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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쿠바 여행기 『왜 체 게바라인가?』13 혁명을 향한 첫발, 몬카다 병영 습격 사건
송필경 | 승인 2019.03.04 11:07

이번 쿠바 여행에서 가장 아쉬웠던 부분은 산티아고 데 쿠바에 있는 ‘몬카다 병영(Cuartel de Moncada)’을 그냥 지나친 점이다. 귀국해서 여행을 복기하다 보니 몬카다 병영은 세스페데스 공원에서 안토니오 마세오 혁명 광장으로 가는 길에 있었다. 한 20분만 시간을 내었어도 총알 자국 구멍이 남아 있는 병영의 겉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말이다.

전투 흔적인 총알 자국이 선명하다. 지금은 학교로 변했으며, 일부는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구글 이미지에서 가져옴 (제공=송필경)

내가 보지 못했더라도 몬카다 병영 습격 사건을 여러 자료를 발췌해 요약해서 설명하겠다. 이 사건의 진면목을 알아야만 미국 제국주의가 전 세계에 강요한 질서를 미국의 코앞에서 분쇄하여 성공한 혁명의 핵심이 과연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1953년!
이 해는 쿠바 현대사 흐름에서 아주 중요한 분수령을 이루었다. 27살 젊은 피가 뜨거운 변호사 피델 카스트로는 그 나이에 누구도 꿈꾸기 힘든 꿈을 꾸었고, 그 꿈을 향한 첫 걸음을 내딛었다.

1953년은 젊은 청년 피델의 평생 영원한 스승으로 모셨던 호세 마르티 탄생 100주년이었다. 이 의미 있는 해를 맞아 미국의 천박한 자본과 마피아 갱단의 손아귀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쿠바를 구하기 위해 7월 26일 무장 항쟁을 일으켜 정권 전복을 꾀했다.

1952년 친미 괴뢰 독재자 바티스타(Fulgencio Batista y Zaldívar: 1901~1973)는 선거를 없애고 쿠데타로 집권했다. 선거를 통해 정치에 입문하려던 카스트로는 투표용지 대신에 총 들고 혁명으로 나는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카스트로는 아바나 및 인근 지역에서 남성 116명과 여성 2명을 선발해 훈련한 후 그가 신뢰했던 동지 아벨 산타마리아(Abel Santamaría Cuadrado;1927∼1953)와 함께 비밀리에 몬카다 병영 공격 계획을 수립했다. 처음에는 동생 라울 카스트로에게도 비밀을 유지할 정도였다.

이곳은 과거에 스페인 감옥이었지만, 공격할 당시에는 군사 규모에서는 쿠바 제2의 군 요새였다. 카스트로는 권력을 손에 넣기 위해 지혜로운 전략을 세웠다. 카스트로와 산타마리아는 병영을 습격하여 충분한 무기를 확보하여 인근 마에스트라 산맥으로 탈출해서, 당시 마피아 집단의 비호를 받던 바티스타 정부를 무력으로 무너뜨리는 대규모 민중봉기를 계획했다.

카스트로는 몬카다 병영이 큰 규모임에도 아바나에서 상당히 거리가 멀어 방어력이 약하다고 보았다. 공격 날짜를 산티아고의 카니발 축제 다음날인 7월 26일로 택했다. 그 날은 경찰과 군인도 떠들썩한 축제를 치르느라 지치고 숙취에 시달리는 날이기 때문이다.

아침에 공격을 시작하자 상황이 갑자기 꼬였다. 계획을 처음부터 비밀로 한 것이 오히려 화근이었다. 대원 대부분은 자신이 무장 군인들을 향해 실제 사격을 해야 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않고 습격에 참여했다. 긴장했던 나머지 실제 상황에서 제대로 총을 쏘지 못했다. 게다가 유일한 토박이였던 18세 수리공을 제외한 모든 이가 아바나 출신이었던 까닭에 산티아고의 복잡한 지리에 익숙한 사람이 거의 없었고, 새벽 5시에 시골 농장에서 출발했던 호송대 차량 두 대가 길을 잃어버렸다.

공격은 세 그룹으로 분산해 진행했다. 라울 카스트로의 소규모 부대는 가까운 법원을, 아벨 산타마리아가 이끄는 부대는 군병원을, 마지막으로 가장 규모가 컸던 카스트로의 부대는 몬카다 병영으로 진입을 시도했다. 격렬한 총격전은 시작한 지 30여 분이 안 돼 끝났고, 결과는 완전한 실패였다.

