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쿠바 여행기 『왜 체 게바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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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쿠바 여행기 『왜 체 게바라인가?』
  • 송필경
  • 승인 2019.04.15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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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지성으로 무장한 스파르타쿠스들은 법전과 의약품보다는 총을 택했다.

2018년 7월 8일(쿠바 날짜)은 일생에서 잊을 수 없는 날이 되었다. 이번 쿠바 여행의 핵심 답사지인 ‘혁명의 길; Ruta de la Revolucion’에 갔기 때문이다.

숙소에서 쌍용차 로디우스를 타고 포장길을 2분 쯤 가니 일주문 같은 매표소가 있다.
‘Parque Nacional Turqino’, 즉 투르키노 국립공원 입구다.

투르키노 국립공원 입구(제공 = 송필경)

공원 입구를 지나 가파른 시멘트길 5km, 수직 높이 750m 올라가면 시멘트길이 끝나는 알토 델 나란호(Alto del Naranjo)라는 능선 분기점이 있다. 이 지점 높이는 해발 950m으로 마에스트라 산맥을 시원하게 볼 수 있다. 우리나라로 치면 지리산 성삼재라 할까?

시멘트 바닥 주차장에서 안내인이 설명을 하고 있다(제공 =송필경)

이 분기점에서 동쪽으로 13km 가면 마에스트라 산맥의 최고봉인 높이 1974m인 피코 투르키노(Pico Turquino)가 있다. 피코는 봉우리란 뜻이다. 우리 지리 산맥의 천왕봉(1915m)인 셈이다. 여기서 투르키노봉을 거쳐 그란마주 남쪽 해안까지 산행한다면 2박3일 걸리고 안내인의 도움이 절대 필요하다. 투르키노봉 정상에는 쿠바의 국부 호세 마르티의 흉상이 있다고 한다.

아래 사진 오른쪽 최고봉이 투르키노봉이다. 산 정상에 있는 호세 마르티 두상(제공 = 송필경)

분기점에서 서쪽으로 3km 정도 가면 우리가 답사하려는 혁명군 사령부(Comandancia de la Plata)가 있다.

투르키노 국립공원 간략도(제공 = 송필경)

투르키노 국립공원을 마에스트라 산맥 국립대공원(Gran Parque Nacional Sierra Maestra)라고도 한다.

면적은 약 230㎢로 지리산 국립공원 약 절반이다. 산맥 길이는 약 150km이며 평균 높이가가 약 1370m에 이른다.

그란마 지역의 순박하고 근면한 '캄페시노스(Campesinos;시골 사람들)'의 보금자리이며  브로콜리 색체 봉우리와 습기가 많은 운무림으로 둘러싸인 이 공원은 1950년대 후반 피델 카스트로의 총성이 울렸던 매혹적인 자연보호구역이다. 야라(Yara)에서 남쪽으로 40km 거리, 바르똘로메 마소(Bartolome Maso)에서 매우 가파른 콘크리트 도로로 24km 올라가면 인적이 드물고 깍아지른 듯한 지역이다. 그리고 쿠바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인 피코 투르키노가 있다. 수많은 조류군과 식물군, 한때 혁명군의 사령부 이었던 건물도 여기에 있다.

이 지역의 풍부한 역사는 대부분 1956년 12월에서 1958년 12월 사이에 있었던 게릴라 전쟁과 아주 밀접히 관련이 있다. 첫 해에는 피델 카스트로와 늘어가는 그의 지지자들이 며칠 이상 한 곳에 머물지 않을 정도로 거처를 늘 옮겨 다녔다. 혁명군은 1958년 초가 되어서야 피코 투르키노의 기슭에 영구 기지를 세웠다. 카스트로는 혁명법 초안 대부분을 이곳에서 작성하였으며 바티스타 정권의 최후 몰락을 가져온 군사 작전의 대부분을 지휘한 곳도 이곳이다.

분기점인 알토 델 나란호에는 이미 우리 안내인이 대기하고 있었다. 대충 이런 설명을 듣고 서쪽 길로 들어섰다. 약간 경사진 내리막 산길은 어렵지 않았다.

