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오동 전투』 “받은 만큼 갚아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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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오동 전투』 “받은 만큼 갚아주마”
  • 박준영
  • 승인 2019.08.12 12: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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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역사에 말을 걸다- 열 번째 이야기

크로스컬처 박준영 대표는 성균관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국대 대학원에서 영화를 전공했다. 언론과 방송계에서 밥을 먹고 살다가 지금은 역사콘텐츠로 쓰고 말하고 있다. 『나의 한국사 편력기』 와 『영화, 한국사에 말을 걸다』 등의 책을 냈다. 앞으로 매달 1회 영화나 드라마 속 역사 이야기들을 본지에 풀어낼 계획이다.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 편집자 주

영화 『명량』은 한국에서 개봉한 영화 중 최고 흥행을 기록한 영화이다. 혹자는 인구 오천 오백만 명의 대한민국에서 1700만 명의 흥행기록은 진정한 문명국가에선 보기 힘든 수치라며 비꼬기도 했다. 2014년 여름, 이순신의 명량대첩을 소재로 만든 영화 『명량』은 그해 봄에 터진 세월호 참사의 도움(?)을 받았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당시 세월호의 비극은 리더십의 부재, 국가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 의심, 진정한 충의 정신은 누구를 향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제기를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던져주었다. 이에 대한 속 시원한 답을 얻지 못한 국민들은 극장으로 가서 이순신 장군의 얼굴을 보며 위로를 받아야 했다. 어쨌든 나의 대학원 후배인 영화 제작자이자 감독인 김한민은 ‘대박’을 맞았다. 그리고 이후 오랫동안 『봉오동 전투』를 기획 준비중이라는 소문이 들려왔다.

(출처 네이버영화)

그리고 다시, 우리 대법원의 강제징용 판결에 따른 일본의 수출규제 보복조치로 촉발된 한일 양국의 갈등이 최고조로 진행되고 있는 이 시점에 김한민 감독은 『봉오동 전투』를 대중에게 선보였다. 개봉 운이 지나치게 좋다고 해야할지 모르겠지만 『명량』이나 『봉오동 전투』 모두 정치적 상황을 미리 예상하여 만든 건 아니니 뭐라 할 문제가 아니다. (『봉오동 전투』는 감독을 원신연에게 맡기고 김한민 감독은 제작자로 참여) 그럼에도 영화 역시 시대의 거울이며 당대의 분위기를 타는 문화상품이란 측면에서 천우신조임에 틀림없다. 

영화 『봉오동 전투』는 일제의 횡포와 만행을 초장부터 작심하고 보여준다. 일본군은 자신들에게 길을 안내해준 조선의 형제를 무참하게 폭사 시키는가 하면 만주에 어렵게 살고있는 조선의 백성들을 도륙하고 살상하며 심지어 잘라진 머리를 들고 기념사진을 찍는다. 그저 머릿속에 추상화 돼 있는 일본군의 만행을 영화는 시각적으로 구체화 시켜준다. 영화는 그러면서 저항과 복수의 당위를 축적해 나간다.

경술국치가 된 지 십 년이며 3.1만세운동이 일어난 지 1년이 조금 지난 1920년 6월 7일. 중국의 지린성 봉오동에서 홍범도의 한국 독립군 연합 부대가 일본군 제19사단의 월강추격대대를 무찌르고 대승을 한 전투를 『봉오동 전투』라 이른다. 

