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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랏말싸미』 세종대왕께 큰 절 올립니다영화 역사에 말을 걸다- 아홉 번째 이야기
박준영 | 승인 2019.07.26 11:35

크로스컬처 박준영 대표는 성균관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국대 대학원에서 영화를 전공했다. 언론과 방송계에서 밥을 먹고 살다가 지금은 역사콘텐츠로 쓰고 말하고 있다. 『나의 한국사 편력기』 와 『영화, 한국사에 말을 걸다』 등의 책을 냈다. 앞으로 매달 1회 영화나 드라마 속 역사 이야기들을 본지에 풀어낼 계획이다.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 편집자 주

아직 국가의 목표가 부국강병이었던 조선 초기, 세종이 새로운 문자 창조의 뜻을 품지 않았더라면 우리에게 한글을 만들 기회는 이후 역사의 행로로 보건데 영영 주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카톡 하나 문자 한 줄 보내기에 지금보다 훨씬 많은 수고를 해야 했을 거다. 어찌 세종대왕께 큰 절 한 번 올리지 못 하겠는가?

(출처 네이버영화)

영화 『나랏말싸미』는 세종의 지난한 한글 창제의 숨은 이야기를 팩션으로 엮었다. 한글 창제를 시작하고 맺었던 왕 세종(송강호), 세종과 뜻을 합쳐 한글을 만든 스님 신미(박해일), 그리고 세종의 뜻을 품어준 여장부 소헌왕후(故전미선). 이렇게 모여 한글을 창제했다는 역사 속 가설을 소재로 영화 『나랏말싸미』는 만들어졌다.

광화문광장에서 이순신 장군 상(像)과 함께 대한민국의 모든 집회와 시위를 지켜보고 있는, 우리 역사 상 가장 위대한 성군으로 칭송돼온 세종은 이미 여러 번 드라마, 영화로 만들어졌다. 최근 방영된 기억나는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에서는 한석규가 세종으로 열연해 그의 애민정신과 한글 창제의 곡진한 사연을 밀도 있고 재미있게 보여줬다. 이번 영화는 역시 한글창제 그 자체에 집중한다.

한글을 만든 사람은 누구일까? 세 가지 설이 존재한다. 세종의 단독 작품이라는 주장이 그 하나다. 기득권 사대부들은 아다시피 자신의 권력과 지위를 위협하는 백성들의 어떠한 시도도 용납하지 않았다. 문자를 읽고 해석하는 것은 곧바로 기존 권위에 대한 도전을 불러온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영화 내내 고위 대신과 사대부는 한글 반포를 극렬 반대한다. 이 와중에 세종이 누구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단 말인가? 혼자 끙끙 앓고 만들어낼 수밖에 없었을 거라는 의견.

두 번째 설은 집현전과 합작설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한국 현대사의 대형 사건 하나가 기시감처럼 떠올랐다. 바로 김영삼 대통령 시절에 전격적으로 발표한 ‘금융실명제 실시’가 그것이다. 당시 경제부총리조차도 신문을 보고 알았다며 상황의 절박함은 이해하지만 못내 서운해 했다는 후일담이 전해졌다. 세종 역시 대신들의 반대를 돌파하기 위해선 소수정예의 집현전 학자들과 결합해 비밀리에 이 일을 해 냈을 거라는 추측이다.

마지막 설은 바로 영화 『나랏말싸미』의 이야기로 만들어진 신미스님과 소헌왕후의 조력으로 한글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주장이다. 사실 이 설은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가장 소수의견이다. 

(출처 네이버영화)

세종은 중국을 넘고 싶었다. 사대를 목숨처럼 여기는 신하들이 못내 못마땅했다. 세종이 명나라에서 하사(?)한 옷을 갈기갈기 찟어 울분을 해소하는 씬은, 그래서 영화에 나온다. 세종은 결국 독자적인 문자를 만들고자 결심한다.

신미스님이 물었다. “왜 새로운 문자를 만드시려 합니까?”

그의 답은 명쾌했다. “망하지 않으려고……”

고려말 소수 권력층의 독점이 한 왕조를 끝장내버린 역사의 교훈을 세종은 잘 알고 있었다. 지식의 독점, 문자 사용의 기득권이 결국 조선도 망하게 할 거라는 예지였다. 그래서 먹고살기 바쁜 백성들에게 쉽고 간단한 문자를 만들어줘 세상의 모든 지식을 백성들에게 나눠주고 싶은 것은 애민사상의 발로였다.

