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쿠바 여행기 『왜 체 게바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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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쿠바 여행기 『왜 체 게바라인가?』
  • 송필경
  • 승인 2019.06.28 15: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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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20세기 혁명의 돈키호테가 탄생한 산타클라라(Santa Clara)

어처구니없는 몽상만 하는 사나이가 있었다. 이 사나이 마음속에는 세상을 역경에서 구하려는 황홀한 상상력이 가득 차 있었다. 마침내 사나이는 결단하여 세상에 나가 자신이 행동해야 할 의무와 목표를 정했다.

『일단 마음을 먹자 이제 더는 생각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쳐부수어야 할 부조리, 바로 잡아야 할 부정, 고쳐야 할 비리, 제거해야 할 폐해, 처리해야 할 부채가 산더미같이 쌓여 있어 자신이 지체할수록 그만큼 세상이 받는 손실이 크다는 생각에 사나이 마음은 조급했다.』

어느 날 동이 트지 않는 새벽에, 사나이는 엉성한 투구와 갑옷을 입고 창과 방패를 들고 말라비틀어진 말 로시난테에 올라탔다.

인류문학사에서 가장 위대한 소설 주인공으로 4백여 년 동안 인류에게 너무도 사랑을 많이 받아 누구에게도 친근한 이 사나이 이름은 돈키호테다.

피카소가 그린 돈키호테 (제공 = 송필경)

1956년 12월 2일, 20인승 요트에 돈키호테 무리 82명이 무기와 의약품을 가득 싣고 멕시코를 떠나 쿠바에 도착했다. 엔진 고장과 폭우로 로시난테 같은 배 그란마 호는 목표 지점 산티아고 데 쿠바가 아닌 남동부해안에 좌초했다. 좌초한 배에서 바닷물에 젖은 무기와 의약품을 버리고 겨우 총 한 자루씩만 들고 라스콜로라다스(Las Coloradas)라는 진흙투성이 늪지대에 상륙했다.

그란마 호는 엉뚱한데 좌초해서 돈키호테들은 총 한 자루만 들고 상륙했다. (제공 = 송필경)

 
산티아고 데 쿠바 인근에 위치해 있던 미국 영사관의 한 주재원은 이곳의 황량한 지형을 감안해서 이렇게 판단했다.
 "이 지역에 주둔하는 정부군을 쓰러뜨릴 만큼 충분한 수의 반란군과 군사 장비가 상륙하는 일은 전술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다.“

12월 5일에 숨을 곳을 찾던 중 정부군의 대규모 기습에 혼비백산 도망친 돈키호테들은 16명만 살아남아 험준한 마에스트라 산맥에 기어올랐다. 기껏 소총 7자루만 갖고 앞으로 4만여 명의 정부군과 싸워야 했다. 그럼에도 이 남루한 무리들은 돈키호테답게 인류 역사에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혁명 전투를 시작했다.

1957년, 마에스타라 산맥 게릴라 기지에서 피델은 동료들에게 전략을 설명하고 있다. 좌로부터 체, 피델, 가르시아, 발데스 그리고 알메이다. (제공 = 송필경)

 

"혁명에 이익집단의 도움을 받는다면 권력을 차지하기도 전에 그 혁명은 부정부패로 물들 것이다. 혁명을 만천하에 공언한다면 반드시, 공공연하게 평화를 말하면서 은밀하게 음모를 꾸미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결실을 얻게 될 것이다."

돈키호테들의 우두머리인 피델 카스트로의 혁명 전략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역사에 기대었다. 반란의 역사와 매우 친근한 쿠바 민중은 사도(使徒)로 추앙한 국부 호세 마르티의 후배로 자처한 돈키호테의 등장에 열광하며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정부군이 수적으로 우세했지만 전투에 진심으로 임하는 군인이 거의 없었고 미국 마피아의 앞잡이 바티스타는 그런 오합지졸들을 그저 앞으로 몰아붙이기만 했다.