(출처 네이버영화)

잠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보자. 1894년 청일전쟁 당시, 조선은 정궁인 경복궁을 일본군에게 함락당한다. 사실상 적군에게 수도를 뺏긴 것이다. 이미 이때 조선은 망했다. 이후 형식적인 합방의 절차들이 일제에 의해 치밀하게 기획 실행된다. 1905년에 외교권이 박탈당하고 1907년에는 군대가 해산된다. 해산된 군대는 치열하게 저항 응전한다. 일본은 거병 의병을 이대로 뒀다가는 향후 한반도 지배가 용이하지 않음을 알고 ‘남도 대토벌작전’을 감행하여 적어도 한반도 지역내에서 저항의 씨앗을 완전히 짓밟아논다. 하여 무장세력과 잔존의병들은 만주와 연해주로 향하였고 길고도 힘든 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대한의 백성들은 만주에 학교를 세우고 연해주에 군사학교를 만들며 장차 다가올 일본과의 전면전을 차분히 그러나 가열차게 준비한다. 일제는 합방 후 헌병무단통치를 하며 우리 민족을 압박한다. 20년대 들어 조선에 대한 이른바 문화통치는 3.1운동으로 얻은 일정정도의 결과물이긴 하지만 일본정부의 한반도 통치에 대한 자신감의 발로라고 보는게 더 맞을 것이다. 20년대는 일본이 강성국가로 비약하는 결정적인 시기였다. 자본의 확대와 대규모의 생산산업을 기반으로 하여 번영과 안정의 토대를 만든 시간이었다. 이제 일본의 제국주의는 한반도에만 있기엔 자국 생산의 총량을 소화할 수 없게 되었다. 만주로, 중국으로 시야와 시장을 넓혀야 할 시기가 온 것이다.

한편 20년대 들어 대한의 백성들은 만주와 연해주 등에 삶의 터전을 만들었고 대오를 갖춘 독립군들은 국경을 넘나들며 일본 군대의 약을 올리는 기습공격을 자주 감행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일본군들도 노골적으로 중국 국경을 넘어 조선인 민간 부락에 대한 보복을 빈번하게 자행하고 있었다. 바로 그즈음이 바로 봉오동 전투의 시작점이다. 영화는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출처 네이버영화)

일본은 이참에 아에 만주의 독립군 부대를 토벌하기로 작정하고 신식 무기와 대포로 무장한  월강추격대를 필두로 하여 만주로 진격한다. 가면서 조선인 부락촌을 초토화하는 만행을 저지른다. 이렇게 한 이유는 조선인 거주지가 독립군의 생계에 필요한 ‘보급부대’ 역할을 지금까지 해 왔다는 첩보 때문이었다. 이후 보급이 막힌 독립군들에게 상당한 어려움을 주었고 감자 하나 나눠먹기도 힘든 모습이 영화에서 보여지기도 한다. 이런 불리한 상황과 전황을 이겨내기 위해 독립군은 봉오동의 특수한 지형을 활용하기로 한다. (이 역시 『명량』에서 진도 울둘목 앞바다의 험한 수로를 이용한 것과 비슷한 구성이다)
 
항일대도를 휘두르는 비범한 칼솜씨의 해철(유해진)은 원래 마적 출신이나 어느 날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는 대오각성 끝에 독립군의 맹장이 된다. “우리 장군님, 우리 장군님”을 입에 달고 사는데 대한독립군 대장 홍범도의 수하이기도 하다. 사격술이 좋고 몸이 날랜 독립군 분대장 장하(류준열), 그리고 해철의 오른팔이자 날쌘 저격수 병구(조우진)가 영화의 중심 인물이다. 해철은 일본군의 피를 손바닥에 적셔 ‘대한독립만세’라고 벽에 적을 정도로 일본군이라면 이를 간다. 장하는 엄마처럼 여기던 누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절망하지만 다시금 전투력을 회복하여 적을 고지까지 유인하여 기관단총으로 일본군 분대원을 전멸시킨다. 가장 독립군다운 독립군의 역할을 인상적으로 보여준다. 

장하가 능선 위에 버티고 서서 산에 오르는 일본군을 향해 쏴댔던 무기는 미국 치과의사가 발명한 자동 게틀링 기관단총이다. 이 장면에서 동학혁명 당시 백산에서 벌어진 동학농민군과 조일 연합군의 마지막 전투가 머리에 떠 올랐다. 죽창과 낫으로만 무기를 삼았던 동학군은 일본의 개틀링 기관총에 무방비일 수밖에 없었고 농민들의 시체가 쌓여 백산을 이루었으며 흐르는 피로 강이 되어 흘렀다. 장하가 미친 듯 쏘아대는 연발 기관총에 추풍낙엽처럼 쓰러지는 일본군을 보며 요즘 일본 때문에 쌓이는 스트레스가 조금은 풀어지는 것은 어쩔수 없는 인지상정이다. 물론 봉오동전투에서 실제 개틀링 기관총은 사용되지 않았지만 말이다.