(제공 = 송필경)

하늘엔 여름 태양이 이글거렸으나 열대림이 우거져 걸어도 그렇게 덥지 않았다. 30분 쯤 쉬엄쉬엄 가니 널찍하고 양지바른 산비탈에 나무 벽과 슬레이트 지붕인 건물이 몇 채 있다. 창고 침실 주방 등이다. 벽이 없고 지붕만 있는 건물에 열 댓 명이 쉴 수 있는 탁자와 의자가 있다. 건물 한 쪽에는 쿠바 국기와 카스트로가 시가를 물고 있는 사진이 판넬로 되어 있다. 이곳을 찾는 방문객에게 주문하면 커피와 차를 팔고 있는 휴게소였다. 탁자에 쉬면서 모두 한 잔했다.

(제공 = 송필경)

가이드 말에 따르면 카스트로가 마에스트로 산맥에서 거처를 찾을 때 여기 농부 ‘오스왈드 메디나’가 안전한 곳으로 자리 잡게 해 줬다고 한다. 그곳이 지금 우리가 찾아가는, 여기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혁명군 사령부다.

(제공 = 송필경)

쉬고 나서 농가 울타리 문을 지나 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다. 길이 좀 좁아지고 오르막이었다. 얼마 가니 사령부 이정표가 나타나고, 조금 더 지나니 가던 길 방향이 아닌 오르막 쪽으로 ‘CASA DE FIDEL(피델의 집)’이란 팻말이 보였다. 길은 좀 더 좁아지면서 가팔랐다.

쿠바 혁명 답사 길을 기획 하신 손호철 서강대 명예교수(제공 = 송필경)

얼마쯤 걸었을까, 이번 쿠바 여행 계획을 짠 손호철 교수가 묶은 야자 잎 묶음이 흩어진 곳을 가리키며 “송 선생은 여기서 꼭 사진을 찍어야 해!” 하셨다. 손 교수는 이미 여행 정보를 이미 다 머리에 넣어 놓고 계셨다.

작은 나무 기둥에 야자 잎을 엮어 덮은 오두막이 바로 체 게바라가 게릴라 투쟁을 하면서 꾸린 야전 병원이었다. 충분한 의료 기구가 없어 최소한 응급처치만 했다고 한다. ‘Posta No 1’이라 쓰인 이곳에서 주로 발치를 했다고 했다. 마취약이 부족해 충치가 심해 고통 받는 사람에게 마취 없이 ’발치 감자‘ 즉 ’뻰치로 이빨을 쌩‘으로 뽑았다. 이때 사용한 간단한 치과 기구는 산타클라라에 있는 체 게바라 기념관에 전시해 놓고 있다.

손교수의 친구이자 치과의사 선배인 송중환 선생과 함께 감격스런 마음으로 사진을 찍었다.

(제공 = 송필경)

이 허물어진 진료소를 보며 2008년에 베트남 최북부 까오 방에 갔을 때 호찌민이 살았던 대략 2평짜리 오두막을 연상했다.

훅 불면 날아갈 듯한 이 오두막에서 1941년 3월부터 1945년 5월까지 살면서 베트남 공산당 조직을 재건하고 확대했다. 20세기 현대사에서 가장 경이로운 조직으로 무력 침공한 미군의 코를 납작 눌러버린 베트민(베트남독립동맹; 월맹)을 창설했다.

베트남 현대사에서 가장 성스러운 장소임에도 원형을 두고 오직 팻말만 하나 세워 놓았을 뿐이다.

(제공 = 송필경)

여기서 조금 올라가니 산등성이에 나무를 싹 밀어버리고 풀만 있는 넓은 터가 나타났다. 혁명 후 집권한 카스트로가 여기를 쉽게 방문하기 위해 만든 헬기 착륙장이라고 한다.

카스트로는 인생 중 가장 멋진 시절을 보냈다는 추억을 갖고 있는 이 지역을 결코 잊지 않았다. 권력을 잡은 뒤에도 정기적으로 이곳을 방문했다고 한다.

(제공 = 송필경)

이 공터에서 다시 나무가 우거진 길로 들어서는 입구에 게릴라 기지였던 판자 건물이 있다. 지금은 게릴라 활동 상황을 전시한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체 게바라가 사용한 몇 가지 의료 기구도 있고, 옷을 수선한 재봉틀도 있다.

