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치의학 120년] 식민기 '한국인 치과의사단체' 결성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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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치의학 120년] 식민기 '한국인 치과의사단체' 결성되다.
  • 이주연
  • 승인 2006.09.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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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한국인 치과의사단체가 결성된 것은 1920년대 중반이었다. 경성치과의학교가 졸업생들을 배출하기 시작하자 한국인만의 모임이 자생적으로 생겨나기 시작했다.


서울에 결성된 한성치과의사회(1925)는 경성치과의학교 1회 졸업생들을 주축으로 일본치과대학졸업자, 검정고시 합격자가 함께 모였다. 발기인은 함석태, 안종서, 김용진, 최영식, 박준영, 김연권, 조동흠으로 회장은 함석태가 맡았다.

이들은 한국인 치과의사로써 겪어야 했던 민족적‧ 직업적 애로사항을 극복해나가는데 뜻을 모았다. 학창시절부터 겪어야 했던 민족적 차별은 치과의사가 된 후에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다.

처음엔 매주 모여 친목을 도모하고 임상토론을 통해 치의학 지식을 서로 교류하는데서 시작하였다.

회원수가 점차 증가하자, 한성치과회는 회의 목적을 ‘구강위생계몽, 학술연구, 회원복리’로 정하고 ‘각 부서’별 체계를 확립하여 활동 영역을 확장하였다.


평양에도 한국인 치과의사회가 창립(한동찬,1920)되었다. 당시 평양은 민족 기업이 두루 성장하여 물산장려운동등의 민족운동을 주도하던 도시였다. 한국인 치과개원도 빠르게 증가하여 20년대 중반(1926-)부터는 한국인치과의사수가 일본인보다 많아졌다.


그러나 이들 두 단체의 활동방향은 식민체계의 극복보다는 직업적 역량를 강화하는 쪽으로 수렴되어 갔다. 당시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 치과의사들은 조선치과의사회를 설립(1921)하여 활동하고 있었다.

조선치과의사회는 금 및 기자재배급과 치과의학회 개최, ‘호치(晧齒)일’(1926.5.4-)등의 구강보건계몽사업을 주 업무로 하고 있었다..

한국인 치과의사들도 조선치과의사회 회원으로 기자재를 배급받고 학회등에 참여하였으나 여러모로 소외되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치과의사회 역시 치과의사들의 가입을 강제하거나 대외적인 행정력을 지닐 수 없는 임의단체일 뿐이었다.

따라서 조선치과의사회는 법정치과의사회 승격을 목표로 숫적 확산을 위해 적극적으로 한국인 치과의사회를 끌어들이려 하고 있었다. 이에. 평양치과의사회는 뜻을 같이해 일본인과 임원을 교대하는 조건으로 모임을 통합하였다.(1928). 한성치과의사회는 독자적으로 회를 유지하면서 각종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자체 임상토론을 통해 서로를 격려하면서, 조선치과의학회의 임원으로 활동하기도 하고 연제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조선인 구강보건계몽을 위한 신문투고와 방송출연에도 적극적이었다.

그러나, 한성치과의사회 자체 회보나 학회지발간, 한국인 구강검진등의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즉 한성치과의사회는 정치적 항거에 소극적이었고, 자기 완결적인 회운영을 하기에도 역부족이었다. 결국 한성치과의사회도 일제에 의해 강제해산되면서 조선연합치과의사회에 가맹하게 되었다(1935)...


이와 같이 식민기 최초로 결성된 한국인 치과의사단체들은 국민구강보건계몽과 자체 학술 및 직업적 역량 강화에 힘썼다.

이들은 비록 식민 상황속에서 일본인 주도 치과의사회에 흡수되는 통과의례를 거쳐야 했으나, 장차 한국 치과계를 이끌어갈 치과의사회의 모체가 된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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