그러나 신박한 문자를 창조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소리 문자인 산스크리트어와 티베트어, 파스파 문자 등을 연구해 형태음운론적이고 과학적인 문자를 마침내 만들어냈다. 스물여덟 자모음으로 가장 많은 소리를 낼 수 있는 한글은 지구상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문자였다.

당시의 조선은 개국한지 50년이 채 되지 않은 시점이다. 아직도 어수선하다. 조선은 왕권과 신권의 끊임없는 밀당과 갈등으로 점철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오죽했으면 ‘한 나라의 임금이 할 수 있는 일이 이다지도 없단 말인가?’ 하는 푸념을 조선의 국왕들이 입에 달고 살았겠는가.

성리학에 입각한 건국이념은 고스란히 사대부에게 뿌리 깊은 유산으로 전해졌다. 조선은 유자(儒子)의 나라임을 영화 속 세종도 입만 열면 말하지 않던가? 그래서 이들과의 신경전이 영화의 전반을 지배한다. 또한 타락한 불교로 고려가 망했다고 생각했기에 조선초의 숭유억불(崇儒抑佛)정책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출처 네이버영화)

사면초가인 세종을 도와준 인물이 등장한다. 바로 신미 스님이다. 세종은 죽기 전 유언으로 신미 스님에게 ‘우국이세 혜각존자’(나라를 위하고 세상을 이롭게 한, 지혜를 깨우쳐 반열에 오른 분)란 법호를 내렸고, 이에서 추측해 신미 스님의 한글창제 조력설은 더욱 힘을 받게 된다.

사실 신미 스님은 역적의 자식이었다. 거기에 스님이라니? 세종은 조정의 거센 반대에도 신미 스님의 능력을 믿어주었고, 심지어 그가 일을 도와주는 조건으로 내 건 ‘사대문 안에 사찰을 지어줄 것’을 약속한다. 큰 목표를 이루기 위해선 사소한 차이나 정치적 다름이 있어도 특유의 뚝심으로 밀어 붙혔다.

『나랏말싸미』의 조철현 감독은 이준익 사단의 핵심적인 인물이다. 그간 『황산벌』과 『평양성』,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사도』의 각본가로 잘 알려져 있다. 드디어 그가 감독 입봉작으로 세종을 들고 온 것이다. 어느 인터뷰에서 “이 땅 오천년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성취는 팔만대장경과 훈민정음”이라고 말한 조감독은 역사소설 『초정리편지』에서 영화의 모티브를 얻었다고 한다.

세종과 신미 스님은 자주 의견 충돌로 다툰다. 신미는 왜 과감히 하지 못하냐며 임금께 힐난하고, 세종은 스님들이 다 너처럼 까칠하냐며 불편한 속내를 보인다. 자칫 난파될 위기에 중심을 잡아주는 인물이 있으니 바로 소헌왕후이다. 왕후는 궁녀들에게 맨 먼저 언문을 습득하게 했고 “언제까지 우리가 친정집에 편지 하나 보내지 못하는 까막눈으로 살아야 하느냐”며 독려하는 모습에서, 어쩌면 한글 창제의 가장 큰 공로자가 아닌가 싶다.

너무나 아쉽게도 이 영화가 마지막 작품이 돼버린 명배우 전미선이 격조있게 이 역할을 소화했다. 조철현 감독은 시사회에서 전미선이 “백성들은 더는 당신을 기다려주지 않습니다”라는 대사를 만들었다는 뒷 이야기를 전했다. 공교롭게도 극에서 소헌왕후가 세종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 천도제를 바치는 장면이 나오는데, 마치 영화가 고 전미선 배우에게 바치는 모습처럼 보여 마음이 아팠다.

(출처 네이버영화)

영화를 보다보면 한지에 다양한 글자를 조합하는 장면이 나온다. 사실 이랬을 거라 추정해 본 것이다. 여러 소리 문자들을 적으면서 우리에게 가장 적합한 글자를 찾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영상으로 잡아내기 위한 상상력의 산물이다. 한국의 3대사찰이자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해인사 장경판전은 극중에 신미 스님이 수양을 하던 곳으로 나온다. 아름다운 한국의 사찰을 눈요기 할 수 있는데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안동 봉정사, 곡성 태안사 봉서암, 순천 송광사 등이 극의 배경으로 나온다.

