰했다. 그 인터뷰 기사로 카스트로는 미국 여론에 주목을 받았지만, 정작 매튜스 기자는  매카시즘 광풍이 거센 조국에서는 빨갱이 취급을 받았다.

헤밍웨이는 오랜 친구인 매튜스 기자와 함께 쿠바 혁명에는 무언가 소중한 가치가 있고 그 가치를 보존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데 뜻을 같이 했다.

정세 격변이 있는 곳을 찾아 세계 구석구석을 누빈 헤밍웨이는 쿠바에서 일어나는 혁명의 과도한 소요는 점차 가라앉을 것이고, 쿠바의 새로운 혁명 체제가 지배계급에게 수세기 동안 무시당한 일반 노동자를 보살필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했다.

골수 반미주의자인 카스트로는 이런 헤밍웨이를 예외적인 미국인으로 보았다. 카스트로는 이 유명한 작가야말로 비록 양키(Yankee;미국인을 얕잡아 이르는 말)지만 이 섬에서(쿠바) 언제나 환영받을 거라고 옹호했다.

그럼에도 헤밍웨이는 쿠바에서 견디기 힘들었다. 헤밍웨이는 자신 친구에게 카스트로가 자신을 귀찮게 하지는 않았지만 혁명 세력이 미국을 비방하고 다른 미국인을 추방하자 마음이 몹시 불편했다고 말했다. 헤밍웨이는 어쩔 수 없이 1960년에 미국으로 돌아갔다.

카스트로와 가까운 친구인 마르케스(Gabriel Garcia Marquez; 1927-2014, 1982년 노벨문학상 수상)는 카스트로가 헤밍웨이의 작품을 잘 알 뿐만 아니라 ‘이해가 깊어서 헤밍웨이의 작품세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즐겼고 헤밍웨이를 매우 설득력 있게 옹호할 줄도 알았다’고 말했다.

아바나에는 1950년 5월부터 현재까지 '헤밍웨이 낚시 대회'가 있다. 해마다 5~6월이면 아바나 주변 해안에 전 세계 낚시꾼들이 모여든다. 20㎏ 가량 되는 낚시대로 청새치, 황새치, 참치 같은 몸집이 큰 심해어를 잡아야 한다. 잡은 물고기는 증거만 남기고 다시 놓아준다.

1960년 제 10회 대회 때 헤밍웨이는 혁명군 지도자 피델 카스트로를 초청했다. 그러자 피델은 체 게바라와 그의 부인과 함께 갔다. 사진 찍는 아르바이트 한 경험이 있는 체는 사진기를 들고 부인과 낚시 요트에서 무척 다정하게 즐겼다.

카스트로 전속 사진가 코르다(Korda)의 사진을 보면 웃통을 벗고 베레모를 쓴 게바라와 군복에 선글라스를 낀 카스트로가 낚싯대를 놓고 얘기를 나누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헤밍웨이 낚시 대회에 초청 받은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 부부(제공 = 송필경)

카스트로는 낚시 경험이 없었지만 우승을 했다. 카스트로 역시 헤밍웨이처럼 만능 스포츠맨이었다. 주최자 헤밍웨이가 우승자 카스트로에게 트로피를 전달할 때 두 사람이 처음으로 그리고 유일하게 얼굴을 마주했다. 미국을 대표하는 노벨상 수상 작가와 반미 쿠바 혁명군 사령관의 기묘한 만남이었다.

낚시대에 미리 잡은 물고기를 몰래 끼운 사전 조작이 전혀 없었다고 한다.(제공 = 송필경)

알라마르 농장과 핀카 비히아를 관람하니 어느 듯 점심시간이다. 식당이 있는 해변마을로 갔다. 버스에 내려 작은 거리 안으로 50m 가량 걸었다. 거리 한쪽에 있는 긴 건물은 거의 부서진 채 있고 맞은편엔 주택이 이어져 있다. 거리 입구에서 보니 식당이 있을 법한 건물이 얼른 눈에 띄지 않는다. 좀 더 안으로 들어가니 붉은 기와지붕 위에 작은 간판이 보였다. ‘BODEGA LAS BRISAS’, 굳이 단어를 그대로 번역한다면 ‘부드러운 바람이 이는 작은 주점’?
간판 집 안으로 들어가니 와인 바가 있는 레스토랑이다. 우리 일행 식탁의 붉은 식탁보 위에 접시 포크 숟가락이 이미 마련해 있었다. 식당 한 편 구석에 바가 있고 와인을 많이 진열해 놓았다.