라울과 아벨의 부대는 초반에는 성공을 거두었지만, 카스트로의 호송대는 훔친 군복을 입고 위장하는 데 실패하여 외부 보초병에게 발각되었다. 이러하자 경보가 울리기 전에 병영 진입에 성공한 차량은 단 한 대뿐이었다.

곧바로 혼돈에 빠졌다. 교전 중 저항군 5명이 사망했고, 카스트로는 목표달성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즉시 후퇴했다. 라울 부대도 겨우 빠져 나왔다. 그러나 군병원을 공격했던 아벨 산타마리아의 부대는 모두 잡혔고 아벨은 바로 이 날 두 눈알이 파이는 고문을 받는 도중에 사망했다. 부대원 56명이 전투 중에 포로로 잡혀 즉결 처형당했다.

전투 중에 숨진 대원들과 카스트로를 비롯한 체로된 대원들. 구글 이미지에서 가져옴. (제공=송필경)

6년 뒤 쿠바 혁명이 성공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몬카다 병영 공격 실패는 치욕스런 단순한 사건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을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카스트로는 돈키호테와 같은 유치한 몽상가가 되었으리라. 그러나 1959년에 성공한 혁명의 측면에서 보았을 때 몬카다 병영 공격 시도는 혁명으로 가기 위한 영광스런 첫 시도로 평가하고 있다.

이 영광스런 시도 후에는 엄청난 기적이라고 밖에 볼 수밖에 없는 일이 연이어 일어났다. 카스트로는 살아남은 대원 19명과 산으로 도망갔다가 6일 만에 결국 체포됐다. 카스트로 일행을 체포한 병사들은 이마에 핏줄이 불거질 정도로 격분해 있었다. 카스트로는 흉악하고 살인을 일삼던 병사를 향해 기죽지 않고 모욕적인 소리를 퍼부었다. “우리는 해방군이다. 너희들은 독재자의 하수인이며 살인자들이다.” 그 말에 더 흥분한 병사들은 카스트로 일행을 바로 죽이려고 총을 겨눴다.

“쏘지마!”
지휘자인 키 큰 흑인 대위가 질서를 잡으려고 애쓰면서 명령했다. 그리고는 중얼거렸다.
“쏘지 마, 쏘지 마. 사상(Idea)은 사살되지 않는다. 사상은 그 누구도 죽일 수 없어.”
카스트로는 이 대위가 중얼거리는 낮은 소리를 또렷이 들었다.

나는 카스트로의 많은 자료를 읽으면서 이 흑인 대위 페드로 사리아(Pedro Sarría Tartabull;1900∼1972)의 이 말보다 더한 감동은 없었다. “사상은 그 누구도 죽일 수 없어!”

혁명 성공 후 카스트로와 사리아 대위. 사리아는 1964년 심한 녹내장으로 시력을 잃고 앓다가 사망했다. 사리아의 동상. 구글 이미지에서 가져옴.(제공=송필경)

카스트로가 체포된 뒤 재판을 받을 때 1953년 9월 26일자로 법정에 보낸 스스로 쓴 변론 요지의 마지막은 이렇다.

『우르겐스 법정 귀하
…나는 만약 내 삶을 위해 내 권리나 명예의 극히 일부분을 포기해야 한다면 천 번이라도  그렇게 하고자 할 것입니다. 즉, “동굴의 심연에서 우러나오는 올바른 사상은 큰 군대 이상의 힘을 지닌다.”라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 나는 볼테르와 루소를 연상했다. 볼테르가 루소를 옹호하면서 포효한 사상의 자유는 만고불변의 진리이기 때문에 시리아 대위의 중얼거림이 얼마나 위대한 지를 비교할 수 있어 다음 글에서 인용을 하겠다.

『18세기 프랑스 지성의 상징이며 프랑스 대혁명의 불을 지핀 사람은 볼테르(1694-1778)와 루소(1712-1778)였다.

루이 16세가 감옥에서 볼테르와 루소의 저작을 보고 “이 두 사람이 프랑스를 파괴하였다”고 말했다. (루이 16세는 어처구니없게도 프랑스란 국가를 자신의 왕조 부르몽 가家로 생각했다.)
볼테르와 루소는 봉건 귀족 정치에서 중산 계급 지배로 넘어가는 역사 전환 과정에서 두 외침이었다. 그러나 서로 주장은 너무 달랐다.

부유한 보수주의자이며 상류 사회의 햇볕을 즐긴 볼테르는 언제나 이성을 신뢰했다. 아주 가난하게 자란 루소는 이성을 신뢰 않고 늘 행동을 원했다. “법률을 폐지하라. 그러면 인간은 평등과 정의의 성스러운 시대에 들어서리라”와 같은 급진적인 주장을 과격하게 폈다.

