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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와 함께 평화의 길 걸어요”[현장기록] 평연 20기, 하미마을 학살사건 생존자 응우옌 티 탄과 좌담회
문혁 기자 | 승인 2019.04.01 16:58

평연 20기 진료단은 이번에도 베트남 전쟁 한국군 민간인 학살 사건과 마주했다. 

지난 17일 오전에는 뇨(Nho) 할아버지 방공호 학살 사건 피해자 유가족 응우옌 떤 꾸이와 함께 주이쑤옌현 통합위령비와 학살 피해자를 모신 사당을 찾아 향을 피우고 사죄했다.

오후에는 퐁니마을 위령비를 찾아 참배한 후, 퐁니‧퐁넛 민간인 학살 생존자 응우옌 티 탄의 목소리를 통해 당시의 참혹한 상황을 들었다.  

또한 평연 20기 진료단은 ‘베트남과 한국에서 진실을 찾는 여정, 그리고 만남의 기억 말하기’ 좌담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는 하미학살 사건 생존자 응우옌 티 탄이 자리를 함께했다.  

민간인 학살 피해자인 응우옌 떤 꾸이와 두 마을의 응우엔 티 탄은 힘겹게 당시의 상황을 떠올리며, 당시의 기억을 평연 20기 진료단에게 전해줬다.

“그날의 진실과 역사를 알려야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굳은 믿음 아래, 그들은 탄식과 눈물로, 때론 숨을 삼키며 사랑하는 이들을 눈 앞에서 잃은 기억을 다시금 되새겼다. 수백만 번도 더 잊고자 했을 그 날의 기억과 고통을 다시금 찢고 헤집어내 토해냈다.

이번에는 지난달 19일, 평연 20기 진료단이 만난 하미마을 학살사건 생존자 응우옌 티 탄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편집자 주-

 

지난달 19일 평연 20기 진료단은 푸틴 호텔 3층에서 하미마을 학살 사건 생존자 응우옌 티 탄과 좌담회를 진행했다.

평연 20기 진료단은 지난달 19일 저녁 푸틴 호텔에서 ‘베트남과 한국에서 진실을 찾는 여정, 그리고 만남의 기억 말하기’ 좌담회를 열었다. 이날 자리에는 하미마을학살 사건 생존자 응우옌 티 탄과 다낭외국어대학교 한국어과 응우옌 응옥 뚜이옌 교수가 자리를 같이했다. 

이번 좌담회의 사회를 맡은 김정우 사무국장은 “최근 피해자분들이 국가배상소송과 탄원을 준비 중”이라면서 “하미마을과 퐁니마을 두 분의 할머니는 작년 시민평화법정에 나서 베트남 전쟁 한국군 민간인 학살을 증언하는 등 많은 활동을 해 제주 4‧3평화상 특별상을 받게 됐다. 곧 한국에서도 찾아뵐 수 있을 것”이라고 그간의 근황을 대신 전했다.

응우옌 티 탄은 “사실 시민평화법정에 나서기 위해 한국으로 가기로 결정했을 때 가족들과 이웃사람들이 많이 말렸다”면서 “그래도 마음 속에서 꼭 가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희생자의 영혼들이 나를 한국에 데려간 게 아닌가 생각이 든다”고 전했다.

이어 그는 “아직도 한국군에 대한 원망을 갖고 있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그렇다. 하지만 한국의 시민단체 사람과 학생들이 우리에게 다가와 안부를 전하고 관심을 갖는 모습을 보면서 한국에 대한 원망과 불안한 감정이 사라졌다”면서 “한국 사회의 다른 면모를 보며 한국군에 대한 원망과 한국에 대한 생각을 구분짓게 됐다”고 말했다.

하미마을 학살 사건 생존자 응우옌 티 탄

아울러 그는 이번 제주4‧3평화상 소식을 듣고 하미마을 위령비를 찾아 참배한 이야기를 전했다.

응우옌 티 탄은 “희생자의 영혼들에 더 이상 아파하지말고 과거의 아픔을 가라않히길 바란다는 기도를 했다”면서 “한국에서 내가 어떤 일을 하고, 어떤 상을 받았는지 알려주겠다고 약속했다”고 전했다.