(제공 = 송필경)

산 속으로 조금 들어가니 ‘피델의 집; CASA DE FIDEL’이 가파른 비탈에 있었다. 나무 기둥에 판자로 벽을 만들고 야자 잎을 지붕으로 삼은 방 두 개짜리 막사였다. 하나는 침실이고 하나는 거실이다.

(제공 = 송필경)

판자 막사 아래로 가파르게 조금 내려가면 개울이 졸졸 흐르는데 여기서 몸을 씻었다고 했다.

사시사철 녹음이 우거지고 겨울이 없는 마에스트라 산맥, 겨울이면 온 살이 얼어붙는 우리 지리산에 비하면 천혜를 입은 게릴라 장소다!

(제공 = 송필경)

여행안내서 「론리플래닛」의 코만단시아 데 라 플리타의 해설은 이렇다.

짙은 운무림 사이 총안(성벽과 보루 등이 뚫어 놓은 구멍)이 존재하는 기슭으로 가면 이 막사가 있다. 이것은 피델 카스트로가 마에스트라 산맥에서 1년이나 거처를 옮겨 다니다가 1958년에 만든 사령부이며, 찾기 힘들 것이라는 이유로 선택한 외딴 장소에 아주 정교한 모습으로 위장해 있다. 바티스타 정부는 끝내 이곳을 찾아내지 못했으니 이 막사는 충분히 그 소임을 다했다.

소박한 목조 건물 16개로 이루어진 이 막사는 역사상 가장 성공적이었던 게릴라 흔적을 생생하게 간직하고 있으며, 1950년대 모습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이 장소가 얼마나 전략적 위치에 잡고 있는지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피델 카스트로의 집(Casa de Fidel)에서 정점을 이루는 막사는 열린 공간에서 접근할 수 있으며, 입구를 지난 후에는 나무가 우거진 가파른 길을 따라 걸어야 한다.

이곳의 하이라이트는 막사 입구에 있는 작은 박물관과 혁명군 지도자의 위치가 발각되었을 경우를 대비해 미로 같은 도주로 7개, 혁명군 초기 방송을 담당했던 전파국 건물 등이다. 게릴라군의 부상이 얼마나 심했을지 짐작케 하는 병원 건물은 메인 건물과 멀리 떨어진 별도의 길을 따라가야 나타나는데 , 이는 부상병이 고통에 시달리며 본의 아니게 야영지의 위치를 노출해 버리는 상황에 대비하기 위함이다.

 라 플리타 사령부는 산토 도밍고에 있는 야생 생물 안내소에서 관리한다. 

게릴라 군의 역사에 관심이 있다면 대공원의 사무소에서 가이드를 고용한 후 약 5km거리인 알토 엘 나란호 까지 차량으로 이동한 다음 마지막 4km는 진흙길을 걸어 이동을 한다.  카메라 사용시 추가 요금을 내어야 한다.

피델의 집 겉모습을 요리조리 보고 온 길로 다시 돌아왔다. 오는 길에 피델의 집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산 능선 쪽으로 올라가는 팻말이 보였다. “RADIO REBELDE”, 반군 방송국 가는 길이었다. 가이드에게 거리가 얼마나 되는가 물었다. 1km 쯤이라고 한다. 왕복 30분쯤이면 충분할 것 같았다. 일행을 기다리게 하는 게 미안해 개인 호기심을 꾹 눌렀다.

(제공 = 송필경)

이 길을 올 때는 몰랐는데 마른 땅 옆에 축축한 진흙 길에 발이 푹푹 빠진 흔적이 있다. 가이드에게 물어보니 노새의 발자국이라 했다. 아하, 이 산에서 무거운 짐은 노새를 통해 옮겼구나, 방금 떠나온 농가에 보니 큰 프로판 가스통을 무심코 보면서 어떻게 가져왔지 라는 가벼운 의문이 있었는데 노새 힘을 빌렸구나.

(제공 = 송필경)

분기점인 알토 데 나란호에 돌아왔다. 이렇게 한 바퀴를 느긋이 도는 데 2시간 50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아직 우리를 데리러 올 차는 아직 올라오지 않았다. 이 분기점에서 차를 기다리느라 약 30분가량 쉬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반군 방송국’에 다녀올 걸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숙소로 돌아오니 12시다. 불과 4시간 만에 ‘혁명의 길’ 일부를 맛봤다. 내 생애 가장 소중한 역사의 현장을 다녀 온 셈이다. 내가 다녀온 내 나름의 해외 역사 현장은 3군데다.

