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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쿠바 여행기 『왜 체 게바라인가?』19 잉헤니오스 계곡(Valle de Los Ingennios)에서 노예 착취의 흔적
송필경 | 승인 2019.06.14 14:15

2018년 7월 11일 아침, 앙콘 해변 호텔을 출발했다. 트리니다드를 거쳐 동쪽으로 약 8km 정도 가니 해발 192m의 나지막한 언덕이 있다. 이 언덕에 잉헤니오스 계곡 전경이 한 눈에 샅샅이 들어오는 전망대가 있다. 
전망대에서 본 넓은 계곡에는 씨만 뿌리면 인간의 배를 넉넉히 채울 수 있을 것 같은 풍요로운 초록이 가득했다.

그런데 의문이 하나 일었다. 계곡의 정의가 무엇인지.
우리는 계곡이라하면 설악산 천불동 계곡, 지리산 뱀사골 계곡 같이 험준한 산의 급격한 경사 사이로 물이 가파르게 흐르며 사람이 집단으로 거주하기 힘든 골짜기를 일컫는데, 서양식 정의는 우리가 분지라고 생각하는 곳도 계곡이라 한다.
잉헤니오스 계곡의 길이는 약 12km, 폭은 약 22km이다.
베트남의 유명한 격전지 디엔비엔푸 마을도 계곡이라 하는 데, 폭이 8km 길이가 20km이며 우리나라 읍 이상 규모의 꽤 큼직한 마을이다. 사방이 물론 산으로 둘러싸여 있지만.

이런 너른 들판도 그들이 계곡이라 이름 지었으니 계곡이라 하자.

전망대 맞은 편 멀리 잉헤니오스 계곡의 목가적인 들판을 든든한 보초병처럼 감싸고 있는 병풍은 쿠바 산맥 가운데 2번째로 긴 에스캄브라이 산맥(Sierra del Escambray)이다.
트리니다드는 바로 이 계곡 덕분에 한때 막대한 부를 누렸다. 스페인 식민 시대에 설탕 생산의 중심지였으니까.
 
잉헤니오스 계곡의 중심에는 과거의 부를 엿볼 수 있는 설탕 창고, 제당 기계, 노예 구역, 영주의 저택 등의 유적이 10여 곳 남아 있다. 옛 증기 기관차 같은 관광 기차가 시속 30-40km 속도로 트리니다드에서 이 계곡으로 왕복한다고 한다.
융성했던 공장 대부분은 독립 전쟁과 미국-스페인 전쟁 중에 파괴되었고 그 후 사탕수수 재배 중심지는 서쪽 마탄사스(Matanzas)로 이동했다.
약간의 사탕수수 밭이 남아 있지만 오늘날 계곡은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지로 더 유명하다. 목가적인 들판에는 대왕야자 나무들이 색 바랜 식민시대 유적들과 어울려 아름다움을 이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전망대에서 약 10여km 가니 기찻길이 있다. 이를 건너니 과거 흔적을 엿볼 수 있는 마을이 나왔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높은 탑이 눈길을 끌었다.
마을 입구 길은 호박돌(cobble stone) 길이었는데 길 양 옆으로 손수 만든 여러 직물을 빨래줄 같은 곳에 걸어 놓고 관광객 걸음을 멈추게 한다. 식탁보, 치마, 셔츠 등이다. 20개월 된 손녀 원피스만 샀다. 손녀를 얻고 난 뒤 아내와 딸 아들의 선물은 아예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길을 따라 들어가니 대저택이 나타나고 앞마당에 큰 종이 있다. 이 저택의 이름이 마나카 이즈나가(Manaca Iznaga)라 하는데, 식민시대 사탕수수 농장주인 이즈나가가 살았다. 지금은 박물관과 레스토랑으로 사용하고 있다. 저택 실내 벽면에는 노예 생활을 엿볼 수 있는 그림이 많이 걸려 있었다.

저택 뒤뜰에는 사탕수수 즙을 짜는 큰 맷돌이 있다. 뒤뜰 한 부분에  돼지 바비큐 파티를 했던 공간이 있는데 농장주의 풍요한 생활을 읽을 수 있었다.   

저택에서 왼쪽에 있는 큰 탑으로 갔다. 7층 건물의 높이는 45m라고 한다. 한 층이 몹시 높다. 계단의 수는 134개이며 엄청 가팔랐다. 좁은 계단이라 관광객이 밀리니 교차하지 못하고 계단마다 위에서 내려오면 올라가고 해서 시간이 많이 걸렸다.