이어 그는 “하미마을에 갈 때마다 위령비를 찾아 참배하는데, 이번에는 참배하고 떠나려는데 온몸에 찬기운이 돌았다. 차가운 슬픔이 온몸을 휘감았다”면서 “시체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위령비가 유독 쓸쓸해보여, 나도 갑작스레 외로운 마음이 들어 눈물이 났다”고 말했다.

1968년 1월 경, 하미마을 학살사건으로 11살 때 어머니를 비롯한 남동생과 숙모, 사촌동생 둘을 잃은 그는 어렵사리 그날의 기억을 끄집어 냈다. 이내 좌담회장은 끔찍한 기억을 옮기던 그녀와 통역을 돕던 응우옌 응옥 뚜이옌의 흐느낌으로 가득찼다. 

11살 때 일이다. 아침 6시 30분쯤 집 앞에 나와 보니 한국군 2명이 서 있었다, 그들은 나를 보자 총을 겨눴다. 나는 무서워서 집으로 뛰어 들어가 엄마한테 “큰일 났어요 엄마!”라고 외쳤다.

이야기가 끝나기도 전에 한국군은 집으로 들이닥쳤다. 이웃집에 살던 모자 3명은 몸이 다 발가벗겨진 채 같이 끌려왔다. 집은 이미 한국군에 포위당한 상태였다. “엄마 포위당했어요”라고 외치자 마자 한국군은 나를 잡아채 던졌다. 그 뒤 한국군은 집에 있는 우리를 방공호로 몰아넣었다. 

방공호는 입구가 2개였는데, 한국군은 입구마다 수류탄을 던졌다. 나는 아무것도 판단할 수 없었다. 그저 엄마는 이 세상을 떠나갔다는 것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몸에 아픈 느낌은 없었다. 그저 너무 뜨거웠고, 피 냄새가 내 주위를 감쌌다. 

그날 우리 집엔 이웃집 아이가 놀러 왔다가 같이 변을 당했는데, 방공호의 참사 속에서도 몸은 온전했다, 다만 그 아이는 너무 무서운지 계속 엉엉 울었다. 나는 시끄러운 소리에 한국군이 다시 쳐들어올까봐 겁이 난 나머지, 아이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입을 틀어막자 아이는 더 크게 울기 시작했다. 손으로 더 틀어막아 소리를 멈추려 하자, 이내 내 손을 뿌리치고 방공호 밖으로 나갔다. 그 뒤에 그 아이는 “할머니, 할머니”를 외치며 마을을 빙빙 돌았다.

남동생을 보니 한쪽 다리가 절단된 채였다. 동생의 다리는 한 덩이의 살줌만이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한국군은 학살이 끝나면 항상 집을 불태웠다. 나는 옆집의 건물이 벽돌로 지어져 불타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나는 동생에게 기어갈 수 있는지 묻고 옆집으로 기어가자고 말했다. 동생은 옆집으로 못 가겠다고 했다. 나는 동생을 생각하기에는 너무 어렸다. 혼자 옆집으로 도망쳐 저녁까지 숨었다. 옆집에서 동생을 계속 생각했다. 그러나 동생 곁으로 돌아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저녁이 되자, 옆 마을에 있던 큰 오빠가 돌아왔다. 

오빠는 방공호안에 살아있던 동생을 챙기고 시신을 수습했다. 오빠가 방공호안에 들어갔을 때 동생과 사촌 동생은 아직 살아있었다. 동생은 부상은 심했지만, 정신은 멀쩡했다. 동생은 ‘엄마가 죽었어.. 엄마가 죽었어’만을 되뇌었다고 했다. 오빠는 동생에게 울지 말라며 사탕을 건네고, 동생과 사촌 동생을 챙겨 집 마당으로 데려왔다.  

