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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은 빨갱이 소행이라는 광기에 대해…[특별기고] 송필경 논설위원
송필경 | 승인 2019.05.17 10:00

문경 석달마을 학살 사건으로 본 ‘518광주민주화운동’을 빨갱이 소행으로 주장하는 광기(狂氣)에 대하여
;국회에서까지 5‧18 민주화 운동에 대해 도저히 입에 담아서는 안 되는 망언은 쏟아내는 광기의 속성은 무엇인가?

Ⅰ.
1949년 12월 24일 오전, 경북 문경시 산북면 석봉리(일명 석달마을)에 국군 2사단 25연대 3대대 7중대 소속 2개 소대 80여 명이 지나가다 우연히 들렀던 것 같다. 그리고는 아무 이유 없이 마을 주민들을 대낮에 집밖으로 불러내어 기관총까지 동원해 학살하고 24세대 가옥 모두에 불을 질렀다.

마침 겨울 방학식을 마치고 학교에서 막 돌아온 초등생 어린이들, 엄마 젖을 물고 있던 애기에게까지 마구 총질했다. 마을 주민 124명 중에 86명이 사망했다. 사망자 가운데 여자가 41명, 65세 이상 노인 13명, 15세 미만 어린이가 28명이었다. 

석달마을 학살지에 어린이 위령비와 시비가 있다. (제공 = 송필경)

이 사건의 학살자 부대 이름과 학살 만행이 자세히 드러난 이유는 미국 국립문서보관서에 미국 극동군사령부가 1950년 2월 15일에 작성한 이 사건의 전문이 있었기 때문이다.

1998년 한 재미학자가 이 문서를 찾아내, 이 학살이 빨갱이 소행이 아니라 국군이 저지른 짓이라는 것이 역사에 명백하게 드러낼 수 있었다. 미국 자료를 통해 진상이 드러난 점은 아쉽지만, 이나마 확실한 문서가 역사의 증언으로써 남아 있다는 게 무척 다행이기도 하다.

학살의 진상을 밝혀내려한 생존자 ‘채의진(1936∼2016)’의 70여년 투쟁 기록은 시사인 기자 ‘정희상’이 지은 『채의진 평전 ‘빨간 베레모’』에 상세히 나타나 있다. 관심 있는 분 꼭 이 책을 보시기를 바란다.

채의진은 당시 13살이었으며 또렷한 학살의 기억을 지니고 평생 울분으로 살다 돌아가셨다.

『채의진 평전 ‘빨간 베레모’』와 채의진 선생 영정 (제공 = 송필경)

1960년 4‧19의거가 있자 대구일보 기자 이재문이 석달마을 학살을 심층 취재해 언론에 그 진상을 최초로 보도했다. 그러나 1961년 5‧16쿠데타가 터지자 진실은 또다시 지하 깊숙이 묻힐 수밖에 없었다. 이재문 기자는 결국 1979년 ‘남민전’ 사건에 연루돼 이근안에게 모진 고문을 당하고 나서 사형 선고를 받고 복역하다가 고문 후유증으로 1981년 옥사했다.

이재문 선생 (제공 = 송필경)

2019년 4월 21일, ‘대경 전단협’ 회원들은 ‘인권투어’ 일환으로 2017년 경산 코발트 광산 학살지, 2018년 대구 가창골 학살지에 이어 세 번째로 문경 석달마을을 찾았다.

참고로 ‘대경 전단협’은 대구경북전문직단체협의회의 약자다.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건강사회를 위한 약사회, 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 등 보건의료에 종사하는 사람, 민주사회를 위한변호사모임의 변호사, 민주화를위한전국교수협의회의 교수, 그리고 대구사회연구소 임원들이 모인 단체다.

대경 전단협 회원들이 위령비에서 예를 올리다. (제공 = 송필경)

석달마을은 경북 북부 산악도시 문경에서도 오지다. 지금은 당시 마을까지 버스 한 대가 겨우 지날 정도로 도로가 닦여 있지만, 70년 전 이 마을 진입 길을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이 마을은 문경 심산유곡에 있는 대찰 김용사(金龍寺)로 들어가는 지방도로에서 5∼6km 들어 간 것 같다. 옛 마을 터는 해발 300m 정도로 좁은 V자형 협곡에 있었다. 산비탈 사이의 폭이 50m가 채 안 되었다. 그러니 옛길은 소달구지 겨우 지날 만큼 좁았을 것이다.