1975년 3월 북베트남이 통일 전쟁을 선포하자 남베트남 병사들은 군화를 벗고 줄행랑을 쳤다. 도덕이 없는 군대의 상징적인 모습이다. (제공 = 송필경)

 

돈키호테 무리 가운데 후세 역사에 길이 남을 상징 인물은 체 게바라와 피델 카스트로였다. 체는 피델의 혁명 명분에 적극 공감하며 혁명 대의에 성실하게  따랐다.

피델의 천재적인 전술과 체의 창조적인 영민함이 공명했다. 이제 막 수염이 나기 시작한 청년들이 험한 마에스트라 산맥 혁명 기지에 자발적으로 들어왔다. 압제와 착취에 몹시 시달린 농부들은 이들 무리의 거처를 마련하고 먹을 것과 물자를 공급했다. 

돈키호테들이 승승장구 할 수밖에 없었다.

혁명 전투를 시작한 지 2년하고 한 달쯤인 1958년 12월 말, 남루한 무리들은 쿠바 섬 중앙에 위치해서 군사 핵심 기지 역할을 하는 산타클라라를 점령하고자 했다. 이 무리들에게 잔인한 전망을 한 미국 영사관 주재원을 비웃듯이 말이다.

돈키호테들이 산타클라라를 점령한다면 혁명 횃불에 승리의 불꽃을 활활 타오르게 점화하는 격이었다.

우리 쿠바 탐방단 일행은 잉헤니오스 계곡을 출발하여 체 게바라의 흔적과 유산이 살아있는 내륙 도시 산타클라라로 향했다. 약 120km 거리에 2시간가량 걸렸다. 이 도시는 아바나에서 는 약 240km 떨어져 있다.

산타클라라에 들어서자 여기저기서 체 게바라의 형상을 발견할 수 있었다. 가정집 현관문 위 벽면에서, 티셔츠와 모자를 파는 가게에서, 온통 체 게바라의 모습이다.

(제공 = 송필경)

1953년 7월 26일 몬카다 병영을 습격하다 실패하고 도망 다니던 피델은 8월 1일 체포됐다. 15년 형을 선고받은 피델은 1955년 5월 사면으로 석방되어 7월 멕시코로 망명했다.

몬카다 병영을 습격한 지 딱 2년 째 되는 7월 26일 저녁, 피델은 멕시코에 머물던 체를 처음 만났다. 둘은 다음날 새벽까지 10시간가량 대화했다.

체는 피델이 갖고 있던 혁명에 대한 낙관적인 ‘계획과 결의’에 깊이 감명을 받았다. 피델은 조국에서 쫓겨난 처지에 신세타령을 하지 않고 망명지 멕시코를 떠나 다시 조국 쿠바에 돌아가려 치밀한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피델이 여기서 떠난다면 쿠바를 향할 것이고, 쿠바에 도착한다면 싸울 것이고, 싸우기 시작한다면 이길 것이라는 확고한 신념”을 체는 피델에게서 읽었다.

“우는 소리 그만하고 맞서 싸워야 한다”는 의지를 체가 받아들인 피델의 요점이었다.

피델은 체와 첫 만남에서 아르헨티나의 돈키호테를 신뢰했다. 피델은 체의 신념 어린 말에서 체의 가치와 능력을 높이 사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었다.

20세기 두 걸출한 돈키호테는 첫 만남에서 의기투합했다.

멕시코에서 혁명을 준비하는 피델 일행은 수상히 여긴 멕시코 경찰에게 연행된다. 구치소에 있다가 풀려나는 피델과 체. (제공 = 송필경)

 

의사인 체는 군의관으로서 보다도 전투원으로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그럼에도 피델은 전투 기간 내내 유독 체에게만 심하게 굴었다. 미운 놈에게는 떡 하나 더 준다는 말의 뜻을 뒤집어 보면 진정 신뢰하는 자에게는 끊임없이 충고를 한다는 뜻과 다름이 아니다. 피델은 잔소리를 해도 체가 다른 동료들 보다 자신을 더 잘 이해해 줄 것이라고 믿었다.

