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아…값비싼 행복
상태바
치아…값비싼 행복
  • 김해완
  • 승인 2019.10.08 17:4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일상의 의료를 찾아서 5] 쿠바 아바나 의과대학 김해완

'어쩌다 보니' 본지와 인연을 맺게 된 쿠바 아바나 의과대학에 재학 중인 김해완 씨가 올 8월부터 격주로 『쿠바의 의료 실험 - 일상의 의학을 찾아서』를 연재키로 했다.

김해완 씨는 아바나 의대를 다니면서, 의대생으로서 보고 또 경험한 쿠바 의료시스템을 '일상의 의학'이라 칭한다. 대단한 의료기술은 없지만, 일상의 자질구레한 문제(병)을 해결하며, 병과 의료와 사람을 둘러싼 관계를 바꾼 쿠바의 의료시스템을 소개할 예정이다.

- 편집자 주

 

나의 할머니께서는 가족 중에 치과의사가 한 명은 있어야 편하게 산다고 자주 말씀하셨다. 그리고 손녀 손자들에게 치과의사가 되라고 틈틈이 세뇌시키곤(?) 하셨다. 우리 중 누구도 그 말씀을 귀담아듣지 않았지만 말이다. 할머니가 다시 생각났던 것은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뉴욕에서였다. 의료보험 없는 유학생이었던 나는 그곳에서 치과를 못 가고 3년 반을 살았다. 한국에 갈 때까지 버텨보겠다는 내 굳은 의지는, 귀국을 코앞에 두고 피를 철철 흘리는 잇몸과 시려오는 어금니, 치통이 유발하는 두통 앞에서 결국 꺾이고 말았다. 현금을 주면 50% 할인을 해주겠다는 젊은 치과의사를 찾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현금 120만원을 토해냈다. 그때서야 비로소 나는 할머니의 심정을 뱃속부터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아, 치과의사 친구가 한 명만 있어도 삶이 편안해지겠구나…!

이 간절한 바람은 세계만국인 모두가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치과치료는 전 세계적으로 비싸기로 4위에 꼽힌다. 의료가 장사가 된 미국은 말할 것도 없고, 사회주의 국가라고 불릴 만큼 복지 제도를 잘 갖춘 캐나다에서조차 치과치료는 비싸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우리는 다른 질병들처럼 ‘치병(齒病)’을 운 좋게 피해갈 수 있기를 염원할 수 없다. 치아에 문제가 생기리라는 것은 거의 누구에게나 예정된 수순이다. 그리고 뿌리 뽑힌 치아는 일상의 행복도 뿌리 뽑아버린다.

그렇다면 쿠바는 어떨까? 이곳에서 치아와 관련된 환자는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 치료비만 기준으로 삼는다면 쿠바의 치과 치료는 충분히 파격적이다. 이곳의 무상 의료 시스템은 치과라고 해서 열외를 두지 않는다. 쿠바에서는 치과를 구강클리닉(clínica estomatológica)이라고 부르고, 각 뽈리끌리니꼬마다 하나씩 배치해두었다. 이곳을 방문할 때 쿠바인들이 필요한 것은 오직 하나다. 신분증이다. 여느 꼰술또리오나 뽈리끌리니꼬를 방문할 때와 다를 바가 없다. 차이점이 있다면 딱 하나, 교정이나 틀니를 하는 경우 10페소(한국 돈으로 약 500원)를 지불해야 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지불은 한 번 뿐이고, 사후관리는 모두 무상이다. 다른 건 몰라도 이 섬나라에서 치과 비용 때문에 스트레스 받을 일은 없어 보인다.

뽈리끌리니꼬 앞에서 치과 치료를 기다리고 있는 아이 (제공=김해완)

하지만 환자에게 무료라고 해서 치료 자체가 무상이 되는 건 아니지 않은가? 환자가 지갑을 열지 않아도 된다면, 치료의 대가는 ‘다른 방식으로’ 치러지고 있는 게 아닐까? 그 속이야기가 궁금해서 치과의사를 직접 찾아갔다. 그리고 물어보았다. 구강 클리닉과 다른 클리닉의 차이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녀는 곧바로 대답했다. “값비싸다”고. 클리닉을 세팅하기 위해서 필요한 금액을 생각해봐도 그렇고, 건강은 만인이 누려야할 마땅한 권리라고 천명한 쿠바 의료의 가치관에 입각해 봐도 그렇다고 했다.