‘대경 전단협’ 회원들은 서울에서 내려온 정희상 기자를 모시고 학살 은폐와 진상을 밝히는 과정의 자초지종을 들었다. 또한 채의진 선생의 조카이자 학살 당시 9살 초등학생으로 생존한 채홍락 선생이 당한 끔찍한 당시 상황을 학살 현장에서 들었다.

채홍락 선생은 4살 많은 삼촌 채의진과 더불어 학살 현장에 있었다. 어른들이 국군의 총에 맞아 쓰러지면서 어린 채의진과 채홍락을 덮쳤다. 얼떨결에 어른 시체에 깔린 어린 소년들은 그렇게 학살을 피했다.

채홍락 선생은 자신이 깔린 그 학살 현장에서 피를 토하듯 울부짖으며 학살 상황을 우리에게 증언을 했다. 채홍락 선생은 일반 언론을 믿지 못해 이제까지 인터뷰를 하지 않았다고 했다. 우리 ‘대경 전단협’이 여기를 찾은 진정한 의도를 아시고 통곡을 하시면서 우리에게 증언하셨다. 증언을 마치시고는 다시는 울부짖지 않겠다고 하셨다.

(제공 = 송필경)

나는 베트남에서 한국군이 저지른 십 수군데 학살 현장을 다니며 증언을 들었다. 그리고 제주 4‧3 학살 현장도 많이 다녔다. 어디에서나 어린이 희생자들이 많았다.

그런데 석달마을은 좀 달랐다. 학살 시기가 1949년 12월이면 한국전쟁 시기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제주나 여수 순천이나 지리산과 달리 여기 문경은 전장(戰場)이나 저항의 장소가 아니었다. 수구 세력의 용어를 빌리면 빨갱이(공비)가 출몰하지 않은 ‘공비 청정 지역’이었다.

이런 순박한 산골에서 어린 아이들까지 다짜고짜로 학살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제공 = 송필경)

사진 윗부분은 석달마을 어린이 학살자 위령비 뒷면에 있는 어린이 학살자 명단이고, 아래 부분은 1968년 초에 베트남 하미마을의 학살자 위령비 학살자 명단이다.

석달마을 위령비에 채아기1, 박아기1, 정아기1, 황아기1이 나온다. 1이란 갓 태어난 아기의 나이이고 아직 이름을 짓지 않아 성에다 아기를 썼다.

베트남 하미 마을 위령비 희생자 이름이 적혀 있고 태어난 해를 적고 있다. 133번, 134번, 135번 사람은 학살 당시인 1968년에 태아난 아기고 이름이 없어 성(Nouyen) 다음에 무명(이름을 짓지 않아서)이란 뜻의 보쟌(VO DANH)를 적었다.

1949년 한국에서 학살 양상이 1968년 베트남에서 학살 양상과 어쩌면 이리 닮았나?

학살 다음날 이승만 정부는 진상 조사를 일체하지 않고 빨갱이 소행으로 뭉개 버렸다. 마치 천안함 사고 진상을 얼렁뚱땅 북한의 소행으로 단정하고는 민중에게 침묵을 강요하듯 말이다.

그리고는 당시 국방장관인 신성모가 내려와 100만원을 마을 재건에 쓰라고 던져주고 갔다.

학살자 그 누구도 처벌을 받지 않았다. 학살자의 한 사람이 나중에 술자리에서 이를 자랑스럽게 떠들다가 이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는 빌미가 됐다. 베트남전 학살 사건도 참전 군인들이 술자리에서 부녀자를 희롱하고 죽인 것을 용맹으로 포장하는 일이 흔히 있었다.

지금 무고한 주민을 학살한 장소에 『문경양민학살어린이위령비』가 서 있다. 그 위령비 옆면에 새겨 있는 15세 미만 학살자의 명단을 보면서 학살자들이 저지른 소행의 동기를 알 것만 같았다.