1998년, 절친한 치과대학 동문들과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갔을 때 넬슨 만데라가 19년 옥살이 한 로빈 아일랜드의 감방을 둘러보았다.

2008년, 나는 베트남 호찌민의 발자취를 따라 베트남 전역을 답사할 때 호찌민이 살면서 독립운동의 초석을 다진 오두막을 찾아갔다.

2018년, 나는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의 체취가 남아 있는 게릴라 혁명사령부를 찾았다. 

숙소에 돌아오니 침대와 욕실에 예쁜 꽃으로 앙증맞게 정리를 해 놓았다.

(제공 = 송필경)

그 이후 내내 숙소에서 보냈다. 점심 먹고 낮잠을 잤더니 오후와 밤에 이어 새벽까지 맑은 밤 하늘 별처럼 정신이 또렷했다.

역사의 흔적을 찾은 흥분에 잠이 오지 않고 말똥말똥하니 노트북을 열었다. 룸메이트에게 자판 두들기는 소리의 폐를 끼치지 않게 바깥 식당 탁자에 앉아 노트북에 미리 정리한 자료를 읽으며 감상을 노트북에 저장했다.

1953년 10월 몬카다 병영 습격에 실패한 피델 카스트로는 체포되어 동생 라울 카스트로와 함께 재판에서 15년 강제징역형을 받고 피노스 섬에 수감 당했다.

국부 호세 마르티가 만 15살이던 1868년 쿠바 최초의 독립전쟁 때 민중봉기에 가담했다가 체포당해 감옥에 갇혀 족쇄를 차고 채석장에서 강제 노동한 곳이 피노스 섬이었다.
1955년 5월 몬카다 병영 습격해 징역형을 받은 동생 라울 카스트로 등 18명은 여론의 거센 압력으로 사면을 받아 출옥했다.

카스트로 출옥(제공 = 송필경)

피델 카스트로와 일행들은 무장 혁명을 기어코 이루기 위해 일단 멕시코로 망명했다. 1955년 7월 어느 날 피델은 멕시코에 와 있던 체 게바라를 동생 라울의 주선으로 만났다. 20세기 스파르타쿠스들은 첫 눈에 의기투합 했다. 그들은 지적인 검으로 무장한 검투사였다.

피델은 멕시코에 망명한 혁명 동지를 모아 무장 투쟁을 위한 군사 훈련을 받았다. 1956년 11월 25일 자정 멕시코 툭스판 항에서 정원 25인승에 불과한 작은 요트 그란마 호에 건장한 남자 82명과 무기와 의약품을 잔뜩 싣고 쿠바로 떠났다. 비좁고 낡은 나무배는 무게 때문에 속도를 잃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멕시코 만에 거친 파도가 일어 표류하다 상륙 예정보다 2일 늦게 엉뚱한데 도착했다.

훗날 체 게바라는 특유의 냉소적 유머 투로 이렇게 말했다. “상륙했다고? 난파한 거지.”

폭풍을 무릅쓴 항해에 대해 체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배는 우스광스럽고 비극적인 꼴을 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고통스런 표정으로 얼굴을 양동이 파묻고 배를 움켜쥐고 멀미를 했다.”

배에 물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펌프가 고장이 나서 양동이로 물을 퍼냈다. 결국 12월5일 배는 쿠바 남동쪽 해안의 밀림 웅덩이에 좌초되었다. 그들은 무기와 식량과 의약품을 몽땅 버리고 배에서 겨우 총 몇 자루만 쥐고서 탈출했다. 독재자 바티스타의 군대에게 금세 적발된 반란군은 첫 번째 매복에 걸려 거의 전멸되다시피 하고 생존자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피델 카스트로 곁에는 2명의 동료만 남아 있었다. 카스트로는 훗날 “나는 이인 부대를 지휘하는 총사령관이었을 때도 있었다.”라고 회고했다.