주택가의 작은 레스토랑 ‘BODEGA LAS BRISAS’(제공 = 송필경)

벽에는 헤밍웨이가 와인 병을 따는 모습의 사진이 걸려 있고 아주 오래되고 낡은 주유기가 장식처럼 있다. 식사 후 한 노인이 우리에게 뭐라 이야기 하는데, 가이드가 이 노인이 어린 소년 시절에 주유소에서 일하며 헤밍웨이 차에 이 주유기로 기름을 넣어주었다고 한다. 가이드가 통역하는 할 때 노인은 생전 헤밍웨이를 만났다는 자부심에 가득한 웃음을 지으며 우리에게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해물 요리가 푸짐했고, 레스토랑 한 편에 있는 낡은 주유기(제공 = 송필경)

식사 후 식당에서 나와 약 200m 쯤 걸어가니 작은 해변이 나타났다. 이 해변의 어촌 마을 이름이 ‘코히마르Cojimar’다. (j도 g처럼 h로 발음한다.) 헤밍웨이의 낚시 배 ‘필라’호를 정박했던 곳이며, 바로 ‘노인과 바다’의 소설 주인공 노인 산티아고의 터전이었다. 이 마을에서 아바나 시내 중심부까지 거리는 약 10km 정도라 한다. 또한 헤밍웨이의 저택인 핀카 비히아도 금방 다녀올 수 있는 가까운 거리다.

헤밍웨이는 이 작은 항구에서 필라호를 타고 청새치를 비롯한 대형 물고기 낚시를 했다.

이 마을은 오메가(Ω)형의 조그만 만 주위에 자리 잡았다. 만 입구에는 조그만 성 이 보였다. 성을 향해 걸어가는 중에 푸른 색 원형 콘크리트 기반 중앙에 대리석 기단이 있고 그 위에 은은한 비취색의 흉상이 있다. 가까이서 보니 헤밍웨이 모습이다. 원형 기반 가장 자리에 그리스 신전 기둥 같은 것이 6개 서 있고 기둥 위에 둥근 천정이 얹혔는데 천정은 둥근 테두리만 있고 지붕은 없었다. 이 흉상과 조형물은 1962년 코히마르 마을 주민들이 만들었다고 한다.

헤밍웨이 기념 공간을 지나니 큰 야자수 한그루가 당당하게 보초 서 있는 듯 한 성이 있다. 성으로는 아주 자그마했다. 해적을 감시하고 피신하는 요새였다고 한다.

코히마르 마을 입구 헤밍웨이 흉상과 만 입구에 해적을 대비한 요새가 있다.(제공 = 송필경)

요새에 올라보니 가구 수가 얼마 안 되는 한적한 코히마르 마을 전체가 보였다. 요새 아래편에 작은 시멘트 구조물로 만든 선창다리가 있는데 배를 정박하고 쉽게 타고 내리려고 만든 것이다.

선창다리와 영화 『헤밍웨이 인 하바나』의 한 장면(제공 = 송필경)

1990년대 초 쿠바 최대 원조국이었던 소비에트가 해체하자 쿠바에 엄청난 경제난이 닥쳤다. 미국은 쿠바 붕괴를 원했다. 미국 라디오 방송은 쿠바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게 하려고 민중을 자극하고 쿠바 탈출을 부추겼다. 미국이 탈출 쿠바인들을 정치적 망명으로 받아들이겠다고 하자, 1994년에 수 천 명의 보트 피플이 바로 이 코히마르 항구에서 미국 플로리다로 향했다. 카스트로는 떠날 사람은 떠나라는 식으로 탈출을 방관했다.

헤밍웨이는 4대륙 20여 나라에 흔적을 남기며 초인적이라 할 정도로 아주 분주하게 살았다. 가는 곳마다 그 곳을 소재로 걸작을 남겼다. 그 중 쿠바 아바나는 헤밍웨이가 가장 오래 살은 곳이고 노벨상 수상작인 '노인과 바다'의 배경이라서 헤밍웨이가 다닌 세계 어느 곳에서보다 흔적을 많이 남겼고 잘 보존해 있다.