실제 전투에서는 노약자, 부녀자, 아이들을 모아놓고 죽일 여유가 없다. 다시 말해 약자를 모아놓고 집단으로 죽인 상황은 긴박한 전투가 아닌 여유로운 학살이다.

군인들이 자행한 광기 어린 맹목적 살인은 비겁함과 다름이 아니다. 저항하지 않은 약자를 집단으로 죽여 놓고 전투 용맹을 자랑하는 아주 천박하고 저급한 행위다.

카뮈 소설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가 아랍인을 감정의 순간 충동으로 총으로 살인하고 죄의식이 없었듯이, 국군 2사단 25연대 3대대 7중대 소속 2개 소대원들 역시 별다른 이유 없이 욱하는 충동으로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하고 마을을 불태웠을 것이다. 그리고는 자신의 행위를 빨갱이 청산이라고 거짓 위안하면서 죄의식을 느끼지 않았으리라.

1945년 9월, 미군이 한반도에 들어오면서 발표한 맥아더 포고령에 따르면 미군 사령관 맥아더는 스스로 해방군이 아닌 ‘점령군’이라고 당당하게 밝혔다. 포고령의 핵심은 이렇다.

“… 나의 지휘 하에 있는 승리에 빛나는 군대는 금일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 영토를 ‘점령’한다…”

점령군 미군은 한국인의 해방에 대한 꿈과 열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38선 이남에서 공산주의 확산을 막는 데만 주력할 수 있는 군사정부를 꾸렸다. 공산주의를 막고 냉전을 부추기는 가장 효율적인 집단이 미군의 말이라면 무조건 복종하는 일제부역세력이었다. 반민족적 세력이 해방 후 민중에게 역사 처벌을 받기는커녕 ‘점령군’ 미군에게 막강한 권력을 부여받았다.

이들은 반민특위 같이 자신들이 일제에 부역한 과거를 들추려는 세력을 모조리 ‘빨갱이’로 몰았다.

그리하여 남한에서 지금까지 의미 없이 내뱉는 저주스런 헛소리가 바로 ‘빨갱이’였다.

38선 이북 공산정권이 토지개혁과 더불어 친일부역세력을 완벽하게 청산하자 남한의 친일부역 청산 대상자들은 더더욱 공산주의 공포에 휩싸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의심할 수 있는 모든 상상력을 동원해 빨갱이에 대한 증오심을 키우고 탄압에 나섰다. 미군정의 궁극적 목표도 남한의 자주 독립이 아니라 남한이 공산주의 저지선의 최선봉에 있기를 원했기 때문에 이승만의 빨갱이에 대한 무자비함에 철저히 눈을 감았다.

1946년 대구 10월 항쟁, 1948년 제주 4‧3항쟁, 1948년 여순 항쟁을 거치면서 친미친일부역 정권은 자주 통일을 염원하는 세력을 빨갱이라고 몰았다. 한 술 더 떠 빨갱이로 의심하면 학살해도 괜찮다는 권리를 미군에게 부여 받았다. 미군정과 친일친미 독재정부가 학살자를 감싸는 풍토가 이렇듯 해방 직후부터 이미 굳어 있었다.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함부로 단정한 빨갱이에게 근거 없는 광기를 부리는 일은 현재까지 동기와 이유를 불문하고 용서 받을 수 있는 남한의 가장 비이성적 관행이 됐다.

석달마을 사건을 두 마디로 요약하면 이렇다.

이 마을을 우연히 지나던 국군 소대가 무고한 민간인들에게 아마 순간적인 광기가 발동하여 학살했다.

학살자들이 민간인들이 빨갱이였다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늘어놓으니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에서부터 박정희·전두환의 군사정권에 이르기까지 진상 조사와 처벌을 당연히 받지 않았다.

이는 베트남 파병군이 베트남에서 저지른 민간인 학살의 예와 한 치도 다름이 없다.

과거의 일은 과거만의 일로 돌리면 그만일까?

