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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치가 주는 울림, 더욱 커지길"[건치와 함께한 사람들] 광전건치 위유민 회원의 동생이자 정태환 회원의 처남 위성준 씨
위성준 | 승인 2019.04.23 17:33
(좌측부터) 정태환・위유민 회원과 위성준 원장

목포에서 광주로 전학을 온 게 1988년 11월 30일. 조선대 후문근처에서 17년 넘게 살았다. 90년대 후반까지 최루탄 냄새는 익숙하고, 전경 버스가 길가에 서 있는 건 낯선 풍경이 아니었고, 집에서 어떻게 대처해야지 덜 불편할지도 나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며 지냈다. 

작은 누나가 보던 책들을 보며 운동권에서 활동을 하나보다 짐작했고, 학생회 선거에 나간다며 흰 저고리에 검정 치마를 입어 당황스럽게 하던 누나가 졸업을 하고 서울에서의 1년간 페이 생활을 정리하고 내려왔다. 그리고 25년 전인 1994년 4월 작은 누나가 광주에서 치과를 개원했다. 

가끔씩 누나가 치과 선배들과의 모임에 같이 가자고 해서 따라 다녔다. 친구들과 만났을 때와 달리 먹을 것들이 비교가 안 되게 좋았기에 싫을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몇 번을 만나 인사를 하며 이름을 익히게 된 선배들이 83학번 즈음의 전남대와 조선대 선배들이였고, ‘건치’였다. 기수형, 규탁 형, 정수 형, 태환 형, 성은 형, 상운 형, 성표 형, 양균 형 그리고 몇 분 더. 요즘 친구들 표현으로는 꼬마일 때 선배들을 알게 돼서 형이라 부를 수 있는 선배들이지 않을까 싶다. 형들도 그 때는 서른살 전 후로 지금의 나보다 어렸지만, 한참이나 멀어보였던. 그런 선배들이 술자리에서도 가끔씩은 사회 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올리면서 이야기를 했다. 나에게 너무나 낯설고 먼 세계의 이야기들이라 귀 기울여 듣지는 않았지만, 요즘도 그런 화두들에 대해서는 여전하신 듯하다.

학번으로 6년 차이인 누나와는 재학 시절이 겹치는 일이 없기에, 누나에겐 후배이면서 나에겐 선배들인 사람들이 둘 사이를 인지 못했다. 외모부터 성향까지 너무나 달랐기에, 모임에서 같이 있는 걸 보고 놀라면서 웃는 일이 많았다. 요즘은 학회에 매형과 같이 가면 가족으로 보인다는 말을 듣고, 누나와 여행을 가면 부부냐고 물어보는 외국인들에게 그냥 웃기만 한다. 

2000년 전 후, 3월 초에는 광전건치 동부지회가 ‘고로쇠 물 마시는 모임’을 광양에서 하였고, 나도 가족의 신분으로 따라갔다. 어렸을 때는 부모님이 가져다 주시는 고로쇠 물이 반갑지는 않았는데, 그 때부터 마시기 시작해서 가끔씩은 그 때의 기억이 떠오른다.

토요일 저녁, 염소 구이 식당에서 누린내가 잘 제거된 염소를 숯불에 굽기 시작하며 마시기 시작해서, 식사가 끝나면 한편에서는 오징어와 북어포에 소주를 마시며 잘 때까지 계속 먹었다. 그리 먹고도 다음 날 아침에는, 광양 매화 마을로 갔다. 요즘은 여느 축제처럼 입구부터 가판에서 음식 파는 곳이 많지만, 그 때는 정말 매화만 보러 갔다. 조금 더 올라가면 구례, 강 건너가 하동이라는 걸 남이야기처럼 들었는데, 공보의 생활을 하동에서 할 줄은. 꽃구경을 하고 섬진강을 따라 조금 더 올라가서 강변에 있는 식당에서 매운탕을 먹고 오는 일정이 몇 년간 계속 됐다. 

