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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제도를 숨 쉬게 하다[일상의 의료를 찾아서 3] 쿠바 아바나 의과대학 김해완
김해완 | 승인 2019.09.03 17:53

'어쩌다 보니' 본지와 인연을 맺게 된 쿠바 아바나 의과대학에 재학 중인 김해완 씨가 올 8월부터 격주로 『쿠바의 의료 실험 - 일상의 의학을 찾아서』를 연재키로 했다.

김해완 씨는 아바나 의대를 다니면서, 의대생으로서 보고 또 경험한 쿠바 의료시스템을 '일상의 의학'이라 칭한다. 대단한 의료기술은 없지만, 일상의 자질구레한 문제(병)을 해결하며, 병과 의료와 사람을 둘러싼 관계를 바꾼 쿠바의 의료시스템을 소개할 예정이다.

- 편집자 주

 

쿠바에서 살다보면, 이 섬을 박차고 떠나서 다시는 되돌아오고 싶지 않을 정도로 짜증이 올라오는 날들이 있다. 이 짜증의 근원지는 습한 날씨도 아니고 물자 부족도 아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관료주의다. 오, 관료주의! 나는 이 어휘의 참된 의미를 쿠바에 와서야 이해했다. 불성실함과 무책임함과 비효율성의 짬뽕. 거기에 거드름 피우는 권위의식까지 소스로 끼얹은 태도는 공무원은 물론이고 버스 터미널의 매표소 직원에게서까지 발견된다.

버스표뿐인가? 인터넷 카드부터 학교 등록금까지 모든 것이 국가사업인 쿠바에서는 동일한 경험을 피해갈 수가 없다. 외국인이든 쿠바인이든, 반사회주의자든 반자본주의자든, 간단한 서류 통과 하나를 위해서 찜통더위에 사무실에서 세 시간씩 기다리다 보면 온 세상을 미워하게 된다.

그래서 쿠바의 사회를 두고 참으로 독특하다고 입을 모아들 말하는 모양이다. 쿠바인들이 자생적으로 꾸려나가는 커뮤니티의 모습에 매료되곤 하지만, 딱딱하게 경직된 제도권에 들어만 가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거시적 풍경과 미시적 체험이 이토록 다를 수가 있다니…. 그런데 이 와중에도 드물게 좌절과 분노가 아니라 신선함으로 승부를 보는 제도가 있다.

그것은 바로 이 나라의 의료 시스템이다. 즉, SNS다. 우리가 익히 아는 소셜 네트워크의 SNS(Social Network Service)가 아니라, ‘국민 보건 시스템’을 의미하는 SNS(Sistema Nacional de Salud)인 것이다. 쿠바의 SNS는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떨치며 수많은 글로벌 ‘팔로워’들을 모았고, 이 중 몇몇 국가들은 쿠바의 SNS를 자국에 적용하기도 했다.

쿠바의 블랙홀 같은 관료주의에도 잡아먹히지 않는 SNS의 매력은 무엇일까? 내가 지금까지 확인한 바로는 두 가지를 꼽을 수 있다. 첫째는 동네 가족 주치의(Médico de Familia)의 존재이고, 둘째는 최소 자원으로 최대 효과를 뽑아내는 절약 정신이다.

공네 길거리에서 노는 쿠바 아이들. 무료의료의 혜택은 특히 산모와 아이들에게 집중된다. (제공=김해완)
공네 길거리에서 노는 쿠바 아이들. 무료의료의 혜택은 특히 산모와 아이들에게 집중된다. (제공=김해완)

우선 주치의 제도의 신박함부터 짚어보자. 쿠바에는 각 동네마다 가족 주치의가 반드시 근무 한다. 주치의의 임무는 주민들의 체질을 가까이에서 파악하고, 가벼운 잔병치레를 도와주거나 중증 상태의 환자를 제때 큰 병원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핵심적인 임무가 있다.

동네 주민들에게 건강한 라이프스타일을 촉진(Promoción)하는 것과, 병이 심각해지지 않도록 사전에 미리 예방(Prevención)하는 것이다. 이 임무를 해내려면 동네의 온갖 가족사와 이웃사와 정치사(?)에 개입할 수밖에 없다. 흰 가운을 입고 골목길을 휘젓고 다니는 공식 잔소리꾼, 의사와 간호사. 이 모습은 오늘날 쿠바 의료를 대표하는 아이콘이 되었다.

가족 주치의 제도는 하루아침에 탄생하지 않았다. 숱한 고민과 개혁의 결과로서 1980년대 초에야 비로소 세상의 빛을 볼 수 있었다. 당시 의료 개혁을 밀어붙인 것은 쿠바 정부였지만, 프로젝트의 총 방향을 제시한 것은 ‘일차 보건 의료(Primary Health Care)’라는 세계적인 개념이었다.