방공호를 수습한 오빠의 이야기는 끔찍했다. 발가벗겨져 집에 끌려 들어왔던 이웃집 아주머니는 상반신만 있었다고 했다. 오빠는 시체를 들어 올리자 온갖 창자가 다 떨어 졌던 상황을 잊을 수 없다고 말했다. 방공호안에 있던 또 다른 아이는 부상이 심했는데, 집으로 기어가던 중 목이 말라, 물을 마셨는데, 결국 출혈이 더 심해져 숨졌다. 오빠는 시신을 계속 수습했으나, 경황이 없어 제대로 시신을 묻지 못하고 대충 시체를 쌓아 땅에 묻었다고 했다.

다낭 항구에는 독일에서 온 진료배가 있었는데, 외삼촌은 나와 동생, 그리고 사촌 동생을 다낭에 있는 병원에 갈 수 있게 도왔다. 오빠는 남동생의 눈이 너무 흐려져 있어 오래 못 갈 것이라 생각하고 친척들에게 동생이 죽으면 묻어달라고 부탁했다. 남동생은 병원에서도 “엄마 일어나요. 밥 주세요”만을 반복했다. 그렇게 남동생은 3일 동안 엄마를 애타게 찾다 죽었다. 돌이켜보면 동생은 출혈이 너무 오래 지속돼 죽은 거지, 더 일찍 도움을 받았다면 목숨을 건졌을 거라 생각한다. 나는 너무 어려서 동생의 죽음을 지켜볼 수도, 시신을 어떻게 처리했는지도 확인하지 못 했다.

병원치료가 끝난 뒤에도 나를 데려갈 사람이 없었다. 어떤 아주머니가 나를 보고 우리 집으로 가자고 했을 때, 나를 받아주는 사람이 있단 생각에 너무 기뻤다. 아주머니가 다시 오겠다며 떠난 며칠 사이, 오빠가 나를 찾아 다시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응우옌 응옥 뚜이옌 교수

전쟁서 살아남은 것만으로 다행인 윗 세대

베트남 전쟁, 복잡한 요인 얽혀 진상규명 어려움

힘겹게 응우옌 티 탄의 말을 전한 응우옌 응옥 뚜이옌 교수는 “2004년 평연 통역단 활동을 통해 베트남전쟁 한국군 민간인 학살 문제를 다시금 생각하게 됐다”면서 “문제 의식이 조금씩 커지면서 베트남 사람으로서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고민을 하게 됐고, 그 이후 지속적으로민간인 학살 문제를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고 전했다.

이어 뚜이옌 교수는 “그러나 아직 베트남에는 지식인들 중 이 일에 접근하는 사람이 매우 드물어 한국 사람이나 한국 시민단체에 의지해 일을 진행하게 됐고, 내가 가진 힘이 너무 부족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면서 “결국에는 베트남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면서 베트남 사람에게 학살 문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전했다.   

이어 뚜이옌 교수는 베트남 전쟁 한국군 민간인 학살 문제가 베트남에서 제대로 회자 되지 않는 이유를 설명했다.

뚜이옌 교수는 “베트남의 근현대사는 중국, 프랑스, 미국 등 백년간의 전쟁이 이어져, 우리의 할머니 할아버지 세대는 평생을 전쟁을 겪었다”면서 “윗 세대들은 재차 이야기를 듣는 것에 지쳐하고, 산 것만으로도 다행이라는 반응이다. 또한 교과서에서도 민간인 학살 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않다보니, 젊은 세대들도 이 사건을 잘 모른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베트남 전쟁의 배경은 너무 복잡하다. 남‧북한 문제를 한반도 내에서 스스로 풀어 낼수 없는 것과 같다”면서 “베트남 전쟁도 여러 요인이 겹처 지금까지 베트남 정부도 공식적인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다”고 밝히면서, 베트남 진상이 밝혀지는 그 순간까지 평연이 함께 해줄 것을 당부했다.

끝인사에 나선 응우옌 티 탄 역시 “오늘 이자리를 통해 평연이 20년 동안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돼 너무 기쁘다”면서 “한국 정부의 공식적 사과가 있을 때까지, 여러분이 우리와 같이 평화의 길을 걸어갔으면 한다”고 바람을 전했다.

문혁 기자  mhljb1@gunch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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