Ⅱ.
1949년 석달마을 학살 31년 뒤 1980년 광주에서 민주화운동이 일어나자 전두환과 조선일보는 전두환이 저지른 명백한 쿠데타적 살인을 빨갱이들의 폭거라고 주장했다.

1987년 6‧10항쟁 이후에 우리 사회는 입도 벙긋 못하던 518 민주화 운동을 언급하기 시작했다. 1993년 김영삼 문민정부는 출범하면서 5‧18 광주 학살 진상을 거론해 광주 시민의 명예는 어느 정도 회복했다. 그러나 반드시 뒤따라야 하는 책임 규명과 책임자 처벌은 아직 엄두도 못 내고 있다.

지금 이 순간, 학살자 전두환의 민정당의 후손인 자유한국당은 국회에서 광주민주화운동을 빨갱이의 소행으로 몰아붙이는 맹목적 저주를 퍼붓고 있다.

역사의 진실 규명과 응징을 통한 적폐 청산이 없으니 적폐들은 이런 광기를 도무지 멈추지 않고 있다, 자신들에게 불리한 모든 상황을 빨갱이 탓으로 돌리는 광기를!

국회에서조차 5‧18 광주항쟁을 왜곡하고 폄하하는 뻔뻔함은 당연히 과거에서 이어 온 광기다. 석달마을 학살과 5‧18광주의 학살은 같은 연장선에서의 광기다. 세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이 어쩌면 이렇게 딱 맞아 떨어질까.

프랑스 철학자 미셀 푸코(Michel Paul Foucaul: 1926-1984)는 대표작 『광기의 역사』를 비롯한 여러 저서를 통해 역사적으로 지배계급이 체제 유지를 위해 이용한 법률과 억압적 통치 구조를 파헤쳤다. 인간의 앎과 실천 의지와 이를 억압하는 권력하고 관계를 자신 철학의 주요 주제로 삼았다.

푸코는 서양 이성이 기존 질서의 고정 관념에 도전하는 ‘다르게 생각’할 권리를 비이성적 사고로 단정하고 소외했다고 보고, 서양 문명이 합리적 이성을 앞세워 저지른 독단적 논리를 비판했다.

푸코는 이성의 독단이 배척하고 소외한 생각을 광기라 불렀고, 배척당하고 소외당한 광기의 진정한 의미와 역사적 관계를 파헤쳤다. 각 시대의 앎(지식)에는 무의식적인 억압적인 지배문화체계에 영향을 받는다. 푸코는 이 다른 생각을 억압하는 권력의 구조를 밝혀내려 했다.
 
푸코는 앎은 권력하고 관계를 맺고 있으며 모든 앎은 정치적이라고 주장했다. 지배 체제는  어떤 것을 바깥으로 밀어내는 데, 밀려난 것이 그 체제의 외부에서 핍박 받는다. 대중의 사회적 행위는 무의식적인 지배체계에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푸코의 분석을 내 나름대로 변용해서 미국의 자본주의 체제가 마르크스 이론을 대하는 태도를 추측해 보면 이렇다.

미국은 독점 자본주의를 해체하려는 마르크스의 공산주의를 광기로 단정했다. 마르크스 이론은 자본주의에 공포와 불안을 조장하기 때문에, 공산주의 징후를 악마가 깃든 모습으로 인식하고 그 목소리를 억압해서 침묵하게 했다.

중세 시대에 가톨릭 종교관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맹종하지 않는 세력을 마녀의 광기로 규정한 역사와 별반 다를 바 없다.

Ⅲ.
광기를 네이버 사전에서 찾아보니 비슷한 것 같지만 전혀 다른 두 가지 뜻이 있다.
① ‘미친 듯한 기미’란 뜻으로, 예문에 ‘광기가 서리다’가 있다.
② ‘미친 듯이 날뛰는 기질’을 속되게 이르는 말로, 예문에 ‘광기를 부리다’가 있다.

미셀 푸코의 『광기의 역사』에서 광기란 ①의 뜻으로 말했다. 서양의 독단적 이성은 기존 관념과 ‘다름’을 광기로 보았다. 기존 질서와 도덕규범에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행위나 심미적으로 독특한 관점을 이르는 말이다. 예술, 철학, 사상 분야에서 이런 사람이 많다. 고흐, 니체, 마르크스 떠올리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미국 자본주의는 마르크스 이론을 광기로 단정했다.