미국 마피아 앞잡이에 불과한 바티스타 정권의 주구인 정부군은 계속 무너졌다. 마을을 게릴라 혁명군이 점령하면 주민들은 열광적으로 혁명군을 맞이했다.

혁명군을 맞이한 민중들은 붉은 색과 검은 색 바탕에 M-26-7 글자를 새긴 완장을 차고 있었다. ‘M-26-7(7-26 운동)’이란 1953년 7월 26일 카스트로 일행이 정부군 요새인 몬카다 병영을 습격한 날을 기념하는 상징이다. 우리 ‘518 광주’에 해당한다 할까?

1958년 12월 26일, 피델 카스트로는 전투의 궁극 목표인 아바나 공격을 준비하라는 명령을 체 게바라에게 내렸다. 수도 아바나로 들어가는 최종 길목은 산타클라라였다.

인구 15만 명의 산타클라라는 쿠바 섬 중앙에 위치해 운송과 통신 중심 도시였다.

바티스타는 산타클라라 사수에 마지막 희망을 걸었다. 산타클라라 수비대에 병사 2천 명을 충원해 총 3천 5백 명 규모로 늘렸다. 바티스타는 수비대를 지원하기 위해 장갑열차에 무기와 탄약 그리고 통신장비를 가득 실어 보냈다.

그러면서도 바티스타는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별로 없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바티스타는 도박 같은 기대를 하지 않았다. 크리스마스 동안 바티스타는 자신이 선택한 장교들, 친구들 그리고 가족을 피신시킬 비행기 여러 대를 대기하게 했다. 바티스타는 자식들을 먼저 미국으로 보냈다.

12월 27일 밤, 체 게바라는 340명의 전사를 이끌고 병력 수가 10배 이상이며 탱크와 전투기의 지원을 받는 정부군을 공격할 준비를 했다.

12월 28일 새벽, 체의 부대는 산타클라라에 잠입했다. 체의 부대를 안내할 ‘롤리타 로세이’란 여성은 게릴라들이 너무나 ‘지저분하고 엉망’이어서 깜짝 놀랐다. 롤리타 옆에 서있던 롤리타 아버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이 사람들이 산타클라라를 점령할 계획이란 말인가?”
아마 형편없는 갑옷에 비쩍 마른 로시난테를 탄 돈키호테를 연상했으리라.

그때 체를 처음 본 롤리타는 체가 정말 젊어 보일 뿐 아니라 뚜렷한 권위가 배어 있어 더욱 놀랐다. 전투에 지친 표정의 부하 한 명이 도시에 군인이 얼마나 있느냐고 롤리타에게 물어보았을 때 체의 인상이 더욱 강했다. 롤리타가 ‘5천 명 정도’ 라고 대답하자 그 부하가 고개를 끄떡이며 말했다. “좋습니다. 우리 헤페라면 문제없습니다.”

헤페(jefe)는 우두머리라는 스페인 말이다. 즉 우리 헤페란 체를 말했다.

체가 도시를 따라 걸을 때 무선 전신국에 잠깐 들러 민간인들에게 지원을 호소하는 방송을 했다. 방송하자마자 B-26 폭격기들과 새로 들어온 영국제 전투기 시퓨리어들이 체의 전사들을 찾아서 도시 외곽에 기총 소사와 폭격을 퍼부었다.

산타클라라 시내를 걷는 체 게바라 (제공 = 송필경)

정부군은 도시 주요 지역 곳곳 요새에 있었지만 체의 체 우선 목표는 산타클라라 도로 입구에 정차한 화물차를 개조한 장갑열차였다.

산타클라라 인근 대부분이 혁명군이 장악했다. 체는 우선 서쪽의 아바나-마탄사스 간 도로에서 진입하는 정부군의 증원을 막아야 했다.

12월 28일 밤부터 12월 29일 오전까지 체는 도심으로 전진하며 정부군이 자리 잡은 모든 위치를 목표로 삼았고, 특히 장갑열차에 집중했다.