헤밍웨이는 투우의 나라 스페인 대신 카리브 해의 쿠바를 찾아 낚시를 즐겼던 1936년부터 노인과 바다를 구상했다고 한다. 16년이 지난 다음 1952년에 ‘라이프’지에 ‘노인과 바다’를 선보였다. 출간 이틀 만에 500만부가 팔렸다. 다음해인 1953년에 퓰리처상을 받았고 1954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노인과 바다』 초판본의 표지와 스펜서 트레이시(Spencer Tracy) 주연 영화 『노인과 바다』의 한 장면(제공 = 송필경)

당시 쿠바인들은 문학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쌓고 쿠바를 진정 사랑한 헤밍웨이를 쿠바인처럼 사랑하고 존경하고 기렸다. 그런 헤밍웨이는 미국인이 아닌 명예 쿠바인의 신분으로 노벨문학상 받으며 수상 소감을 말했다.

“우선 저는 매우 기쁩니다. 전 이 상을 받은 최초의 입양 쿠바인이라서 더 행복합니다.”

헤밍웨이는 스스로를 입양 쿠바인으로 불렀다. 그래서 헤밍웨이는 노벨상 메달을 쿠바 동쪽 끝자락에 있는 도시 산티아고 데 쿠바의 코브레 성당(Basilica de Nuestra Senora del cobre)에 기증했다.

코브레 성당은 산티아고 데 쿠바의 중심지에서 북서쪽으로 20㎞ 정도 떨어진 마에스트라 산맥(시에라 마에스트라) 아래 언덕 위에 있다.

1998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2015년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문해 자유와 평화 그리고 정의에 대한 미사를 집전한 곳으로 쿠바인 신앙의 중심지다.

소설 『노인과 바다』에서 코브레 성당을 두 번 언급한다. 소설 주인공 노인 산티아고가 사는 판자집을 묘사할 때 나온다.

“섬유질이 억센 구아노 잎을 여러 겹 반반하게 붙인 갈색 벽에는 예수 성심 채색화와 코브레 성당의 성모 마리아 채색화가 걸려 있다. 죽은 아내의 유품이다.”

또 한 번은, 엄청난 크기 물고기 청새치와 사투를 벌이면서 노인은 혼자 중얼거린다.

“지금부터 이 물고기를 잡게 해 달라고 주기도문과 성모송을 열 번씩이라도 외우겠어. 그리고 만약 물고기를 잡기만 한다면 ‘코브레’로 순례를 가겠다. 꼭!”

소설 속 노인이 독백하면서 바랐던 바를 작가 헤밍웨이가 노벨문학상 수상 기념메달을 코브레 성당에 기증함으로써 실현했다.

작가로서 최대 영예물을 쿠바에 바쳤다는 것은 그만큼 쿠바를 사랑한 증거가 아니겠는가. 헤밍웨이는 그 당시 건강 악화로 노벨상 수상식에 불참했고 수상 기념 인터뷰와 행사는 핀카 비히아에서 했다.

헤밍웨이는 쿠바 혁명이 일어나자 혁명 세력을 지지하면서 자신을 명예 쿠바인으로 불렀다. 그런 헤밍웨이마저 쿠바에서 미국인이 겪은 운명을 벗어나지 못했다. 미국인 재산 몰수 원칙에 따라 핀카 비히아 저택은 몰수당했다. 혁명 후 미국인에 대한 쿠바인의 눈총도 대단했다. 헤밍웨이는 미국과 쿠바의 관계 악화에 큰 상심을 하고 쿠바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추방은 아니었다.

미국으로 돌아간 이듬해 1961년 엽총 사고로 생을 마감했다. 자살로 추정할 수 있는 근거는 헤밍웨이의 평소 말이다. “내 육체가 나를 배반한다. 그래서 내 육체를 없애 버리는 것이다.”

헤밍웨이는 쿠바에 있을 때부터 우울증, 당뇨병 알코올 중독 같은 정신질환과 전신질환을 심하게 앓고 있었다. 그는 죽음이라는 운명에게 당하는 패배보다는 스스로 파괴하는 자살을 택하지 않았을까?