계단을 다 오르니 숨이 얼마간 헐떡였으나 계곡 전망에 가슴이 펑 뚫렸다. 드넓은 분지 계곡에 초록이 한없이 펼쳐있다. 

쿠바의 설탕 산업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3개의 계곡에서 50개가 넘는 사탕수수 분쇄기가 있었고 3 만 명 이상의 노예가 농장에서 일했다고 한다.

1750년 세운 공장단지를 1795년 악랄한 이즈나가가 샀다. 이즈나가는 불법 노예 거래라는 부도덕한 사업을 통해 쿠바 최고 부자로 오른 사업가 가운데 한 명이었다.

우리가 올라온 이 탑은 1816년 지었다고 한다. 앞마당에 있던 종은 원래 이 탑 꼭대기에 달려 있었다. 여기서 울려 퍼지는 종소리는 설탕 농장에서 일하는 노예들의 근무 시작 시간과 종료 시간을 알려 주었다.
또한 종은 노예들에게 하루 세 번, 아침 정오 오후에 거룩한 성모에게 기도해야 할 시간을 알렸다. 노예들은 기도를 하며 참혹한 영혼에 위안을 얻었을까….
화재나 노예가 탈출한 경우에는 요란한 종소리를 경보음으로 사용했다. 
노예를 한 눈에 감시하기 위한 이 탑은 그 당시 쿠바에서 가장 높은 구조물이었다.

이런 전망 좋은 탑에서 농장주의 감시를 받아온 아프리카에서 끌러온 노예는 어떤 생활을 했을까?

18세기 프랑스 대혁명의 밭에서 혁명의 씨앗을 뿌리며 가장 열심히 밭일한 사람은 볼테르였다. 18세기 프랑스 계몽사상의 우두머리 볼테르는 유럽 절대 왕조와 가톨릭교회의 권위를 재기발랄하고 유쾌하게 조롱한 위대한 반역자였다. 볼테르는 적(敵)으로 간주한 제도의 불합리를 웃으며 힘차게 죽이는 방법을 알았다.
“인간이 휘두른 가장 무시무시한 지적 무기는 볼테르 자신의 조롱이었다.”

볼테르는 1759년에 고통스럽게 불합리한 권위를 웃음 터뜨리며 조롱하기 위해 180여 쪽짜리 중편 풍자 소설을 3일 만에 썼는데, 그 책이 캉디드(Candide)다.
아나톨 프랑스는 이렇게 말했다. “볼테르의 손에서는 펜이 달음질을 치며 웃음을 터뜨린다. <캉디드>는 모든 문학 가운데 가장 훌륭한 단편일 것이다.”

'캉디드'는 순진한 청년 캉디드가 유럽,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 여러 나라에서 박해를 받으며 환멸과 곤욕 속에서 방황하는 이야기다. 볼테르는 캉디드의 입을 빌어 당시 유럽 사회가 저지른 식민지배란 깡패 짓의 뿌리 깊은 병폐와 종교 맹신을 신랄하게 고발했다.

운명이 파란만장한 캉디드는 유럽 종교재판을 피해 남미 파라과이로 갔다. “그곳에서는 예수회 신부들이 모든 것을 소유하고 민중에게는 아무 것도 없다. 이것이야말로 이성과 정의의 걸작이다.”
볼테르는 캉디드 입을 빌어 유럽 가톨릭 착취를 반어법적으로 풍자했다.

내가 캉디드를 읽으며 무릎을 탁 친 구절이 몇 개 있는데 그 가운데 노예의 비참함을 묘사한 이 부분이다.

캉디드는 네덜란드 식민지에서 손과 다리가 하나 뿐인 몸뚱이에 넝마를 걸친 흑인을 만났다. 흑인은 노예로서 말했다.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할 때 기계에 손가락이 걸려 손이 잘렸습니다. 우리가 달아나려하자 다리를 잘랐습니다. … 이 때문에 당신들이 유럽에서 설탕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인간 세상에서 누군가가 사치를 누리려면 분명 다른 누군가를 착취해야 한다는 사실을 이보다 더 기막히게 묘사할 수 있을까?
소수가 누리는 사치는 대다수에게 착취한 대가가 아니겠는가?

미국 인구는 세계 인구의 약 4%에 불과하지만 전 세계 석유생산량의 약 25%를 사용한다고 한다.(1990년대 기준) 미국은 석유 수입국 나라 가운데 유가가 가장 싸다.
이런 미국의 석유 에너지 과소비를 상징하는 말이 있다. ‘실내에서 여름에는 긴 팔 옷을 입고, 겨울에는 짧은 팔 옷을 입는다.’ 다시 말해 여름에는 추울 정도로 에어컨을 사용하고 겨울에는 지나치게 더울 정도로 난방을 한다는 말이다.
석유가 풍부한 중동에서, 특히 요즘 남미 베네수엘라에서 끊임없이 분쟁을 일으키는 미국의 행태는 석유를 싼 값에 과소비하기 위한 산유국 길들이기라고 볼 수밖에 없다.