체는 불도저로 철로의 일부를 들어 올렸다. 그런 다음 체의 부하들이 경찰서와 군 요새 그리고 장갑열차를 공격했다.

당시의 불도저를 야외 열차박물관 입구에 전시하고 있다. (제공 = 송필경)

혁명군이 도심으로 전진하자 산타클라라는 피의 전장이 되었다. 어떤 지역에서는 전사들이 가옥의 내벽을 뚫어 가면서 전진했고 다른 곳에서는 거리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수많은 민간인들이 같이 무기를 들자는 체의 호소에 호응하여 화염병을 만들고 피난처와 식량을 제공했으며 거리에 바리게이트를 쳤다. 그러나 탱크들은 포탄을 쏘고 전투기들은 역시 폭탄과 로켓탄 폭격을 펼쳤기 때문에 민간인과 혁명군 사상자들이 병원에 쌓이기 시작했다.

체가 어느 병원에 찾아갔을 때 죽어가던 한 남자가 체의 팔을 건드리더니 이렇게 말했다.

『“저를 기억하십니까, 사령관? 레메디오스에서 제 무기를 직접 찾으라며 내보내셨지요. … 그래서 저는 당신의 말 그대로 여기서 직접 무기를 구입했습니다.”
체는 그를 알아보았다. 며칠 전 실수로 총을 쏘아 무장 해제당한 어린 전사였다. 그때 자신이 어린 전사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체는 여러 해 지난 후 전쟁 회고록에 이렇게 적었다.
“나는 언제나 쌀쌀하게 말했다. ‘네가 책임을 다할 수 있다면 … 무장 없이 전선에 나가서 쓸 총을 직접 구해 와라.’ 어린 전사는 분명히 그렇게 했고, 결국 치명적인 결과를 맞이했다.
그는 몇 분 뒤에 숨을 거두었다. 나는 그가 자기 용기를 증명한 것에 만족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바로 우리 혁명군이었다.』

산타클라라 시내에 들어오는 혁명군 (제공 = 송필경)

12월 29일 오후에 흐름은 완전히 바뀌었다. 혁명군이 기차역을 점령하고 정부군 요새로 돌격을 하자 요새의 정부군은 장갑열차를 지키려고 달아났다. 총 22량 짜리 장갑열차가 속도를 내서 움직이며 도망쳤다. 그러나 철로를 불도저로 파괴한 지점에 다다르자 기관차와 앞쪽 차량 세량이 탈선하면서 구겨진 철판과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로 아수라장을 이뤘다.

탈선한 기차 (제공 = 송필경)

 

체는 이렇게 적었다.

“무척 흥미로운 전투를 벌였다. 화염병 공격에 군인들이 열차에서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다. … 곳곳에서 휘발유가 불타는 화염병을 던지는 사람들이 장갑열차를 포위했다. 철판으로 무장한 장갑열차는 순식간에 대형 화덕으로 변해 버렸다. 몇 시간 내에 전원이 22개 차량과 대공포, 기관총 …어마어마한 양의 탄약(물론 우리의 약소한 분량에 비했을 때 어마어마하다는 뜻이다)을 가지고 항복했다.”

열차에서 노획한 무기들 (제공 = 송필경)

여전히 산타클라라 곳곳에서 전투가 진행되는 가운데 국제 전신회사들이 그 날 저녁에 체가 죽었다고 오보했다. 그러나 그 다음 날 일찍 라디오 레벨데가 장갑열차를 빼앗았다는 소식을 떠들썩하게 전하면서 체의 죽음을 부인했다.

“남미에 있는 친척들과 쿠바 민중의 마음의 평화를 위해서 우리는 에르네스트 체 게바라가 멀쩡히 살아 전선에서 싸우고 있음을 알리며, … 얼마 안 가서 그가 산타클라라를 점령할 것임을 알린다.”

전투에 가장 앞장선 엘리트 공격 부대를 ‘결사대’로 불렀다. 체는 이렇게 적었다.