1755년 11월, 리스본에서 대지진이 일어나 3만 명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볼테르는 숙연 했으나, 프랑스 성직자들이 재난은 리스본 주민들의 죄의 대가라고 말한 것에 격분했다.
“신은 재난을 방지할 수 있었으면서도 방지하려고 하지 않았는가. 아니면 재난을 방지하고 싶었지만 그럴 능력이 없었는가.”라고 되물었다.

이 신학적 딜레마에 대해 루소는 전혀 엉뚱한 견해를 나타냈다.

“이 재난에 대해서는 인간 자신이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 인간이 도시에 살지 않고 시골에 살았더라면 이와 같이 대규모로 죽지는 않았을 것이며, 인간이 옥내에서 살지 않고 옥외에서 살았다면 집이 인간의 머리 위로 무너져 내리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루소의 주장에 시민들이 찬사를 하자, 화가 난 볼테르는 ‘인간이 이제까지 휘둘러 온 모든 지적 무기 중에서 가장 무서운 무기인 볼테르의 조소’로써 돈키호테 같은 루소에게 응수했다.

볼테르는 사흘 만에 세계 문학 중 가장 훌륭한 단편으로 평가받는 「깡디드」를 완성했다. 이 단편에 대해 프랑스의 문호 아나톨 프랑스는 “볼테르의 손끝에서 펜이 달리며 웃는다.“라고 평했다.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은 문명‧문학‧학문에 반대하고 미개인이나 동물과 같은 자연 상태로 돌아가라고 논한 것인데, 이 책을 받은 볼테르는 “인류의 발전에 역행하는 귀하의 새 책을 받게 되어 감사합니다. 일찍이 인간을 짐승으로 만들기 위해 귀하만큼 지혜로운 노력을 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귀하의 책을 읽노라면 네발로 기어 다니고 싶은 충동을 느낍니다. 그러나 나는 60년 전에 이미 그 버릇을 버렸으므로, 불행하게도 그것을 회복하는 것은 불가능 합니다”라고 답했다.

루소가 「사회계약론」에서 계속 미개 상태를 주장하는 것에 대해 볼테르는 유감으로 생각했다. “보시는 것처럼, 원숭이가 인간과 비슷하다는 의미에서, 루소는 철학자와 비슷하오!”라고 비꼬았다.

볼테르는 현재의 상태가 잘못된 것은 인정하나 루소 같은 문명 비판을 어린애 생각으로 보았다. 볼테르는 인간은 미개 상태보다 문명 상태에서 더 잘 살 수 있다고 확신했다. 볼테르는 루소에게 “인간은 원래 맹수로서, 문명사회는 이 맹수를 쇠사슬로 묶어 놓고 그 야수성을 길들이는 것이며, 사회 질서로만 정신과 기쁨을 발전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볼테르는 지성이 인간의 교육과 변화를 통해 점차적으로 평화롭게 이 순환을 단절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루소는 낡은 제도를 파기하고 마음의 명령에 따라서 자유 평등 우애를 근본으로 하는 새로운 제도를 수립할, 본능적이고 격정적인 행동에 의해서만 이 순환을 단절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볼테르는 루소를 열정과 공상에 가득 차 있고, 고귀하지만 현실성이 빈약한 몽상가이며, 오늘의 우리 잣대로 보면 국가보안법을 무시하는 극좌과격주의자로 보았다. 스위스 당국이 과격한 주장을 편 루소의 여러 저서를 금서로 지정하고 불을 태우자, 볼테르는 그 유명한 사자후를 외치며 스위스 당국을 공격하며 루소를 옹호했다.

“나는 당신이 말하는 사상(Idea)에는 하나도 동의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런 사상을 말하는 당신의 권리는 죽을 때까지 옹호할 것이다”』

-「철학 이야기, 월 듀란트/박상수 옮김 육문사 1989 의 볼테르 편에서 발췌 정리

볼테르와 루소, 이 두 지성의 격조는 결과적으로 프랑스 혁명에 불을 질렀고 근대화의 길잡이 역할을 했다.

1889년 프랑스 대혁명의 불을 지핀 두 지성, 볼테르와 루소 (제공=송필경)

‘사상은 죽일 수 없다.’와 ‘사상을 말할 수 있는 권리는 죽을 때까지 옹호하겠다.’는 너무나  아름다운 같은 진리다.