어찌 보면 제국주의란 무시무시한 개념이 아니다. 제국주의란 심오한 사회과학 이론을 알아야 이해할 수 있는 어려운 이념이나 제도가 아니라고 본다.
인류 문명의 역사를 보면 힘 센 자가 사치를 누리려는 욕망으로 힘없는 자를 끊임없이 착취했다. 힘 있는 자의 탐욕과 착취 논리가 바로 제국(帝國)의 주의(主義)가 아닌가.

‘깡디드’는 제국주의 본성을 예리하게 파헤쳤다.

순진한 깡디드는 늙은 현자 마르땡과 여행 도중에 대화를 나눈다.
깡디드가 말했다.
“인간이 옛날에도 오늘날과 같이 서로 살해하여 왔다고 생각하십니까? 인간은 항상 거짓말장이이며, 사기꾼이며, 배신자이며, 배은자이며, 도적이며, 멍텅구리이며, 불량배이며, 욕심장이이며, 주정뱅이이며, 질투가이며, 야심가이며, 잔인하고 중상가이며, 광신자이며, 위선자이며, 그리고 바보였다고 생각하십니까?”
마르땡은 말했다.
“매는 비둘기를 보면 언제나 그것을 잡아 먹었다고 보는가?” 
“물론입니다”라고 깡디드는 대답했다.
“그렇다면” 하고 마르땡은 말했다.
“매는 언제나 같은 성질을 지니고 있는데 어떻게 인간은 그 성질을 고쳤다고 생각하는가?”
"오“하고 깡디드는 말했다.
“그야 다르지요. 그러나 자유 의지란...”'
이렇게 토론을 계속하는 동안 그들은 목적지에 도착했다.

인류 역사에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세계는 매의 성질을 지닌 ‘힘 센’ 중심부 국가와 비둘기의 성질을 지닌 ‘힘없는’ 주변부 국가로 나눌 수 있었다. 매의 집단이 곧 제국이었다.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에는 권력 관계가 발생했고 이른바 제국주의 체제가 성립했다. 제국주의 체제에서 평등 관계는 성립할 수 없었다. 세계는 명령하는 집단과 복종하는 집단으로 나눌 뿐이었다. 
주변부 국가들은 중심부 국가에 복속해 중심부 국가 문화를 모방했다. 문명이 지구상에 발생한 이래로 제국주의는 언제나 존재했다. 

르네상스 시대 이후 유럽은 항해술 발달과 화약 기술을 무기로 유럽 이외의 국가를 주변부로 만들었다.  
인도네시아엔 네덜란드 제국이, 베트남에는 프랑스 제국이. 중동과 인도와 미얀마에는 영국 제국이 있었다. 유럽의 여러 제국들은 아프리카를 갈기갈기 찢어 놓았다. 라틴 아메리카에는 스페인과 포르투갈 제국이 있었다.

유럽에서 보면 극동에 자리 잡고 있는 우리는 유럽의 손길에서는 벗어나 있었지만, 중국 대륙에서 생긴 제국의 영향에서는 벗어날 수 없었다.
고려시대에는 원 제국이, 조선시대에는 명, 청 제국이 있었다. 조선시대를 끝장 낸 세력은 일본 제국이었고 일본 제국을 끝장낸 세력이 미국 제국이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미국이 세계 제국의 역할을 담당했다. 미국에 의미 있는 도전을 할 수 있었던 세력은 겨우 소비에트뿐이었다. 1990년대 초 소비에트마저 붕괴한 후 지금 미국은 인류역사상 최대 제국의 지위를 마음껏 누리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의 승리는 나치 독일이나 군국 일본과 다른 민주주의란 새로운 질서를 가져 오리라는 기대가 있었다.
약자를 지배하려는 속성이 인간의 본능이라는 니체의 관점에서 본다면 미국 제국주의 역시 매가 비둘기를 잡아먹는 본성은 여전했다.  
미국 제국은 식민지를 거느리지는 않았지만 약소국을 무력으로 강제하기도 하고 웃는 얼굴로 평화적으로 대하면서 경제와 문화의 힘으로 복종하게 만들었다.

제2차 세계재전 이후 미국이 표방한 민주주의와 과거 폭력적인 제국주의는 서로 이념이 다른 것처럼 보였다.

