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치의학 120년] 문화정치기, 경성치과의학교 설립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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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치의학 120년] 문화정치기, 경성치과의학교 설립되다.
  • 이주연
  • 승인 2006.08.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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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정치의 시작’은 헌병경찰에 의한 무력 통제에서 교육과 문화적 동화를 통한 간접적 통제로 옮겨가는 것을 의미한다. 문화정치는 피지배자의 자발성을 제한적으로나마 반영한다는 점에서 근대적이다.

3.1운동 이후 한국인들은 교육・언론・문화・위생・의료의 각 부분에서 신문화운동을 벌려나갔다. 고등교육에 대한 열의도 높아져 고등학교수가 3배로 늘어났고, 민립대학교를 설립하려는 움직임도 활발하였다. 이 시기 세브란스 의학교장 애비슨은 총독부에 치의학전문학교 설립인가 신청(1921)을 하였다. 그러나, 총독부는 이를 거절하는 대신 일본인 나기라 다쓰미에게 ‘사립경성치과의학교의 설립안’을 올리도록 하여, 이를 허가(1922)하였다.

이렇게 경성치과의학교가 순조롭게 출발하게 된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당시의 사립이 대부분 민족지도자들이나 기독교계 선교사들에 의해 추진되었는데, 경성치의학교는 일본인에 의해 신청되었기 때문이다.

둘째, 경성치과의학교는 고등교육기관이 아니라 일제가 장려하는 실업교육기관이었다는 점이다. 나기라는 경성치과의학교가 ‘조선인 자제에게 실업교육을 시행하여 생활의 안정과 구강위생 향상’을 도모하기 위해 창설되었음을 강조하였다.

학교 총칙의 교육목적 역시 ‘치과의학에 관한 높은 학술과 기예를 가르쳐 나라에서 필요로 하는 황국신민을 만드는’것이었다. 즉 사립 경성치과의학교의 교육 의도는 일제의 선별적 동화정책에 부합하였다.

경성치과의학교의 초기 학생모집에는 당시로서는 많은 숫자인 ‘백수십명’이 응시하였다. 이것은 정규 치의학 교육기관 설립이 한국에서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일이었음을 말해준다.

경성치과의학교 개교식(1922.4.15)은 총독부병원 강당에서 60명의 신입생과 내 외빈 300명이 참석하여 거행되었다. 설립 당시 경성치과의학교는 야간수업, 남녀공학 2년제였고, 주 20-22시간의 강의가 있었다. 학생은 일본인과 한국인이 섞여 있었고, 입학정원은 50명이었다. 교수진은 모두 외래로 총독부병원의 의관과 경성의학전문학교의 교수들이었고, 건물도 이들에게 빌려 쓰고 있었다. 재정, 교과과정, 교육시설, 교수진 등이 모두 부족한 상태에서 출발했지만 경성치의학교 창설은 다음과 같은 의미가 있다.

첫째, 비록 일본인 치과의사수가 압도적으로 많았으나 한국 최초로 정규교육을 받은 한국인 치과의사를 집단적으로 양성하였다는 점이다. 1921년 한국인: 일본인 치과의사수는 6:90에서, 1930년에는 111 :302으로 변하하였다.

둘째, 문화정치기 십 년간 운영진의 노력과 총독부의 후원으로 교과과정 ・ 교수진 ・ 시설등을 보강하여, 전문학교 지정(1929)이라는 발전을 이루었다는 점이다.

셋째, 총독부지정학교로 선정(1925)되면서 비록 개업자격인 조선내로 한정되기는 했지만 1회 졸업생부터 졸업시험으로 의사시험을 대신하는 특전(1925.2.28)을 얻게 되었다.

이와 같이 문화정치기에 설립된 경성치의학교는 비록 2년제 야간 사립 실업교육기관에서 출발하였으나, 총독부의 후원과 자체 노력으로 경성치과전문의학교로 성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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