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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삼대[2019원수폭금지세계대회 참관기]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박사과정생 김우창…살아남은 자의 책무와 그에 대한 우리들의 응답
김우창 | 승인 2019.08.16 11:04

일본이 만든 제품을 사지 않거나, 일본에 가지 않는 다양한 종류의 ‘No Japan 운동’이 한창인 이 시기에 3박 4일 동안 일본에 다녀왔다. 일본에 가겠다는 말에 지인들은 황급히 낯빛을 바꾼 채 왜 가는지를 물었고, 매년 이 주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번갈아 개최하는 원수폭금지세계대회에 참여한다는 설명으로 나의 ‘불온한’ 일본행은 어느 정도 정당화되는 듯 보였다. 장황한 후기 대신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한 삼대의 이야기로 갈음하려 한다.

오오츠카 가즈토시 씨

일본에서의 첫 일정은 피폭자인 나가사키피폭재해협회 평의원인 오오츠카 카즈토시 씨와의 간담회였다. 1945년 8월 9일 11시 2분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졌다. 겨우 열 살이었던 그는 당시 폭심지로부터 3km 떨어진 한 초등학교에서 친구들과 매미를 잡고 있었는데, “파열될 것만 같은 빛과 귀가 떨어져 나갈 것 같은 쾅소리”에 그의 몸은 날아갔고, 학교와 민가 역시 무너져 내렸다. 지면의 온도는 3~4천 도를 넘었고, 폭풍은 초속 440m/s를 기록했다. 폭심지 1.1km 이내에 있던 사람들은 즉사하거나 살아도 내부피폭을 당하는 등 시민 3명 중 2명이 희생당했고, 나가사키 시설의 40%가 파괴됐다.

정신을 잃은 오오츠카씨는 간신히 눈을 떴으나 무릎부터 발목까지 심하게 다쳤다. 겨우 집에 도착했지만, 어떻게 집에 돌아왔는지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가족은 다행히 방공호에 들어가서 숨어있었지만, 동네 전체가 불바다처럼 타들어 가는 것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보아야 했다. 그가 기억하는 74년 전의 장면들은 참혹하고 끔찍했다. 거리에는 화상을 입은 채 죽거나 죽은 사람들이 쌓여 있었고, 한 말은 체구가 세 배에서 다섯 배가 불었고, 다리가 하늘을 향한 상태에서 이를 꽉 문 채 죽어갔다.

원자폭탄은 결코 남에게 일어났던 비극적인 장면만이 아니었다. 오오츠카 씨를 비롯한 그의 가족들의 몸에도 그가 ‘이변’이라고 부르는 변화가 일어났다. 그는 눈앞이 갑자기 희미해지고, 열이 나며 머리가 계속 빠졌다. 먹는 것이 전혀 없는데도 계속해서 설사했다. 어머니는 아들이 겪는 몸의 변화를 걱정하며, 같이 병원에 가자고 했다.

피폭자 오오츠카 가즈토시 씨가 피폭경험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나가사키 의과대학 역시 궤멸당한 상태였고, 900여 명의 의사, 간호사를 비롯한 학생들이 죽었다. 다행히 3km 떨어진 한 초등학교가 구호‧구조대로 사용됐는데, 『나가사키 원폭 구호의 기록』이라는 책에서 한 간호사는 “이미 600명이 수용됐고, 완전히 벌거숭이나 다름없었다. 인간의 앞면과 뒷면을 구분할 수 없었고, 검은 숯덩이인 상태로 왔다.”고 말하면서, 이렇게까지 무고한 피해는 본 적이 없으며, 도저히 이 세상의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고 기록했다. 소독약이나 의약품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의료진은 그저 소금물을 피폭자들의 몸에 뿌리고 구더기를 떼는 것이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피해자들을 돌보는 의료진의 하얀 가운에는 이미 땀, 피와 고름이 덕지덕지 묻어 있을 정도로 최선을 다했지만, 그들은 설사와 열이 원폭증의 초기 증세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당시 “방사능의 후유증과 피해는 없다.”라는 것이 미국의 입장이었지만, 뒤에서 미국은 일본 과학자 및 의사들의 원폭 피해 연구와 진료 기록들을 압수하거나 언론 보도를 통제하였다. 그러나 현실 속 피폭자들은 미국의 발표와는 다르게 끔찍한 삶을 살아야 했다.

피폭의 참상을 대표하는 ‘빨간 등의 피폭자’인 다니구치 스미테루는 등의 화상이 워낙 심해서 1년 9개월 동안 엎드린 채로 지내야 했고, 가슴에 살들이 썩어 밀려 올라갔다. 오오츠카 씨는 “다니구치 씨는 피부 자체가 없어서, 땀을 흘릴 수가 없었는데, 죽을 때까지 체온 유지·조절이 불가능했다.”라고 안타까워했다.

이후 다니구치 씨는 피폭 3년 7개월 만에 퇴원하였지만, 그의 몸으로는 어떠한 일도 할 수 없었고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에는 차별이 가득했다. 그는 죽자고 다짐한 적도 있었지만, 나가사키를 마지막 피폭의 희생지로 만들기 위해, 전쟁과 원폭을 반대하는 활동이 살아남은 자의 사명이라고 받아들였다. 그는 “내 붉은 등에서 눈을 떼지 말아주세요. 원폭의 죄의 흔적이 여전히 내 몸에 남아있습니다. 핵무기와 인류는 공존할 수 없으며, 폐지 외에는 답이 없습니다.”라며 목숨을 걸고 외쳤다.