“결사대는 혁명 군단 사기의 모범이었고 선별된 지원자만 들어갈 수 있었다. 한 명이 죽을 때마다-전투 때마다 대원이 죽었다-새로운 후보자가 거명되면 선택받지 못한 자는 슬픔에 빠졌고 심지어 울기도 했다. 고귀하고 숙련된 전사들이 전선 맨 앞에 서서 죽음을 맞이하는 영예를 갖지 못했다는 이유로 절망의 울음을 터뜨려서 아직 미숙한 젊음을 드러내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얼마나 진기한 일인가.“

장갑열차를 탈선시킨 결사대 리더 (제공 = 송필경)

12월 30일, 산타클라라 주위 정부군 주요 수비대들이 혁명군에 항복했다.

장갑열차를 노획하자 산타클라라는 완전 고립했다. 일부 수비대와 경찰서의 저항은 여전했다. 한 무리가 도심 그란 호텔 10층에 숨어서 반군을 저격하고 있었다.

체는 이제 상당량의 화력과 새로운 병력을 추가로 확보했다. 장갑열차에서 노획한 무기는 정말로 막대했다. 소총 6백정, 탄약 1백만 발, 다수의 기관총, 20mm 대포 한 문, 그리고 소중한 박격포와 바주카포들도 있었다.

12월 31일 하루 종일, 정부군의 보루가 하나씩 하나씩 반군의 손에 무너졌다. 처음에는 경찰서가 함락되었고, 그 다음에는 임시 정부 본부가, 다음으로는 법원과 감옥이 무너졌다. 감옥에서 달아난 죄수들 때문에 도시는 더욱 큰 혼란에 빠졌다.

날이 저물 때쯤에는 극히 일부 수비대와 그란 호텔의 저격수들만 버티고 있었다.

체에게 장갑열차를 빼앗긴 사태는 아바나의 정부군 본부인 캠프 콜롬비아에 마지막 경종을 울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전국에서 정부군이 연달아 반군에 항복하자 바티스타는 도피 계획을 더욱더 서둘렀다. 바티스타는 시간을 벌고 싶었다. 12월 31일 오후가 되자 바티스타의 희망은 정부군이 산타클라라에서 얼마나 버티느냐에 달려 있었다. 저녁 10시에 실날같은 희망이 사라지자 바티스타는 이제 쿠바를 떠날 때가 왔음을 깨달았다.

바티스타는 캠프 콜롬비아에서 열린 고위 장교들과 그 가족들을 위한 신년 파티에 참가했다. 바티스타는 파티장에서 대통령직을 포기하겠다고 말했다.

바티스타는 나이가 제일 많은 대법원 판사를 새로운 대통령으로 지명한 다음 아내와 측근과 그 가족들과 함께 근처 군사 공항으로 차타고 가서 대기하고 있던 비행기에 올랐다.

1959년 1월 1일 새벽이 밝기 전 어둠 속에서 바티스타는 가장 가까운 친구들 40명과 함께 비행기를 타고 도미니카 공화국으로 향했다.

이때 바티스타의 형제이자 아바나 시장이었던 판친과 정부 및 경찰 관료 수십여 명을 태운 비행기가 한 대 더 떴다.

또한 준군사단체 폭력배 두목 롤란도 마스페레르와 유태계 미국인 마피아 두목 메이어 랜스키도 함께 쿠바에서 도망쳤다.

산타클라라에 아침이 밝아 올 때 바티스타가 달아났다는 소문이 돌았다. 마지막 수비대가 항복을 했고 그란 호텔의 저격수들은 포위되었다.

오전 수비대장이 평화 협정을 요청했다. 체는 확고한 태도로 무조건적인 항복 외에는 아무것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그란 호텔의 저격수들은 탄약이 떨어지자 항복했다. 저격수는 치바토(비밀정보원) 다섯 명과 경찰 네 명이었다. 2시에 간단한 약식 재판이 열고는 치바토 5명을 처형했다.