미국의 역사를 보자. 남북 전쟁 이후 과잉 생산으로 공산품과 농산물을 국내시장에서 다 소비할 수 없게 되어 새로운 시장을 개척할 필요가 있었다. 개척한 서부를 통해 태평양 연안에 눈을 뜨고 나아가 중남미 지역과 동아시아, 태평양으로 진출했다.
미국 자본가들은 공황과 불경기의 원인을 과잉 생산, 과소 소비로 파악했고 잉여 생산물을 판매할 수 있는 해외 시장 개척에 주력하면서 정경유착을 통해서 적극적으로 제국주의 정책을 실행했다.
미국정책은 산업화를 통해서 새로 형성한 신흥 중산층을 중심으로  시민 계층 안에서 결속력을 강화했다. 정경유착 세력은 노동자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 중산층과 연합하고 노동계층을 분리했다. 이것이 미국식 민주주의다!

오늘날 우리는 미국식 민주주의를 올바른 정치 제도로 맹목적으로 간주하고 무비판적으로 지향하지만 제국주의와 연관성을 생각한다면 미국식 민주주의가 중우정치로 흘러가고 있음을 지나쳐서는 안 된다.

1898년에 미국 상원의원 베버리지는 이렇게 말했다.
"범미국인이여! 우리는 신이 선택한 민족이다. … 세상에 권리와 명예의 좋은 선례를 보여주는 것이 우리에게 달려있다. …우리는 우리의 정기가 펼쳐지고 있는 지역에서 철수할 수 없다. 자유와 문명화를 위해서 그 지역을 구원하는 것은 우리에게 달려있다.“
약 120년 전 오만한 정치인과 지금 천박한 대통령 트럼프와 다른 점이 무엇인가?
120년 전 이 말에서 지금 미국이 한반도를 분단 지속하게 하는 이유를 쉽게 찾을 수 있다.

미국에는 프랭클린 루즈벨트 같이 록펠러를 비롯한 모든 막강 재벌을 해체하고, 제2차 세계대전 후 즉시 식민지 해방과 독립을 약속한 대통령도 있었다.
또한 지미 카터 같은 전직 대통령이 살아 있다. 지미 카터는 평화의 중재자로 수차례 북한을 방문했다. 이 양심적인 미국 전직 대통령은 미국식 정치 질서에 건방지게 대들고 있는 북한 체제를 비방하기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약소국에 저지른 야만을 진정으로 사죄한 전직 대통령이다. 그러면서 이런 말을 남겼다.
“미국은 약소국가를 억압하기에 앞서 스스로 보유한 대량 살상무기를 폐기하는 모범을 보여야 한다.” 지미 카터가 미국의 반성을 축구한 일갈이다.

허나 양면의 얼굴을 지닌 미국 지배는 민주주의가 발전하면서 제국주의도 함께 발전했다.
대내 정책인 민주주의와 대외 정책인 제국주의가 서로 정비례 관계가 있어서, 민주주의가 발전할수록 제국주의도 발전했다. 
오바마 직전 대통령은 미국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했는지는 몰라도,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일본의 재무장을 지지했다. 일본을 위해서는 한일 관계를 개선해야 하는데 그 걸림돌이 되는 위안부 문제를 박근혜 대통령을 통해 일방적으로 한국이 굴복하라고 했다. 또한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사드 배치를 강요했다. 사드 배치 후 우리가 중국에 당한 경제 손실이 얼마나 많은가?

카스트로는 1926년에 태어났다. 1898년 미국은 쿠바를 지배하던 스페인과 전쟁에서 승리했다. 곧이어 미군이 쿠바를 점령했다. 1902년 미군이 철수하고 쿠바는 독립했다. 그 이후 명목상으로는 독립이었지만 미국은 괴뢰 정권을 내세워 쿠바를 식민지 이상으로 예속했다.

카스트로는 자라면서 미국에 예속된 조국의 비참한 현실에 눈을 떴다.
“내 고향 비란(Biran)에서 보았던 많은 가난한 사람들과 배고픈 사람들, 신발도 신지 못한 사람들의 모습을 절대로 내 머릿속에서 지울 수 없습니다. 비란이나 그 주변에서 살던 사람들, 특히 미국이 소유한 큰 제당 공장에서 일한 사람들도 잊을 수 없습니다.”
어린 카스트로가 본 조국의 민중은 캉디드가 파라과이에서 본 손과 다리가 잘린 흑인 노예의 처지와 다를 바가 없었다.