세종 얘기를 좀 더 해보자. 세종은 겨우 스물 두 살에 보위에 오르게 된다. 아버지 태종은 상왕에 올라 여전히 권력의 중심에 있다. 세종으로선 참으로 곤혼스러웠을 것이다. 신하들도 어디에 눈을 맞춰야 할지 몰랐다. 영화에선 세종이 소헌왕후의 집안을 지켜주지 못한 점을 들어 신미대사의 비난을 받지만 사실은 좀 다르다.

태종은 원래 외척의 폐습을 너무나 뼈져리게 느꼈던 터라 외척에 대한 경계심도 상당했다. 아버지 태조를 꼬드겨 개국에 공이 큰 전 부인의 장성한 아들을 내치고, 자신의 아들을 세자 자리에 앉혔던 계모 신덕왕후에 대한 트라우마는 여전히 태종의 뇌리에 깊이 박혀 있었다.

그러나 태종은 세종의 장인인 심온에게는 영의정을 제수하고 중국의 특사로 임명하는 등 상당한 배려를 해준다. 심온이 임금의 장인이자 영의정 신분으로 중국에 가 있는 동안 역모사건이 터져 조정에 한바탕 피비린내가 진동한다. 여기에 세종의 장인 심온도 연루된다. 물론 태종의 계획된 노림수였다.

사약을 받고 숨을 거둔 아버지 심온의 영정에 큰 소리로 울 수도 없었던 딸이, 바로 세종의 정부인인 소헌왕후 심씨다.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이 자신이 왕비로 있어 일어난 일임을 왜 몰랐겠는가? 어머니와 자매들은 심지어 관노로 전락했고 후환이 두려웠던 대신들은 역적의 딸을 국모의 자리에 둘 수 없다는 상소를 매일같이 올렸다. 이때 상왕인 태종이 이런 상소를 막아준다. 이미 외척의 핵심인 왕의 장인을 사사시킨 마당에 왕비까지 내칠 이유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세종은 왕비의 고통을 옆에서 지켜보며 임금으로서 자괴감을 느꼈을 것이다. 영화에서 소헌왕후를 연민어린 시선과 애뜻한 사랑으로 바라보는 장면에서 세종의 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으리라.

(출처 네이버영화)

태종이 죽고 세종 중반기에 이르러 그의 독창적이고 해박한 지식과 사고가 만개한다. 농업, 천문, 음악, 역사, 병법까지 많은 분야에서 괄목한 성취가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스스로 실력을 겸비해 사사건건 들이대는 중신들과의 토론에서 밀리는 경우가 없었다. 집현전을 두어 학문 숭상에도 몸을 아끼지 않았는데, 비만과 당뇨(소갈병), 눈병 등에 시달려야만 했다.

드디어 1443년 12월 30일 세종은 훈민정음을 반포한다. 영화에서 첫 출간된 훈민정음 책자를 중신들에게 나누어주나 누구하나 거들떠 보지 않고 자리를 떴다. 집현전 대제학인 정인지만이 따로 보관했다. 이는 역사적 맥락과도 일치한다. 정인지는 언문에 반대했지만 이후 훈민정음 해설서를 만들어 보급했다.

고등학교 국어시간에 외우기에 급급했던 훈민정음의 서문을 영화로 접하니 세종의 절실함이 생생하게 피부로 와 닿는 느낌이 결코 과장이 아니다.

“나라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와 서로 통하지 아니하므로 어리석은 백성들이 말하고 싶은 바가 있어도 제 뜻을 잘 표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내 이를 딱하게 여겨 새로 스물여덟 자를 만드니 사람들로 하여금 쉬이 익혀 쓰는데 편하게 할 따름이다.”

마지막 장면이 인상적인데, 신미 스님이 이런 말을 한다. 복숭아에 씨가 하나 있는 것은 누구나 알지만 그 씨가 나중에 몇 개의 복숭아가 될 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라며, 언문이 앞으로 후대에 어떤 평가를 받을지도 마찬가지라고 설법한다.

한 가지 걸리는 점은 빠른 호흡과 블록버스터 액션에 익숙한 관객들에게 다소 설명조인 영화가 교육용 다큐멘타리 영화로 비쳐지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박준영  gcnews@gunch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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