5‧18을 되돌아보는 이 글에서 주제로 말하는 광기는 ②의 의미다. ‘다름’을 광기로 보는 그 시각이나 행위야말로 정신질환에 다름없는 ‘미친 짓’이다.

중세 서양에서 성소수자나 타종교를 악마화해서 배제하듯, 미국이 자본주의 사회에 맹종하지 않는 세력을 빨갱이로 몰아 탄압한 메카시 광풍이야말로 진정 ‘미친 짓’이 아닐까.

5‧18 광주를 ‘북괴군의 소행’으로 보는 그 시각, 간단히 말하면 의도적 정신착란이야말로 시쳇말로 ‘미친 짓’이다. 이 정신착란자들을 교묘히 이용하는 정치 집단이 바로 우리의 제1 야당인 ‘자유한국당’이다. 굳이 심하게 비유하자면 지금 자한당의 행태는 히틀러 하수인인 괴벨스 같은 궤변론자가 들끓는 소굴이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니지 않은가.

해방 후 미국이 남한을 점령하자 미국 명령을 충실히 따른 이승만 이래 반민족적 기득권 집단은 정치적인 반대편을 빨갱이로 악마화해서 배제하고 탄압하고 증오했다.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공맹 말씀이 아닌 노장 사상을 읊조리면 사문난적으로 몰았듯이 말이다.

우리를 강점한 일본 제국주의는 마르크스 근처에만 다가가도 빨갱이로 몰았다. 해방 후에도 일제강점시대와 달라지지 않고 마르크스의 ‘마’자만 말해도 빨갱이로 몰았다.

최근에도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수구 정권은 눈에 가시 같은 집단이었던 통합진보당이 농담으로 ‘혁명’을 이야기 했다 해서 여론 몰이 하고 사법부에 해체하라고 압력을 가했다. 수구집단의 충견(忠犬)에 불과한 사법부는 국가보안법을 들고 나와 당을 해체했다.

정신과 의사였던 프란츠 파농(Frantz Fanon: 1925- 1961)은  광기가 식민지 사회의 폭력적 상황에 기인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광기의 치료는 사회의 완전한 독립과 해방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판단으로 식민지 민족해방투쟁에 뛰어들었다.

불평등하고 비인간적인 식민지 사회는 기본적으로 그 사회를 구성하는 개인의 정신을 왜곡한다. 바로 이점이다. 우리는 조선의 봉건적 관념을 자발적으로 해체하지 못하고 일제에 식민지 굴욕을 경험했다. 일제 식민지에서 벗어나자마자 미국에 군사·외교 주권을 빼앗긴 남한의 지금은 미국 신식민지에 불과하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보라! 태극기가 있는 곳이면 반드시 성조기도 흩날리니 않는가.

Ⅳ.
제1 야당의 원내대표가 해방 후 친일부역을 청산하자는 반민특위 활동을 민족 분열 원인이라고 버젓이 말하는 짓은 남한이 병든 사회임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가 아닐까.

이런 비이성적 언설은 올바른 가치 규범이 자리 잡은 건강한 사회에서라면 설 자리가 없을 것이다. 식민 사회나 독재 국가처럼 병든 사회에서는 건강한 인간이 광기의 인간보다 더 고통스런 삶을 살아야 한다.

인간이 권력과 금력을 맹목적으로 숭상하거나 복종할 때, 오직 천박한 이기심을 기준으로 삼을 때, 자기 정체성과 사회 비판적 인식이, 다시 말해 이성적 사고가 결핍하기 마련이다.

마구 헛소리를 남발해도 스스로는 헛소리로 인식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런 증세의 사람들이 다수일 때 문제가 된다.

문재인 대통령을 비판하거나 싫어하는 것은 자유일지라도 태극기와 성조기 심지어 이스라엘 기를 앞세워 문재인 대통령을 빨갱이로 모는 것은 심각한 집단 정신질환이라 나는 단정한다.