“게으르지도 않고 그렇다고 성질이 고약하지도 않은 사람이 가난하게 산다면, 그곳에는 불의가 있다.” 쿠바 독립의 아버지 호세 마르티의 말씀이다.
나는 쿠바하면 이 금언(金言)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불의에 저항하는 혁명의 당위성을 이 금언보다 더 압축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이 있을까?
카스트로는 일생에서 가장 존경했던 호세 마르티를 가장 잘 따른 후배였다. 명석한 카스트로는 미국 신식민지에 허덕이는 조국에 혁명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호세 마르티 동상 앞의 카스트로

1955년 7월 체 게바라는 여행을 하던 중에 혁명을 준비하던 카스트로를 멕시코에서 운명적으로 만났다. 체 게바라는 처음부터 이렇게 웅변조로 이야기하는 카스트로에게 단박에 매료당했다.
"혁명이 경제를 파탄시킨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이렇게 대답하겠다.
토지가 없는 농민들에게는 경제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일자리가 없는 수백만의 쿠바인들에게는 경제가 존재하지 않는다.
철도 인부와 항만 노동자, 직물공장 노동자, 버스 운전수, 바티스타가 급료를 깍은 여러 분야의 노동자에게는 경제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멕시코에서 망명 중인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는 쿠바 혁명을 준비하다가 수상하게 여긴 멕시코 경찰에게 체포되어 구치소에 구금당했다. 아마 구치소에서 나오기 직전의 이 모습이 피델과 체가 같이 찍은 최초의 사진이 아닐까?

카스트로는 체 게바라와 함께 마에스트라 산맥에서 게릴라 활동이 성공한 비결을 이렇게 말했다.
“농민은 우리가 그들을 존중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농민의 것을 하나도 훔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혁명 세력이 가난한 농민을 착취하지 않으니 농민은 혁명 세력을 적극 지지했다.

마에스트라 산맥에서 게릴라 활동을 하던 때의 피델과 체.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는 혁명 정부의 첫 번째 의무가 무엇인지를 재빨리 파악했다.
“예전의 노예들은 자본주의자 소유물이었기 때문에, 그나마 동물처럼 보살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미국 지배 아래의) 자유노동자가 된 그들의 건강을 보살펴주고 먹을 것을 줄 사람은 없었습니다.”

미국은 카스트로의 혁명 쿠바가 가난하다고 비난했다.
2000년 77개국이 참여한 '남반구 정상회의'에서 카스트로는 이렇게 연설했다. 
"세계경제 질서는 20%의 사람들을 위해서는 잘 작동하고 있지만, 나머지 80%의 사람들을 무시하고 비하하고, 품위를 떨어뜨리고 있습니다.“
이는 미국 신자유주의 경제에 꼼짝 없이 편입한 우리나라 사정과 다를 바가 무엇인가.

나는 잉헤니오스 마을을 떠나며 부자 나라 미국과 가난한 나라 쿠바를 비교하면서 삶과 도덕의 질을 따져 보았다.

누구의 삶과 도덕이 더 바람직한가?   

사족;
나는 반미주의자가 아니다. 미국만이 나쁜 나라라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인류 역사에서 힘 가진 나라치고 힘없는 나라를 못살게 굴지 않은 나라가 없었다.
미국도 예외가 아닐 뿐이다.

미국을 상징하는 육식성 조류인 매과의 독수리. 호전적인 눈매가 미국의 속성을 잘 나타내고 있다.

지금 경제력과 군사력이 무섭게 성장하는 중국이 앞으로 세계 제국의 역할을 한다면? 천박하게 끔찍할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미국이 지닌 과학 기술의 도움 없이 인류가 현대 문명을 누리기는 힘들다고 나는 본다. 인터넷, 스마트폰 등 지구촌 일상생활을 지배하는 첨단 도구는 미국의 과학 기술 덕분이 아니겠는가.
문제는 지금 미국이 인류역사상 가장 강대한 제국이라는 데 있다. 미국 일부 집단인 군산복합체의 탐욕이 너무나 강렬하여 한반도는 물론 전 세계에 나쁜 짓을 독점으로 저지르기 때문이다.

2002년 5월 지미 카터가 쿠바 혁명이후 미국 전현직 대통령으로서 최초로 쿠바를 방문했다. 반미제국주의자 카스트로는 이 양심적인 미국 정치인에게 정중한 예의를 차렸다.

지금 미국이 강요하는 제국주의 논리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우리 운명의 실존이 우리 어깨를 너무나 짓누르고 있지 않은가.
미국은 왜 한반도 분단을 즐기고, 왜 통일을 가로막는가?


송필경  spk5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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