대사상가 볼테르와 일개 군인 사리아의 ‘사상의 자유’와 같은 이런 진리를 시공을 초월한 공통 원리로 파악하는 묘미가 역사 공부에 있다는 것이 참으로 감격스럽다. 그러면서 사상의 자유를 억압하는 국가보안법이 아직 펄펄 살아있는 우리 사회를 살펴보면 그저 부끄럽다.

카스트로에게 기적은 연이어 나타났다.

포로로 잡혀 끌려가는 중 카스트로는 사리아 대위에게 말했다. “대위, 한 가지 말해줄 게 있소. 내가 바로 카스트로요.”

대위는 침묵하라고 충고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시오,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시오.”

사리아 대위는 자기가 잡은 포로가 누구인지를 이미 알고 있었다. 몬카다 병영 습격 사건의 주범이 카스트로란 사실을 언론에서 크게 다뤘기 때문이다. 카스트로를 잡았다면 즉결 처형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대위는 자기가 타고 온 트럭으로 포로들을 데리고 갔다. 대위는 다른 포로는 트럭 뒷부분에 앉히고 카스트로를 앞좌석 운전기사와 자신 사이에 앉혔다. 그 때 몬카다 병영 사령관의 차가 트럭에 다가왔다. 이 사령관은 포로들을 함부로 죽이는 악명 높은 살인마 페레스 차우몬(Perez Chaumon)이었다.

사령관은 포로를 자기에게 인계하라고 요구했다. 고작 대위인 사리아는 사령관 차우몬에게 “이 포로는 제 소관입니다.”고 거부했다. 대위는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지고 데리고 가겠다고 했다. 대위의 소신이 사령관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했다. 두 번째 기적이었다.

사령관은 몬카다 부대로 카스트로를 넘기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사리아 대위는 몬카다 병영 주위를 빙빙 돌다가 카스트로를 군인이 아닌 경찰에게 넘겼다. 모든 주민이 카스트로를 볼 수 있도록 법원 관할인 산티아고의 비바크(Vivac; 도심에 있는 감옥)로 갔다. 세 번 째 기적이었다.

만약에, 만약에 사령관에게 카스트로를 인계하여 몬카다 병영으로 가게 했다면? 몬카다 병영의 군인들은 청부업자, 즉 피에 굶주린 맹수들이었다. 게다가 사령관 차우몬은 그 당시 쿠바에서 가장 잔인한 살인자로 소문난 군인이었다.

카스트로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만일 나를 몬카다 병영으로 끌고 갔다면, 아마도 잘게 토막이 났을 겁니다. 아니, 내 몸은 한 조각도 남아 있지 못했을 거예요. 내가 거기에 갔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보십시오!”
얼마간 자유로운 비바크에 카스트로가 수감되어 있다고 하자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비바크에서 카스트로는 당당했다. 몬카다 병영 공격의 모든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고 말했다. 카스트로가 언론에 알려지자 군인들은 카스트로를 쉽게 죽일 수 없었다. 체포한 반란군을 잔혹하게 처형한 것에 대중은 분노했기 때문에 군인들은 카스트로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카스트로가 사리아 대위에게 붙잡힌 것, 역사의 우연인가 필연인가?

사리아 대위는 정찰대 책임자였기 때문에 정말 마지못해 카스트로 일당을 잡으러 다녔다. 카스트로는 말했다. “사리아 대위를 다른 군인들이 얼마나 증오했을지… 1959년 전쟁이 끝나자 우리는 그를 승진시켰고, 공화국 대통령의 부관으로 임명했습니다. 불행히도 오래 살지 못했습니다. 아주 못된 병에 걸려 눈이 먼 채로 죽었습니다. 정말 착하고 훌륭한 사람이었죠. 이런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은 대부분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세스페데스, 안토니오 마세오, 호세 마르티 같은 19세기 영웅을 선배로 둔 20세기 쿠바 민중은 미국과 친미 괴뢰 집단을 극도로 혐오했다. 그런 민중은 불꽃만 튀면 폭발하려고 했다.

그러한 증오가 누적해 있을 때 몬카다 병영 습격 이후 보인 젊은 카스트로 일행의 행동은, 용감한 인물을 선호하는 쿠바인 특유의 정서에 비춰볼 때 민중이 전폭적으로 지지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우리가 ‘5.18’을 숭고한 저항 운동의 상징으로 삼듯이, 쿠바는 몬카다 병영 습격 사건을 ‘7-26 운동(M-26-7)’으로 길이 기억하고 있다.

7월 26일 운동은 쿠바혁명의 원천이었다. 쿠바 역사가 영원히 기억할 영광스러운 날이다. (제공=송필경)

송필경  spk5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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