영화 『봉오동 전투』에서 ‘시대정신’을 담는 장면이 하나 있다. 황해철은 일본군 초소를 습격하여 어린 일본군 장교 유키오(다이고 코타로)를 죽이지 않고 포로로 잡아 끌고 다니면서 일본군이 얼마나 악랄한 만행을 자행하는지 직접 보게 만든다. 어린 일본장교는 도쿄제대를 졸업하고 아버지도 전쟁영웅인 일본의 엘리트다. 무슨 의도였을까? 직접 보라는 거다. 그래서 잘못을 뉘우치고 사과하게 하려는 의도이며 이를 똑똑히 보고 역사에 전하라는 뜻이다. 일본군에게 동생을 잃은 춘희(이재인)도 일본의 실상을 알고 혼란스러워 하는 유키오에게 연민과 함께 꽁꽁 갇혀있던 마음의 빗장을 열기 시작한다. 용서로 가는 첫 번째 단계이다. 

영화는 전반적인 흐름은 평면적이다. 캐릭터의 이중성과 깊이는 찾아볼 수 없다. 그게 『봉오동 전투』의 큰 결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니 그럴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나와 적이 부딪치는 전쟁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의 내적 갈등과 고민은 당연히 없다. 죽고 죽이는 전투에서 이분법 말고 무엇이 있겠는가? 그 적이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을 죽이고 집에 들어 온 강도들인데.. 

역사를 기억하는 일이 증오를 확인하는 일이 아니라고 영화를 보고 난 어느 젊은 평론가는 말한다. 그러나 역사에 대한 기억의 힘은 증오로부터 시작한다. 진정한 증오야말로 상대에 대한 화해의 첫 번째 단계이기 때문이다.

(출처 네이버영화)

“기존의 한국 전쟁영화들은 방어전이나 공간 점령이 많은데, 『봉오동 전투』는 인물들이 계속해서 이동하며 스피디하게 전투를 벌인다.” 김영호 촬영감독의 말이다. 죽음의 골짜기로 일본의 월강추격대대를 유인해 섬멸하는 작전 전략은 영화 화면에서 제대로 구현된다. 전국 각지에서 모인 독립군이라는 캐릭터는 빈번하게 사용되는 그들의 지역 사투리로 생생하다. 다만 몇 가지 아쉬움 점이 있다면 영화 러닝타임을 좀 줄였으면 어땠을까 싶다. 30분만 드러냈으면 긴장감을 계속 유지 했을텐데..그리고 마지막에 카메오로 등장한 홍범도 장군역의 최민식이 너무 살이 쪄서 등장하는 바람에 심각한 장면에서 그만 풋 하고 웃고 만 부분이 그것이다. (영화 『명량』의 최민식과 제작자인 김한민이 특수관계라는 사실도 그때 생각났다.) 

요즘 한일간의 여러 상황들을 보면서 국력의 차이등의 현실을 인정하고 가자거나, 즉자적 감성보다는 이성적으로 난관을 뚫어보자는 사람의 주장도 많은걸로 알고있다. 전혀 틀린 말은 아니다. 다만 역사도 사람이 만드는거고 용서도 사람이 하는거다. 영화 『봉오동 전투』는 현실과 이성 이전에 역사적 팩트에 대한 분노에 보다 더 집중하길 원한다. 그래야 사과와 화해도 진정성 있게 이루어진다. ‘거룩한 분노’는 먼 이웃에서 가까운 동맹으로 가기위한 한 발자국 임을 영화는 다시금 환기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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