소수 생존자들은 농부들의 도움을 받아 마에스트라 산맥 속으로 들어갔다. 12월 18일 피델의 동생 라울 카스트로가 다섯 명의 동료들을 데리고 형을 찾아왔을 때 피델이 라울에게 물었다.

“총을 얼마나 가져왔지?” 5정 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도 피델은 그 특유의 낙천성을 잃지 않았다. “내 것까지 합하면 소총이 일곱 정이네. 이제 다 이긴 전쟁이나 마찬가지야!”

이틀 뒤 체 게바라와 후안 알메이다를 비롯한 대원 7명이 합류했다.

마에스트라 산맥에는 ‘캄페시노스’라 부르는 농부들이 살고 있었다. 이들은 산 아래 계곡 쪽에서 살다가 인구가 팽창하자 점차 사람이 살기 힘든 산꼭대기 쪽으로 밀려났다. 가축 몇 마리를 키우며 커피 농사로 겨우 입에 풀칠을 했고, 사탕수수 수확할 계절에는 산 아래로 갔다. 하루에 1달러를 받기 위해 허리가 휘는 노동을 했다. 근처에는 학교도 병원도 없었다.

비참하게 가난하고 무식해서 무시당한 ‘캄페시노스’들은 학살 위험이 있더라도 착취하는 정부군에 쫓기는 게릴라를 자연스럽게 도왔다. 게릴라군은 정부군처럼 행동하지 않았다. 게릴라들은 식량은 돈을 주고 사고 여자들을 존중하는 원칙을 철두철미하게 지켰다. 의사였던 체 게바라 행세를 하며 진찰을 구실로 어린 소녀들과 아주 가깝게 지냈던 전직 초등학교 교사를 재판해서 총살했다.

전투 중에 아무리 오랫동안 행군했더라도 피델은 매번 “그날 하루는 무슨 일이 벌어졌고, 우리의 문제, 적의 문제가 무엇인지 설명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사람들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훤히 알게 되었고 대장에 대한 절대적 존경심을 가졌다.”

상륙한지 겨우 육 주 정도 지난 1957년 1월 17일, 피델은 전세 주도권을 잡기 위해 기껏 25 명뿐인 병력만으로 근처 정부군의 작은 부대를 점령했다. 대단한 전과는 없었지만 게릴라의 존재를 알리는 심리적 효과를 거두었다.

한 달 뒤에는 한층 대담해져서 ‘뉴욕타임스’ 기자 허버트 마튜스(Herbert Lionel Matthews;  1900–1977)를 산속으로 불러들였다. 기자는 병력이 얼마나 한심한 지 눈치 채지 못했고 오직 젊은 지도자에게 매료되었다.
“피델이 부하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이 섬의 젊은이들의 상상력에 충격을 주었던 이유를 쉽게 알 수 있다. 그는 대의명분에 헌신한 지적 광신도이며, 지도자로서의 자질을 갖춘 용기 있는 이상주의자이다.”

산속 게릴라 기지로 허버트 마튜스를 불러들인 피델은 혁명 성공 후 훈장을 줬다(제공 = 송필경)

“마에스트라 산맥 어디를 가도 피델은 모든 사람들의 이름과 길을 기억해냈다. 피델의 기억력은 탁월했다. 피델은 책 한 권을 통째로 외우기도 했다.”

1957년 중반 무렵 해방구를 만들었다. 마에스트라 산맥에 반란군이 학교와 병원을 건설하고 관리했다. 처음에는 10㎢ 정도였다가 100㎢까지 늘었다.

전투가 없는 기간에 체는 부상자와 환자를 치료했는데 피델은 “저 의사는 진짜 군인이다.”라고 했고 29살의 젊은 아르헨티나 의사에게 반란군 중에서 가장 높은 계급인 부대장의 별 계급장을 달아주었다.

피델의 말이 빈말이 아니었다. 습격을 할 때마다 가장 선두에 서는 사람은 항상 체 게바라였다. 1958년 초부터 이백 명가량으로 불어나 강력해진 반란군은 조금씩 떠돌이 생활을 청산하기 시작했다. 체는 자기 부대원을 이끌고 엘 옴브리토에 정착한 뒤에 무기 제작소, 제빵 공장, 정육점, 구두 가게, 창고를 세웠다. 그리고 <자유 쿠바>라는 작은 신문을 등사판으로 찍어냈다.