이 개념은 1978년 세계보건기구(World Health Organization)가 알마아타 선언의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주목받기 시작한다. 일차 보건 의료란 『주민들의 기본적인 필요와 문제를 인식하는 형식에, 문제 해결을 위한 주민들의 집단 행동을 조직하는 전략을 결합시킴으로써 건강에 통합적인 주의를 기울이는 것』으로 정의된다.

다시 말해, 의사의 영역을 병원을 넘어 집, 동네, 지역으로까지 확대하면서 질병을 구체적으로 예방할 뿐만 아니라 주민들이 자기 건강에 주도권을 갖도록 유도하자는 것이다. 쿠바 정부는 곧바로 이 개념을 적극 받아들였고, 결과는 경탄스러웠다. 세계보건기구가 2000년 달성을 목표로 발표한 국민 건강 수준을, 쿠바는 단 오 년 만에 달성했던 것이다!

이런 일취월장은 어떻게 가능했던 걸까? 쿠바 정부가 고민하고 있었던 의료 개혁의 방향성이 알마아타 선언의 의의와 일치했기 때문이었다. 1970년대까지 쿠바의 의료 제도는 입원환자가 이용하는 오스삐딸(Hospital)과 외래환자에 집중하는 좀 더 작은 규모의 뽈리끌리니꼬(Policlínico)를 양축으로 굴러가고 있었다. 그러나 쿠바 정부는 ‘선(先)발병, 후(後)치료’의 형식으로는 국민 건강을 증진시킬 수 없다고 판단했다. 병의 사회적 원인을 뿌리 뽑지 않는 한 그 병은 세대에서 세대로, 가정에서 가정으로 끊임없이 이어질 것이었다.

아침에 공원에서 태극권을 연습하는 쿠바의 노인분들. 일상에서의 운동을 촉진하는 것은 예방 의학의 중요한 임무 중 하나이다. (제공=김해완)

근치(根治), 즉 이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의료가 주민들의 일상에 더욱 밀착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런 현실적인 배경 속에서 일차 보건 의료라는 신개념은 환영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1984년, 쿠바에서는 ‘가정 의학 프로그램(Programa de Medicina Familiar)’이 공식적으로 출범한다. 일차 보건 의료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살아 움직이게 할 장치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쿠바 의료의 두 번째 매력 포인트, 절약 정신을 엿볼 수 있다. 가정 의학 프로그램을 탑재한 SNS가 노렸던 것은 국민 건강 향상뿐만이 아니었다. 치료비용의 절감 역시 또 다른 노림수였다. 혁명 신생국 쿠바는 걸음마를 떼기도 전에 미국의 경제 봉쇄에 발목을 잡혀버린 상태였다. 하지만 돈이 없다고 해서 국민 건강을 포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할까? 쿠바는 최소 비용으로 최대 효과를 끌어내는 방법을 궁리하기 시작한다. 채택된 전략은 다음과 같다. 처음부터 병의 싹수를 자르는 것.

즉, 의료 제도의 초점을 병원에서 커뮤니티로 옮김으로써, 질병이 심각해지기 전에 미리 예방하는 것이다. 건강도 지키고 비용도 절감하니, 도랑 치고 가재 잡는 셈이다. 이로써 가정 의학의 비전과 쿠바 정부의 생존 전략이 맞물리며 쿠바판 SNS의 큰 구조가 짜이게 된다.

SNS는 ‘3-3-3’으로 기억하면 쉽다. 세 단위의 행정, 세 종류의 기관, 세 순서의 진료. 의료 행정은 국가(Nación), 지방(Provincia), 그리고 지역 자치제(Municipio)가 수직적인 위계를 이루고 있다. 또, 의료 기관은 앞서 언급한 대로 꼰술또리오, 뽈리끌리니꼬, 오스삐딸라는 세 장소가 서로 상호작용을 한다.

꼰술또리오는 가족 주치의가 평균 500~700가구를 돌보는 곳이다. 반면, 뽈리끌리니꼬는 24시간 가동되는 동네 종합병원이다. 한 개의 뽈리끌리니꼬에는 스무 개의 꼰술또리오가 소속되어 있어서, 꼰술또리오는 중증 환자를 곧바로 소속 뽈리끌리니꼬로 보낸다. 뽈리끌리니꼬는 가족 주치의들이 요청할 때마다 지원을 보내는 베이스캠프 역할도 겸하는 셈이다. 그리고 마지막 의료 기관은 오스삐딸이다. 이곳은 가장 상위 진료 기관으로서 옛날과 마찬가지로 입원환자를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다.

이런 진료 시스템 속에서는 자원과 자본이 효과적으로 절약된다. 이 절약의 최전선을 담당하는 것은 물론 꼰술또리오와 뽈리끌리니꼬다. 이 두 기관에서 행해지는 치료는 일차 진료(Atención Primaria)라고 불리는데, 이 진료를 통해 80%의 환자가 걸러진다. (이 높은 비율을 유지하는 비결은? 주치의와 간호사의 끝없는 ‘잔소리’다. 최소 비용으로 최대 효과를 내는 마법이 바로 여기 있다.) 또, 그 외에 병이 이미 진행된 15%의 중증 환자들은 오스삐딸에 보내져 이차 진료(Atención Secundaria)를 받는다. 크게 사고를 당했거나 합병증으로 고생하는 5%의 환자들 같은 경우에는 특수 병원의 집중적인 케어를 필요로 한다. 이것이 마지막 단계인 삼차 진료(Atención Terceria)다.