전자의 경우는 이해하기 쉽다. 일반 클리닉과 달리 구강클리닉에는 유니트체어(dental unit chair)가 필요하다. 유니트체어는 가격도 낮지 않을뿐더러 꾸준한 유지·보수가 필요하다. 돈이 더 들어갈 수밖에 없다. 하지만 후자는 좀 의미심장하다. 치과 치료가 물질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가치관의 측면에서도 ‘비싸다’는 건 과연 무슨 뜻일까? 그녀는 이렇게 부연설명을 했다. 생존의 관점으로 보았을 때, 치아는 충분조건이기는 해도 필수조건으로 여겨지리라는 법은 없다. 저작(咀嚼) 활동이 수월하다면 당연히 건강에 도움이 된다. 그렇지만 치아 몇 개가 없어진다고 해서 그 때문에 곧바로 목숨을 잃지는 않는다.

구강클리닉의 내부 모습. (제공=김해완)
구강클리닉의 내부 모습. (제공=김해완)

따라서, 쿠바처럼 낮은 보폭으로 살아남아야 하는 개발도상국에서 치과 치료는 늘 우선순위에서 밀렸다. 해결해야 하는 다른 의료 문제가 산적해있기 때문이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저소득국가에서 의료 보험이 보장하는 치과 치료 영역이 전체의 35% 밖에 되지 않는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접근성도 현격히 떨어진다. 세계치과연합(World Dental Federation)에 따르면 유럽에서는 인구 대비 치과 의사의 비율이 2천 대 1인 반면, 아프리카 대륙은 15만 대 1이다. 인도나 브라질처럼 빠른 속도로 치과 의사를 배출해내는 중진국의 경우에도 두뇌유출과 도농격차가 심하기 때문에, 변두리 지역의 상황은 좋지 않다.

그러나 쿠바의 의료 제도는 한결 같이 치과 치료를 배제하지 않았다. 의료 개혁 초창기에도, 특별시기 때도, 지금도 말이다. 전 세계 인구의 60%가 치과에 접근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쿠바의 젊은이들 중 78%는 타고난 치아를 모두 온전히 보존하고 있다. (Pan American Health Organization 2007년 자료 참고) 이곳의 치과 치료는 선진국처럼 발전을 거듭하다 못해 미용의 영역으로 변신하지도 않았지만, 저소득국가처럼 유복한 도시생활인이나 누리는 사치의 영역으로 고립되지도 않았다.

어째서 그러한가. 건강(salud)이란 생존(sobrevivencia)과 유지(mantenimiento)를 넘어서 행복을 추구하는 행위라고, 쿠바 의학이 정의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치아 없이는 행복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쿠바의 구강클리닉은 이 철학이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가장 선명한 실천이다. 인터뷰에 응한 쿠바 치과의사가 ‘값비싸다’고 표현했을 때, 그녀는 실제 가격뿐만 아니라 이런 상징을 암시했으리라.

문제는 철학으로도, 그 철학의 실천으로도 넘을 수 없는 현실이다. 가난한 국가살림과 미국의 경제봉쇄는 치과의사들의 소명의식으로 극복할 수 있는 종류의 문제가 아니다. 치과 치료에 필요한 도구들은 모두 값싸고 저렴한 재질로만 수입된다. 충전재 같은 경우는 간혹 레진이 있을 때도 있지만 사실상 아말감만 사용한다. 임플란트 같은 경우는 아예 불가능하다고 보면 된다. 일반 클리닉이 아닌 특수 클리닉에서 드물게 실행된다고는 하지만, 앞니 두 개가 다 부러질 만큼 치명적인 사고에 한해서만 허락된다. 또, 신경 치료도 웬만큼 큰 수술이 아닌 이상 마취 없이 진행된다. 마취제도 부족하기 때문이다. (마취 없이 신경치료를 마친 한 친구는 뇌를 시원하게 긁어내는 기분이었다고 묘사했다.) 가장 고질적인 문제는 유니트체어의 부족이다. 의사를 아무리 많이 배출해내도 유니트체어가 부족하다면 치료에 한계가 생길 수밖에 없다. 결국 다른 클리닉에서 발생하는 ‘교통체증’이 구강클리닉에서는 더 증가하게 된다.

구강클리닉의 내부 모습. (제공=김해완)
구강클리닉의 내부 모습. (제공=김해완)

이것이 쿠바 치과가 치르고 있는 실제 비용이다. 환자들의 기다림, 의사의 과로, 치료 도구의 질적 저하, 편치 않은 치료 과정. 자, 이제 비용을 비교해보자. 간단한 치과 치료를 받기 위해 120만원을 내야 하는 상황과, 치료가 무상인 대신 일주일을 기다리고 마취제 없이 치료받아야 하는 상황이 있다. 어느 쪽을 택하겠는가? 돈이 없다면 그저 치료받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해하며 후자를 택할 것이다. 그러나 120만원이 부담스럽지 않을 만큼 여유가 있다면 전자를 택할 것이다. 이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나’의 안위와 관련되었을 때, 특히 몸과 관련되었을 때 우리는 거의 무조건적으로 더 나은 것을 바라는 것이다.