헤밍웨이는 ‘노인과 바다’에서 가혹한 현실에 결연히 맞서는 인간이 모습을 간결한 문체로 힘차게 묘사했다. 잔인한 현실을 성숙하고 균형 잡힌 통찰력으로 불굴의 인간성을 조명했으며 또한 인생 동전의 다른 면에 존재하는 인간의 나약함과 고독을 실존주의 기법으로 날카롭게 묘사했다.

간결한 서술은 헤밍웨이 문학의 가장 큰 특징이다. 복잡한 이야기가 늘 그렇듯 요지는 간단한 것이다. 헤밍웨이는 문학적 수사 능력을 자랑하기 위해 장황하거나 에둘러 말하지 않았다.

노인이 청새치를 잡는 삽화와 영화 『헤밍웨이 인 하바나』에서 코히마르 선창의 모습(제공 = 송필경)

헤밍웨이는 자신의 짧고도 강렬한 문체를 빙산에 비유했는데 이를 빙산이론 (Iceburg Theory)이라고 한다. 헤밍웨이는 자신의 소설 ‘오후의 죽음’에서 이렇게 썼다.

“산문 작가가 자기가 무슨 글을 쓰고 있는지에 대하여 충분히 알고 있다면, 자신이 알고 있는 바를 생략할 수 있으며, 작가가 충실히 글을 쓴다면 독자들은 마치 작가가 진술한 바와 마찬가지로 강렬하게 느낄 것이다. 이동하는 빙산의 위엄은 오직 팔분의 일에 해당하는 부분만이 물 위에 떠 있다는 데 있다.”

헤밍웨이는 이야기의 깊은 의미가 표면에 나타나서는 안 되며 암묵적으로 빛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빙산처럼 대부분의 이야기와 특별히 감성은 드러난 빙산이 아니라 물속에 잠긴 빙산에 있다는 것이다.

이 빙산 이론에 따르면 말하는 입말(=구어체)처럼 글 쓰는 것이다. 젊을 때 기자 생활을 한 헤밍웨이는 신문 기사를 쓰면서 상황이나 해석이 거의 없는 사건 자체에만 집중했다. 헤밍웨이의 소설가로서 글쓰기 역시 장황하게 주제를 논하지 않고 서술을 최소한으로 했다. 이야기의 깊은 의미 있는 사건의 진실은 빙산처럼 표면에 나타나서는 안 되며 암묵적으로 가라 앉아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략한 부분이 이야기를 더욱 강화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가장 적은 묘사를 최대한 활용한다. 언어를 정리하고 쓸데없는 동작 묘사를 피해서 문장 강도를 배가시키면서 진실만을 말하는 법을 배웠다. 이렇게 글을 쓰면 진실보다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말할 수 있다.
내가 사실로 밝힌 몇 가지 사실과 독자가 알고 있는 중요한 일이나 사건을 생략하면 그 이야기는 강렬하게 된다. 독자가 모르고 있는 것을 생략한다면, 그 이야기는 가치가 없을 것이다. 어떤 이야기의 평가는 편집자가 아닌 독자가 생략이 얼마나 좋은지를 아는 것이다."

20세기 헤밍웨이는 새로운 스타일의 작품을 개척했다. 19세기 작가들이 까다로운 산문체로 쓴 긴 서경문(敍景文; long descriptive passages 자연 경치를 위주로 하여 묘사한 글)과 달리 헤밍웨이는 주어, 동사 그리고 최소한의 형용사만으로 분명하고도 쉬운 글을 썼다.
헤밍웨이는 소설의 주인공이 무엇을 생각하고 느끼는지를 독자에게 말하기보다 대화와 행동을 묘사하는 데 초점을 두었다.

헤밍웨이는 독자 스스로 선과 악을 구분하고, 독자들이 실제 삶에서 하는 것과 똑 같이 진실을 독자가 밝힐 수 있기를 바랐다.

빙산 이론을 생략이론(theory of omission)이라고도 한다. 때때로 우리는 말하기보다 말하지 않고 두는 것이 더 효과 있다. 헤밍웨이의 특성인 침묵에서 오히려 내면의 모순을 알아들을 수 있다. 행동에 초점을 맞춘 묘사로 독자는 빠르고 생략한 경제적인 말을 들을 수 있다.