피델은 처음 정착 부대의 본부를 마에스트라 산맥에서 가장 접근이 어려운 ‘라 플라타’에 설치했다. 참호로 둘러싸여 있고 곳곳에 방공호와 원격 조정용 지뢰가 깔려있는 요새였다. 6월 정부군의 공격을 받아 후퇴한 반란군은 이곳에서 반격을 시도한 뒤 산토도밍고에서 대승을 거두어 연이어 7월 엘 히구에서도 승리를 거뒀다. 주교의 승인을 받은 사르디나스 신부가 해방구에 들어왔다. 그는 시에라에서 태어나는 아기들에게 유아세려를 주었고 매번 피델은 그들의 대부, 즉 2번째 아버지가 되었다.

“쿠바인들이 피델 카스트로를 안 것은 프랑스인이 드골을 안 것처럼 라디오 방송을 통해서였다. 그의 음성은 조금 높은 듯하면서 거의 최면 효과를 일으키는 아주 독특했다.”

라디오 반군 (제공 = 송필경)

1958년 8월 21일 혁명 방송을 통해 피델 카스트로는 쿠바 전역에 대한 공격 명령을 내렸다. 밀림과 늪지를 지나고 폭격 뿐 아니라 두 차례의 태풍을 견디면서 체 게바라와 또 다른 대장인 카밀로 시엔푸에고스의 부대는 수백km 거리를 행군했다.

10월 3일 가혹한 조건 속에서 행군하던 체 게바라는 이렇게 썼다. “내 정맥을 끊어서 사흘 동안 아무것도 먹지도 자지도 못한 저들의 입술에 뭔가 따스한 것들을 주고 싶다.” 다행스럽게 바티스타 군대는 더 싸울 의욕이 없었다. 그들은 거의 부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부대장들도 전선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들은 대세의 흐름이 바뀌었음을 느꼈던 것이다. 나라 전체, 심지어 이웃 강대국 미국조차도 이제 독재자에게 등을 돌렸다. 쿠바 한복판에 있는 도시 산타클라라는 2,500명이 주둔하고 있는 바티스타의 마지막 요새이자 아바나로 들어가는 입구였다.

독재자는 막판 승부에 모든 것을 걸었다. 장갑차를 준비했다. 그러나 364명의 대담한 반란군과 함께 체 게바라는 기관차를 탈선시킨 뒤 화염병으로 공격했다. 병사들이 타고 있던 장갑 기관차는 거대한 화덕으로 변했고 장교들은 투항을 시작했다. 그들은 반란군에게 인간다운 대접을 받으리란 것을 알고 있었다. 1959년 1월 1일, 산타클라라의 마지막 요새까지 무기를 내려놓았다. 독재자는 그 전날 밤, 아바나에서 산타도밍고로 아무도 모르게 도망쳤다.』

-이상 자료는 ‘코르다의 쿠바, 그리고 체 (알베르코 코르다의 사진). 알렉산드라 실베스트라 레비 엮음, 이재룡 옮김, 현대문학, 2006’에서 축약 인용했다.

다음은 귀국 후 여러 자료를 살펴보다가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아주 중요한 인물을 발견했다. 셀리아 산체스(Celia Sanchez; 1920-1980)였다.

셀리아 산체스 (제공 = 송필경)

셀리아 산체스는 ‘7월 26일 운동(M-26-7; 몬카다 병영 습격 사건을 기억하는 운동)’ 초장기부터 가담한 소수의 여성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란마 호 게릴라들이 상륙에 필요한 준비를 담당하면서, 게릴라가 도착하면 산티아고에서 무력 봉기를 지원할 예정이었다.

상륙 작전이 실패해서 1957년 2월 16일에야 피델은 셀리아를 만났다. 셀리아가 암으로 죽을 때까지 23년 동안 지속한 기막힌 인연을 시작했다.

지방 의사의 다섯 딸 가운데 한 명으로 반란군이 시에라 산맥에 오기 전부터 반란군과 접촉을시도했다. 남자처럼 자랐고 의지와 지성으로 똘똘 뭉친 피델보다 6살 많은 36살 여자는 자기 꿈에 어울리는 임무를 찾았다.

