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광장] 누드 권하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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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광장] 누드 권하는 사회
  • 편집국
  • 승인 2003.10.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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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ull Monty

성현아, 권민중, 김완선, 이혜영 등등 여러 연예인들이 누드사진을 찍어서 상업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세간의 관심은 덜하지만 최근 연예인으로 나선 김동성도 누드촬영을 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아무개 벗는다’ ‘아무개 벗었다’ ‘아무개는 과연 벗을 것인갗라는 황당한 스포츠신문 기사가 끊이지 않는다.

“수억원을 받고 극비리에 (다 보도되지만 아무튼 극비리라고들 한다) 누드사진 촬영 쭭 대박 예상”이라는 연예뉴스를 타고 “모바일이나 인터넷을 통해  누드사진이 해킹되었다”는 뉴스가 나온다. 그리곤 이후 “제작사가 인터넷에 유포시킨 네티즌을 고발했다”는 기사가 나오는 등 일정한 패턴을 가진 누드 소동이 몇차례 우리 사회에서 벌어졌다.

‘누드열풍’, 벗는 만큼 성공할까?

이런 소동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당연히 ‘돈’이 걸려 있다는 점이다. 국내 연예인들이 누드를 선보이는 이유도 표면적으로는 예술성을 내세우며 자신의 몸매를 남기고 싶다지만 한번의 시선집중을 통한 ‘인기상승과 큰돈’을 벌어보자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최근에는 오프라인상의 화보집 외에도 인터넷과 모바일을 통한 유료서비스로 인해 잘만 하면 커다란 수익을 남길 수 있다.

지난해 말 세미 누드를 선보인 성현아는 누드 사진의 해킹으로 인해 경제적인 손실이 컸다고 하지만, 그녀의 이름과 누드 화보를 공개한 인터넷 사이트는 한때 검색 및 방문 순위 1위를 기록한 적이 있다. 이혜영은 개런티 10억에 올 누드를 찍었다.

그리고 서비스를 시작한 지 10일 만에 20억원을 벌어들였고 연말까지 최소 70억의 매출이 기대된다고 한다(스포츠투데이, 9.18.). 다른 연예인의 경우도 비슷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수십억원의 제작비를 들여 제작한 화보집이나 누드콘텐츠가 실제로 판매와 유료서비스 이용을 통한 ‘커다란 수입’으로 이어진다는 보장은 없다.

누드 화보집은 다른 문화상품과는 달리 이를 구매해 소장하는 데 가치면에서 차이가 있다. 모델의 인기가 내려가면 그 상품 가치도 동반하락할 가능성이 있다. 많은 사람들에게 한 번 정도 보고 싶은 호기심을 자극하지만 비싼 돈을 주고 사보기가 부담스럽기도 하다.

자유의지도, 선의 아름다움도 사라지고

실제로 많은 음란사이트의 난립과 부실화가 이를 반증하고 있으며 일반대중의 ‘공짜즐기기’의 벽을 넘기가 그리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지금 가장 현실적인 수익모델로 이용되고 있는 모바일서비스도 과당경쟁과 이미지 손상을 우려한 통신사들의 태도 변화로 어려움이 예상된다. 그리고 인터넷서비스는 해킹의 위험 때문에 수익모델이 되기 어렵다.

또 누드집을 낸 연예인은 광고와 웬만한 TV 프로 출연은 포기해야 하기 때문에 거액의 개런티에도 개인적으로는 도박이 될 수밖에 없다.

결국 수익성 있는 누드의 대중화를 위해서는 화보나 인터넷 서비스 요금을 인하할 수밖에 없고 누드에 나서는 연예인들의 모델료가 내려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렇게 되는 경우 신인이 아니라면 이들 연예인들의 인기는 상승하기는커녕 누드 이후 연예시장에서 몸값이 하락할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다.

문제는 이러한 누드소동이 ‘기계 문명에 예속된 현대사회에 대한 극단적 반항의 표출이자 원초적 생활로 돌아가려는 자연인이 희구하는 자유 의지의 실현이나 몸이 만드는 선의 조형적인 미의 추구’라는 누드의 의미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오직 들끓는 한탕주의와 황폐한 선정성만 횡행할 뿐이다.

라일스톤의 여인들

몇 해 전 실직한 철강노동자들이 남성스트리퍼가 되는 과정을 주제로 한 <풀 몬티> (Full Monty)라는 영화가 있었다. 또 평범한 중년여성들이 백혈병 기금마련을 위해 자신들의 누드사진을 실은 달력을 펴내 큰 호응을 일으켰다는 유럽에서의 뉴스도 있다.

엔젤라 베이커와 월터스라는 실제의 중년 여성들의 이야기다. 엔젤라 베이커의 남편은 백혈병으로 죽었다.

그녀는 백혈병 연구를 위해 캘린더의 표지 누드사진을 촬영했으며 65만파운드(우리 돈으로 약 11억원)의 기금을 마련했다. 이것들도 상업화라는 측면을 담고 있지만 간접적인 방법으로 누드의 예술적 승화를 시도한 측면도 엿보인다.

누드는 그 행위가 예술적 정신을 수반할 때 비로소 값어치를 인정 받는다. 누드가 아름다운 이유는 인간의 몸이 영혼을 담은 그릇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한 몸이 만드는 선의 굴곡이 조형적인 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김흥수 화백은 이를 두고 “구상 화면에서는 표피적 아름다움을 묘사하고 추상 화면에서는 상상과 무의식의 세계를 그려 욕망과 갈등을 형상화 한다”고 누드 작업론을 폈다.

하지만 예술적 관능미의 탈을 쓴 지금과 같은 누드 행진은 갈수록 연예인 전체의 품위를 떨어뜨리고 결국은 대중의 흥미가 사라지면서 그 내면에 숨겨진 상업성마저 퇴색되어 힘을 잃게 될 것이다.

그 근원을 따지자면 누드에 대한 이런 오염된 시야는 성매매에서 비롯된 여체의 상품화라는 잘못된 개념에서 비롯된다. 이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항명이자 모독인 것이며 순수한 예술성과 자연의 섭리를 무너뜨리는 휴머니즘의 파괴에 다름 아니다.

결국 누드의 상업적 이용 자체가 무조건적인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것은 피해야 한다. 하지만 누드가 인간의 내면에 깔린 정서를 표출할 때 비로소 예술에 다가서는 새로운 틈새 시장을 개척하게 될 것이라는 지적을 되새겨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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