민간인으로 변장한 정부군 수비대장 카시야스도 멀리 달아나지 못했다. 밀짚모자를 쓰고 ‘7- 26 운동’ 완장으로 위장한 카시아스가 곧 혁명군에 잡혔다. 카시아스는 혁명군 대장에게 ‘위대한 전략가’로 칭송하면서 목숨을 구걸했다. 혁명군 대장 보르돈이 카시아스 말을 잘랐다.

“아첨을 그만 두라. 이제부터 쿠바인의 문제를 해결할 사람은 피델 카스트로가 될 것이므로 어떤 임시정부도 필요 없다.”

이제 카시아스에게 산타클라라로 가서 체에게 보여 주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카시아스는 순식간에 안색이 바뀌더니 다른 헤페에게 데려갈 수는 없냐고 부탁했다.
끌려온 카시아스를 본 체는 이렇게 말했다. “아! 당신이 헤수스 메넌데스를 죽인 자이로군.”
카시아스는 하루를 넘기지 못했다. 카시아스는 과거에 저지른 소름 끼치는 잔학행위들에 대한 약식 혁명 재판을 받고 총살당했다.

이제 수비대 전체는 무장 해제한 뒤 거리로 나가 반군과 합류했다. 도시 전역에서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마침내 산타클라라를 함락했다.

그러나 체는 아직 승리를 축하하지 않았다. 질서를 회복해야 했고 바티스타 앞잡이들과 치바토들을 재판해야 했으며 병력을 집결해야 했다.

아르헨티나 출신 의사 에르네스트 게바라 데 라 세르나도(Ernesto Guevara de la serna)가 쿠바혁명 역사에서 최초로 의미 있게 등장한 곳이 지금의 화물열차박물관(모누멘토 아 라 토마 델 트렌 블린다도; Monumento a la Toma del Tren Blindado)이었으며, 우리 일행은 산타클라라에서 여기를 가장 먼저 찾았다.

당시의 열차를 야외에 전시하면서 박물관으로 이용하고 있다. (제공 = 송필경)

1958년 12월 29일, 아르헨티나 출신 돈키호테는 이 작은 화물열차박물관에서 쿠바 혁명 횃불에 승리를 점화했다. 체는 18구경 소총을 휘두르며, 갓 10대를 벗어난 혁명가 일당과 함께 불도저로 철로를 끊고, 탈선한 무장 열차에 화염병을 던졌다. 

90분 이어진 전투는 완고했던 바티스타 독재 정권을 끝장내고 앞으로 50년간의 피델 카스트로 체제가 시작하는 서막을 올렸다.

피델 카스트로의 무수한 주먹에 비틀거린 골리앗 바티스타에 마지막 결정적 KO 주먹을 날린 다윗은 체 게바라였다.

기차가 탈선하자 중무장한 정부 병력 350명이 튀어나온 바로 그 지점을 우리는 찾아갔다. 당시 게바라가 몰던 불도저는 입구 대좌 위에 올려 있다. 탈선한 열차를 복원하여 열차 실내는 사진과 유품을 전시했다.

열차 실내 (제공 = 송필경)

승리의 공간, 그 자랑스런 공간을 둘러보며 한편 못내 아쉬운 감정이 북받쳤다. 우리 남한 현대사에는 왜 이런 공간이 없을까 하는 그런 아쉬움이었다.

그나마 ‘518 광주’ 저항군 사수대가 장엄한 최후를 맞은 옛 전남도청 별관을 왜 원형대로 고스란히 보존하지 않는가?

여러 이유로 ‘518의 성지’ 전남도청을 우리는 온전히 보존하지 않았다. 우리의 역사 인식 수준이 안타까울 뿐이다. (제공 = 송필경)

이곳을 관람한 다음 여기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산타클라라 도심에 자리 잡은 비달 공원으로 갔다. 비달 공원에 있는 그란 호텔 건물 외벽에는 산타클라라 전투 당시의 마지막 총탄 흔적이 지금까지도 선명하게 남아 그날의 전투를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었다.

산타클라라 도심의 비달 공원 서쪽에 있는 그란 호텔. 외관 벽을 자세히 보면 무수한 총알 자국이 있다. (제공 = 송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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