이런 즉각적인 마음을 투사해서 바라본다면 쿠바의 의료 현장은 앞서 언급한 제3세계의 상황과 다를 바 없어 보일 것이다. 그러나 계속 강조해왔고 또 앞으로도 강조하겠지만, 쿠바 의료가 겪고 있는 어려움을 의료의 질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쿠바 의료가 현재 치르고 있는 비용은 의료 자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외부 영역인 경제의 결과이며, 합리적인 숫자로 무장한 경제는 사실 불균형한 힘의 논리와 역사가 남겨준 부조리한 부채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세계다. 이 거대한 세계를 ‘사람을 살리겠다’는 소명 하나만을 앞세워 완전히 탈출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내부에서 변화를 꾀할 수 있는 여지가 아예 없는 것도 아니다. 의료의 진정한 저력은 변화를 이끌어내는 이 자유 속에 있다.

쿠바의 치과의료를 지탱하는 첫 번째 저력은 의사들의 질이다. 이곳에서는 치과의사들의 평균 실력이 일반 의사들보다 더 높다고 여겨진다. 이는 치대의 특수성 때문이다. 의대보다 치대의 모집 인원이 훨씬 더 적기 때문에, 입학 때부터 경쟁이 세다. 낮은 커트라인 때문에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도전했다가 학년이 거듭될수록 소수만 남는 일반 의대와 달리, 치대에는 처음부터 공부를 원하는 소수의 학생들이 모여서 끝까지 전공을 마친다. 적은 월급을 감수하고서도 기나긴 공부 과정에 뛰어든 것도 놀라운데, 거기에 열정까지 더해졌으니 이들이 훌륭한 의사가 되리라는 것은 쉬이 짐작할 수 있다.

그 다음 요소는 사회의 저력이다. 쿠바 사회는 치아 건강을 위한 예방 교육을 보급하는데 힘쓴다. 이 수업은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즉 의무 교육 기간 내내 유지된다. 불소 가글도 학교를 통해서 정기적으로 제공된다. 예방 교육은 학교 밖에서도 멈추지 않는다. 구강클리닉에서는 ‘장애인들의 치아 건강 향상을 위한 프로그램’, ‘노인들을 위한 치아 관리 프로그램’처럼 여러 가지 프로젝트를 실행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환자의 저력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쿠바인들은 불평의 달인이지만 기다림의 달인이기도 하다. 부서진 유니트 체어에 앉아 어렵게 진료를 마쳐도, 그들은 치료가 가능하다는 사실에 대한 감사함을 잊지 않는다.

쿠바의 치과 의사들은 쿠바인의 평균적인 치아 상태를 ‘보통’이라고 평가한다. 400년 간 스페인의 설탕 농장으로 기능하면서 설탕 없이 못 사는 나라가 된 쿠바다. 설탕의 유행과 경제봉쇄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치아 건강은 평타를 친다. 달리 말하면, 의료의 저력을 상승시키는 것 역시 이 섬나라가 치과치료를 위해 치르는 비용이라는 뜻이다. 가난의 비용이 꼭 견디고 버티고 포기하는 수동적인 방식으로만 치러지라는 법은 없다. 능동적으로 관계를 재설정하는 것으로도 대가를 치를 수 있다.

의료의 발전이 거의 불가능한 조건에서 출발했던 쿠바가 예방의학으로 명성을 날릴 수 있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예방의학은 삶의 관계를 파고든다. 병원과 의사, 의사와 환자, 그리고 환자와 환자 자신의 몸 사이의 관계를 바꾼다. 이런 예방의학이 필수적으로 힘을 쏟아야 하는 대상이 바로 치아다. 건강의 기초 중의 기초, 체질과 상관없이 누구나 다 가꿔야 하는 재산이다. 그래서 치아는 값비싼 행복이다. 돈이든, 습관이든, 교육이든, 사회적 관계든, 반드시 노력을 기울여야만 유지할 수 있다. 활짝 웃을 때 드러나는 쿠바 아이들의 치아에는 이처럼 많은 노고가 숨어 있다.

내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한국에 갈 날까지 치과 검진을 미루고 있다. (뉴욕에서는 돈이 없었는데 쿠바에서는 시간이 없다!) 그렇지만 마음은 훨씬 편안하다. 혹여나 치아에 문제가 생겨도 뉴욕에서처럼 극단적인 상황으로 몰리지는 않을 테니까. 무엇보다 쿠바는 내게 단순한 진실을 반복해서 가르쳐주고 있다. 삼 년 전 나를 구할 수 있었던 것은 돈도, 보험도, 치과의사 친구도 아니었다. 그것은 꾸준한 칫솔질뿐이었다. 예방을 위한 양치질만이 치아를 편안하게 하리라. 내 삶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 결국 나 자신인 것처럼.

아바나 비에하의 까삐똘리오 앞에서 앉아있는 아이들 (제공=김해완)

 

김해완(쿠바 아바나대학 의과대학)

 

Tag
#N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