물론 현실은 이론과 다르고, 사회는 멸균 실험실이 아니다. 어느 시스템이든 실제로 작동시켜 보면 크든 작든 삑사리가 난다. 또, 천하의 SNS라고 해서 쿠바의 관료주의를 피해갈 수는 없다. 유연하게 소통해야 할 의료 기관들이 삐그덕거리고, 과로에 지친 의사들 사이에는 대충 진료하려는 게으름이 피어나고, 대기 시간에 지친 환자들은 의사의 집을 개인적으로 찾아내서 예고 없이 들이닥친다.

그래서 SNS 한복판에서는 우는 소리와 고함 소리와 혀 차는 소리가 시끌시끌 들려온다. 이 뿐인가? 노동의 강도에 비해 의사의 월급이 턱없이 적기 때문에, 의사를 희망하는 쿠바 청년들의 숫자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경제 봉쇄는 의약품 공급의 숨통을 죄이고, 자본의 부족으로 낡고 오래된 의료 기기는 대체되지 못하고 있다. 풀어야 할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쿠바 의료가 세계 최고냐고 묻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언제나 나는 아니라고 말한다. 거짓말을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나는 이런 질문들 속에 숨어있는 ‘답정너(답은 정해져있고 너는 말만 하면 돼)’식 전제도 거부한다. 그 전제란 바로 ‘최고로 완벽한 의료’는 세계 10%에 속하는 선진국들에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최신 실험실, 최신 의료 장비, 최신 의료 기술, 그리고 무엇보다 최질의 의료 서비스에 대한 비용을 지불하고 또 소비할 수 있는 극소수의 나라에만 훌륭한 의학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의대 앞 풍경. 의대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돌아다닌다. (제공=김해완)
해부학 시간에 즐겁게 수업받는 의대생들. (제공=김해완)

그렇다면 이렇게 달리 물어보자. 세상 모든 사람들이 건강하게 살아가려면, 모든 나라는 미국, 독일, 수준만큼 부유해져야 하는 걸까? 여기에도 대답은 정해져 있다. 옳고 그름을 따지기 전에, 그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 바로 대답이다. 경제학적 질서로도, 전지구적 자원의 역량으로도 그것은 불가능하다.

불가능을 강요하는 질문들에는 신경을 꺼버리는 게 좋다. 그리고 실행 가능한 행동을 보여주는 게 낫다. 이 세상이 문제가 없는 유토피아였던 적은 한 번도 없으나, 그것이 아픈 환자를 방치해야 할 이유가 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 행동들은 완벽함과는 거리가 멀겠지만, 제한된 자원을 창의적으로 활용해내는 지혜에 더 가까울 것이다. 따라서 나는 이렇게 말한다. SNS는 세계 최고는 아니지만 쿠바 최적의 의료 시스템이라고. 이 섬나라에 풍요로운 것은 자본이 아니라 다만 사람이다. 자본이 아니라 사람을 기준으로 평가해보면 쿠바 의료는 훌륭하다. 문제투성이의 나라지만 이 땅에서 사람들은 건강하고, 의사들은 강건하다.

이곳에서 우리 의대생들은 매일 한계 앞에서도 생(生)을 포기하지 않는 법을 배워나간다. 이런 보람을 낙 삼아 나는 틈만 나면 두통을 안겨주는 쿠바의 관료주의를 버텨보고 있다. 사람이야말로 딱딱한 시스템을 살아 숨 쉬게 만드는 매력이니까.

11월 29일, 매년 의대생들은 아바나 시가지를 행진한다. 19세기 말 스페인 정부에게 살해당했던 쿠바 의대생 1학년들을 기리기 위해서이며, 현 쿠바의 의료체제를 다시 한 번 자랑스럽게 여기기 위해서다. (제공=김해완)
11월 29일, 매년 의대생들은 아바나 시가지를 행진한다. 19세기 말 스페인 정부에게 살해당했던 쿠바 의대생 1학년들을 기리기 위해서이며, 현 쿠바의 의료체제를 다시 한 번 자랑스럽게 여기기 위해서다. (제공=김해완)
산타 클라라에 있는 체 게바라의 동상. 동상 밑에는 "영원한 승리를 위하여(Hasta La Victoria Siempre)"라고 쓰여있다. (제공=김해완)

산타 클라라에 있는 체 게바라의 동상. 동상 밑에는 "영원한 승리를 위하여(Hasta La Victoria Siempre)"라고 쓰여있다. (제공=김해완)

김해완  godhks121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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