두뇌가 명석하기로 유명해서 마에스트라 산맥 게릴라 캠프에서도 병참을 총괄 책임질 정도로 피델이 신뢰한 인물이다. 산체스는 게릴라 캠프에서 한 공동체 생활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다고 회상했다. 젊은 게릴라들은 열정과 이상으로 똘똘 뭉쳐 그 어떤 역경도 이겨낼 수 있는 희망을 지녔다고 했다.

셀리아는 암으로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피델 곁에서 투쟁에 헌신했다. 피델을 혁명 전사로서, 피델의 인간적인 면모에 매료된 셀리아는 고된 행군과 빗발치는 총알을 무릅쓰고 싸움터, 심지어 그의 꿈속까지 피델을 따라 다녔다. 비서, 애인, 어머니, 간호원 역할을 해내며 셀리아는요리를 하고, 명령을 전달하고, 자료를 정리하는 등 수많은 역할을 했다. 무기를 다루는데도 전문가라서 셀리아는 반란군 중에서 전투에 참가한 최초의 여자였다. 

처음에는 마에스트라 산맥과 다른 지역을 오가며 연락하는 일을 담당했는데 1957년 말에는 바티스타정권의 경찰이 검거 그물을 조이는 바람에 산속에서만 머물러야 했다. 반란군이 승리를 거둔 후 이 멋진 여자는 최고 영도자의 분신이 되었다. 피델이 없을  때에 명령을 내릴 수 있고, 보안상  이유로 피델이 어디에서 밤을 보내는지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매일 저녁 셀리아는 피델의 카키색 전투백 호주머니를 뒤져서 조그만 종이 뭉치를 꺼내왔다. 거기에는 피델이 낮시간 동안 떠올렸던 생각들이 적혀 있었고 그것은 곧바로 실행에 옮겨져야 할 일들이었다.

훗날 혁명 정부가 들어선 뒤 최고 지도자 피델의 비서실장을 오랜 기간 역임한 셀리아를 두고많은 호사가들은 그녀를 피델의 연인이라고 했다.

피델 카스트로 삶에서 가장 중요한 여자는 두말 할 것 없이 셀리아 산체스가 분명하지만 연인 관계라는데 대해서는 피델은 단호히 부정했다.

셀리아의 아버지는 빈민을 위해 평생 헌신한 존경받는 의사였고, 그 덕분에 셀리아는 의료 복지에 대한 관심이 남 달랐다. 혁명 성공 후 전 인민을 대상으로 무상 의료 복지 정책을 강력히 시행한 피델의 신념 뒤에는 의사였던 체 게바라와 참다운 의사의 딸이었던 셀리아 산체스라는 두 인물의영향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1958년 여름 피델은 셀리아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

"지금의 투쟁이 끝나면 나는 더 큰 투쟁을 맞이할 거요. 그 투쟁은 미국과의 싸움이 될  것이고, 그것이 우리 운명이요“

이 말에서 나는 베트남 호찌민이 떠올랐다.

1954년 5월 7일 5시 30분 미국의 지원을 받은 프랑스군은 잡 장군이 이끄는 베트남에 항복을 했다. 잡 장군은 승전 1보를 호찌민에게 타전했다. 호찌민은 격려의 사자후를 내뿜었다.

“한 작은 식민지 국가가 역사상 처음으로 식민주의 본국을 무찔렀다. 이것은 베트남 인민의 영광스러운 승리이자 세계 민주주의, 그리고 사회주의를 수호하고 있는 세력의 승리다.”

그리고 이 말도 잊지 않았다. “승리는 장한 일이지만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다시 말해 ‘바로 지금부터’ 미국이 베트남 최대의 적이라는 것을 내다봤다.

미국을 바라보는 위대한 혁명가의 시선은 쿠바와 베트남에서 일치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지금까지 지구촌 약소국가의 ‘자주와 독립’을 방해한 최대의 걸림돌은 언제나 미국의 한 속성인 제국주의 야욕이었다.

우리 한반도는 74년 간 진정한 ‘자주와 독립’을 얻지 못했고, 차베스가 떠난 베네수엘라는 지금도 미국의 제국주의 야욕이란 바람 앞에 촛불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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