나는 문학 이론을 모르지만, 다음은 경제적인 글쓰기의 좋은 예가 아닐까?
우리 시대 글쟁이 한양대 정민 교수가 스승 이종은 교수에게 혼난 이야기다.

“空山木落 雨繡繡(공산목락 우수수)”를 “텅 빈 산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비는 부슬부슬 내리는데.”로 번역했다.
스승은 정 교수에게 대뜸 “사내자식이 왜 이렇게 말이 많아?”라고 핀잔을 들었다.
‘空(빌 공)’자를 가리키며 “여기 ‘텅’이 어디 있어?‘ 그래서 ’텅‘을 지웠다.
다음 “잎이 나무라는 걸 모르는 사람도 있나?” 그래서 ‘나무’를 뺐다.
‘떨어지고’에서 ‘떨어’와 ‘부슬부슬 내리고’에서 ‘내리고’를 덜어냈다.
문장은 이렇게 남았다. “빈 산 잎 지고 비는 부슬부슬.”
문장은 전달력이 중요한데, 문장을 줄이면 전달력은 늘어났다는 예다.

나는 헤밍웨이의 글쓰기를 보면서 18세기 조선에서 최고 문장가라 평가 받는 연암 박지원의 글쓰기가 떠올랐다.

글쓰기를 출세를 위한 과거 시험의 도구로 사용하거나, 마음을 고상하게 하거나 위로하는 도구가 아닌, 사회 비판을 위한 활동으로 생각한 연암 박지원의 글쓰기 말이다.

연암은 유교 이념만을 강조하는 고상하고 엄숙한 틀에 박힌 글보다, 인간의 살아 있는 감정에 호소하는 짧은 산문으로 변화무쌍한 삶을 표현했다.

다시 말해 글의 유일한 생산자이면서 유일한 소비자인 사대부의 고리타분한 글쓰기 틀을 연암은 자유분방한 글쓰기로 깨트렸다.

당시 임금이던 정조는 이런 연암의 신선한 글들을 허접한 잡문으로 봤다. 이를 ‘문체반정(文體反正)’이라 규정하고 이런 글쓰기를 금지했다. 요즈음으로 치면 표현의 자유를 ‘국가보안법’식으로 다룬 셈이다.

영남대 한문학과 김혈조 교수가 번역한 연암의 산문집 『그렇다면 도로 눈을 감고 가시오』, 연암의 짧은 다양한 산문이 주옥같다.(제공 = 송필경)

18세기 연암의 글쓰기를 내 나름으로 대충 정리해 보면 이렇다. 21세기 어떤 글쓰기 이론보다 진보적이고 웅혼하다고 나는 감히 생각한다.

“쓰는 이가 뜻을 읽는 이에게 정확히 전달하면 좋은 글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집과 독선에서 벗어나 객관적인 근거를 제시하는 정밀한 글을 써야 한다.
글자 한 자 한 자가 제자리에서 역할을 할 때 그 글은 읽는 이를 설득할 수 있다. 말이 간단하더라도 요령만 잡으면 되고, 토막말이라도 핵심을 놓치지 않으면 험한 요새(城)라도 정복할 수 있다.
글쓰기에서 가장 중요한 자세는 바로 글의 힘을 믿는 것이다. 글을 써야만 하는 이유를 잊지 않고 모든 기쁨과 분노와 슬픔을 글에 쏟아 부어야 한다. 그런 자세로 쓰지 않으면 글은 순식간에 길을 잃고 헛것이 된다.
생략과 함축은 겉보기에는 별로 인 것 같지만 속으로는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다. 읽은 이가 생략과 함축의 의미를 자세히 살피면 그 실상이 떠올라 ‘바로 이것!’하며 무릎을 친다.
속물적인 이익이나 명예가 아닌 순수한 마음으로 글을 쓴다면, 거짓이 아닌 진심으로 글을 쓴다면, 세상의 어떤 힘보다 글의 힘이 강하다.

붓 끝을 도끼 삼아 거짓을 찍어버릴 글을 써라!”

 

송필경  spk5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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