천안함 사건에서 보듯이 천안함 침몰이 북괴 기뢰 소행으로 돌리고 합리적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을 빨갱이로 몰고 나서 대중에게 침묵을 강요한다. 빨갱이를 침묵의 상태로 빠뜨리는 사회 제도 속에서 광기는 더욱 빛을 발했다.

반민특위 왜곡, 5‧18광주 부정, 심지어 세월호 망언에 이르기까지 현재 국회 난장판의 저변에는 빨갱이 탓이라는 의식이 엄연히 존재한다.

해방 후부터 지금 국회 난장판 세력들에게서 발견하는 사유와 행동 방식들, 대중에게 빨갱이 공포를 앞세워 대중을 암암리에 꼼짝달싹 못하게 하는 제도들, 대중을 억압해서 실행하는 배제 또는 축출의 체제들이 버젓이 존재하는 이유는, 우리 사회 모든 잘못은 빨갱이 탓이라는 '사회적 무의식'이 깔려 있음이 명백하다.

5‧18은 빨갱이 짓이라는 광기가 처벌 받지 않는 한 우리 사회는 아직 양심을 말살하는 죽음의 혓바닥으로 침묵을 강요하는 지옥의 입구에서 벗어나지 못하리라.

Ⅴ.
과거의 반성은 미래의 문을 활짝 연다. 반성의 거점은 ‘다른 생각’을 배제하지 않는 풍토에 자리 잡아야 한다. '다른 생각’을 ‘나의 생각’과 동전의 양면처럼 결부하여 당연시 하고 정상적으로 인정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나의 생각’이 ‘다른 생각’을 억압하지 말아야 한다. 

석달마을 사건과 5‧18광주를 반추해 ‘난장판 국회의 심장 멈추기’를 해야 한다. 적폐의 심장들은 이에 저항하겠지만, 이는 지금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가올 시대를 위한 것이고, '다른 생각‘을 할 자유를 얻기 위해서다.

남한의 역사에서 친일부역세력이 민족주의자를 빨갱이로 포장하여 교묘하게 망각의 영역으로 몰아낸 것을 집요하게 들추어냄으로써 정상적인 것 또는 규범적인 것의 토대를 세워야 한다.  
빨갱이를 공포와 불안의 징후와 더불어 악마가 깃들인 모습으로 우리 사회는 인식했다. 우리 사회의 치명적인 결함이다. 친일친미 중심적인 남한 지배 권력이 억압한 빨갱이는 우리 자주적인 주권을 찾으려는 집단이었다. 빨갱이를 억압하는 담론과 제도를 하루 빨리 걷어내야 한다.

‘자주적인 주권’은 광기로 몰려 억압당하고 침묵을 강요당했다. 5‧18의 외침은 아직도 왜곡당하고 있으나 결코 망각할 수는 없다.

이승만에서 박정희를 거쳐 전두환으로 이어진 권력은 학살이나 잔인한 처형을 통해 독재의 힘을 과시해 대중을 통제하려 했다. 하지만 이런 식의 권력 행사는 4‧19 의거, 10‧26 사건, 5‧18민주화운동, 6‧10항쟁, 촛불 혁명 같은 큰 저항을 불러왔다.

영토만 아니라 모든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분단들은 전 지구적 냉전이 개시하기도 전에 우리  한반도에 찾아왔다. 다른 모든 곳에서 냉전이 끝난 오늘날에도 계속 남아 있다. 이를 어찌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있는가?

정신과 의사 파농은 말했다. 정신과 의사는 개인에 대한 관심을 넘어서 인간의 해방과 자유를 위해서 일해야 하고, 정신질환은 병적인 사회와 관련시켜 이해해야 한다고.

진보는 5‧18마저 ‘빨갱이’ 탓으로 돌리는 광기를 확실하게 치료하자!
한반도의 진정한 해방과 자유를 간절히 바라면서.

처절한 희생으로 우리 남한을 이만큼이나마 성숙하게 한 5‧18 영령에게 진심으로 고마움을 바친다.

(제공 = 송필경)

송필경  spk5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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