올해가 베트남평화의료연대 진료 20주년이라고 한다. 매형과 누나가 첫 진료단으로 함께 가셨고, 나는 2004년부터 두 번째 진료단으로 다녀왔다. 매형은 오랫동안 진료단으로 계속 참가 했고, 누나는 함께하지 못하더라도 직원들이 참가 할 수 있게 지원을 해주고 있다. 최근 진료단은 예방사업을 주로 한다고 하는데, 내가 갈 때만 하더라도 치료가 주된 사업이었다. 새벽에 일어나서 버스로 이동해서 점심시간에 잠깐 휴식을 취할 뿐인 정신없는 일정이 힘들었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달란트로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게 내게 힘을 만들었다. 한 번이라도 경험 해본 선생님들은 동감하실 듯하다.

그런 기억이 광주지역에서 하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 진료 봉사에 거부감 없이 참가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돼주긴 했지만, 베트남에 가서 보고 들으면서 알게 된 베트남 전쟁 당시의 참상은 힘들었다. 학교에서 배웠던 현대사 부분에 몇 줄로 요약되었던 그 전쟁에서 겪은 아픔들이 여전히 남아있었다. 한국군의 학살이 자행되었던 지역들을 선택하여 그 지역에 봉사 활동을 하면서 울림을 만들었고, 그런 울림들이 모여 요즘 들어 가끔 보이는 베트남 전쟁 관련 기사들이 나오게 하는 계기가 아닐까? 

몇 년 전부터, 몇 군데 광주지역 시민 단체 활동에 매형이 참여하고 있다. 내가 알고 있는 건 마을 도서관과 김원중 씨가 주관하던 북한빵공장 사업 정도? 매형은 관심 없을 것 같은 나에겐 후원계좌 부탁만 하더니, 문화강좌 같은 걸 시작하려고 하는데 와인 강의를 해달라고 부탁했다. 준비하는 입장에서는 어디에 초점을 맞춰야 할지 몰라 쫒기 듯 두서없이 이야기를 하고 마무리를 해서 찜찜했지만, 주제가 와인이라 많은 회원분들이 오고 호응도 좋았다고 한다. 

시간이 더 지나도, 자기 밥그릇을 챙기기 위한 주장보다는 사회 현상에 대해 바른 소리를 내는 전문가 집단의 일원으로 매형과 누나가 계속 활동하고 있을 거라 생각을 해본다. 그 소리가 꾸준했기에 그 울림이 더 믿음직하고 커지지 않았을까?

[즉문즉답] 가족이 본 건치회원은?

Q. 가족으로써 매형과 누나
대외 활동을 할 때 보여지는 강한 모습보다는 가족들과 있을 때는 최선을 다하시는 모습이에요. 1994년에는 강한 386세대인 매형과 신세대의 나름 있는 10년 차이 후배와의 만남이라 매형이 적응하는데 오래 걸리신 듯 해요. 다름에 대한 적응과 인정에 10년 정도 걸렸나? 두 분다 너무 에너자이저라 따라가기 힘들 때가 가끔 있는?

Q. 함께한 건치 활동 
함께 한 활동은 베트남 진료단에 참여한 게 전부인 듯. 야유회와 같은 모임에는 데려가셨지만, 다른 모임에는 안가기도 했고 데려가지도 않으셨던. 광주지역 외국인노동자 진료처에 봉사하러 가는데, 나보다는 후배들이 주축이 돼 진행했던 거라 두 분은 참여하지 않았죠.

Q. 건치 회원을 가족으로 둔 장단점은? 
건치여서라기보다는 활동을 많이 하는 치과의사인 매형과 누나가 있어서 어딜 가든 몸조심해야 하는 번거움이 있죠. 전남대와 조선대를 졸업하신 선배들 중엔 나는 모르지만 누군가의 처남, 동생으로 알려져 있어서 조심, 조심. 누나에겐 귀여운 동생인지라 여타 모임에 자주 데려가서, 부인하지 않으면 건치 회원으로 알고 있는 분들도 많아요.

Q. 건치에 전하고 싶은 말
예전같지는 않지만, 아직도 나쁜 일이 있으면 사회 지도층이라 불리는 치과의사라는 직종의 사회 활동 모임인 건치가, 좁으면 치과계에서, 조금 넓게 사회에서 언제나 바른 소리를 내는 계속 ‘깨어 있는’ 집단으로 유지됐으면 하는 바람을 전해봅니다.

 

위성준  gcnews@gunch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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