나가사키 원폭자료관에 걸린 다니구치 스미테루 씨의 피폭당시 사진

이들의 활동에도 불구하고, 당시 일본은 미국의 꼭두각시가 돼 손발이 묶인 상태였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구호소는 각각 10월 5일과 8일에 폐사했고, 입원 환자는 쫓겨났다. 언론보도가 금지됐으며, 일본 의사들이 했던 부검이나 인체 손상 사진과 같이 피폭의 영향을 증명할 수 있는 의학적 기록들은 모두 군사적 기밀이라는 이유로 압수당했다. 치료나 구호 활동도 없었고, 어떠한 일도 할 수 없는 당시를 오오츠카 씨는 ‘원폭지옥’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안타까움 죽음이 발생했다. 19살의 어린 피폭자는 자신의 끔찍한 몸의 흉터(켈로이드)를 고치기 위해 21번이나 수술을 단행했으나, 결국 피폭 전의 몸으로는 돌아갈 수 없었다. “나에게 8월 9일은 필요 없다.”라며 그는 8일 청산가리를 먹고 희망 없는 삶을 끝냈다.

오오츠카 씨의 가족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남동생은 코 안과 폐가 썩어 질식사하였는데, 그의 나이 서른이었다. 그의 동생을 진료했던 의사는 “원폭의 영향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지만, “치료방법을 모르겠다. 미안하다.”라며 의사로서의 무력감을 토로했다. 남동생의 아내도 췌장암에 걸렸고, 어머니는 심장, 방광까지 종양이 생겨 암으로 돌아가셨다. 또한, 누나의 아이 역시 원폭후유증으로 사망하였는데, 이것은 나가사키 최초로 원폭 피해 2세의 죽음이었다. 부모와 자식 그리고 손자까지 삼대가 모두 피폭의 영향 아래에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원폭의 그림자는 현세대만이 아니라 다음 세대의 목숨까지 빼앗아 갔다. 오오츠카 씨 역시도 백혈구 감소, 심근경색, 이유를 알 수 없는 심장발작, 전립선암과 폐경색으로 인한 호흡 곤란까지…. 원폭의 고통과 피해 속에서 삶을 이어나가고 있다. 자신의 어머니와 형제 그리고 형제의 자식이 안타깝게 숨을 거두었지만, 오오츠카 씨는 여전히 전쟁과 피폭의 반성으로부터 만든 ‘헌법 9조’를 지키기 위해 거리에서 서명운동을 진행하고 있다.

“살아 있어서 다행이다.”라고 말하며 앞으로도 계속 싸울 것이라는 오오츠카씨는 끝으로 “만나서 반가웠다. 꼭 내년에, 나중에 다시 만나자”고 인사했다. 오오츠카 씨의 인사는 우리가 흔히 형식적으로 하는 끝인사와 비슷해 보였지만, 그 순간 나는 울컥하였다. 그의 평범한 말은 어쩌면 오늘이 우리가 볼 수 있는 마지막 날일 수도 있다는 의미이며, 그래서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해 증언하겠다는 다짐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어쩌면 “피폭국이 국민(피폭자)을 유기했다.”는 오오츠카 씨의 말은 1945년 만이 아니라 2019년 현재에도 유효할지 모른다. 피폭자들이 온몸을 걸고 전쟁과 원자·수소폭탄의 금지를 주장함에도, 아베는 지속해서 평화헌법을 지우고 파괴와 전쟁을 원하기 때문이다. 오오츠카 씨 삼대의 온몸에 기록된 전쟁과 원폭의 고통에 우리는 어떻게 함께할 수 있을까.

프리모 레비는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에서 아우슈비츠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고통과 상처였지만, 자신은 살아남지 못한 자들을 대신해 증언해야 한다고 오오츠카 씨처럼 말했다. 그러나 증언하고 자신의 고통을 세상에 알릴수록 ‘소통불가능성’을 깨닫고 절망했다. 자신의 증언에 독일 사회가 보여준 냉담, 변명, 자기합리화가 레비를 더 큰 절망 속으로 가라앉힌 것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오오츠카 씨와 같이 자신의 몸에 새겨진 원폭과 전쟁의 끔찍함과 두려움을 증언하는 사람들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얼마나 그들의 고통에 공감하고 다시는 그러한 고통이 재발하지 않도록 그들과 함께 행동하고 있는가. 미국 정치학자 샤츠슈나이더는 한 사회의 기득권자들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사회문제나 갈등만을 동원하고 중요하고 지배적인 문제들은 배제한다고 하면서, 이를 사유화(privatization)라고 표현했다. 이와는 반대되는 표현은 사회화(socialization)인데, 이는 문제와 갈등을 개인이나 사적 공간에 갇히지 않고 공적 공간으로 끌어내 정치화·공론화시키려는 작업이자 노력인데, 이때 사유화를 사회화로 치환하는 작업에 필수적인 요소가 바로 ‘구경꾼(시민)’의 역할이다.

원전지옥의 고통을 겪었던 어떤 삼대의 증언을 들은 우리의 책무란, 그러한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침전되지 않도록 사회화, 정치화, 공론화 및 우리가 함께 바꿔나가야 할 모두의 일로 만드는 것이다. 끊임없이 원폭피해문제를 1945년에만 해당되는 일이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주민들의 일만으로 협소화시키려는 지배세력의 나쁜 전략을 극복하는 것은 바로 우리에게 달려 있다.

오오츠카 가즈토시 씨의 피폭증언 후 한국대표단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본 기고글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김우창(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박사과정)

 

김우창  gcnews@gunch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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