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벤트가 많은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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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건치신문
  • 승인 2019.12.18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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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 부산·경남지부…이수근 회원 인터뷰

본 글은 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 부산·경남지부(공동대표 조병준 김권수) 2019년 2호 소식지에 게재된 글의 전문이다.

- 편집자


주변 분들의 와병 소식이 부쩍 많이 들리는 요즘입니다. ‘내 나이가 그럴 때인가?’ 싶은 생각이 들면서 심히 감정이입이 되고 ‘괜찮은지?’ 묻고 싶지만 쉬이 묻지 못하고 걱정이 됩니다. 사람 마음은 매한가지 인가 봅니다. 소식이 궁금한 회원을 물어보니 큰 병을 지나온 이수근 선생님 이름이 제일 많이 나오네요. 그래서 편집부가 대신 찾아갔습니다.


 

이수근 회원 (제공=부경건치)

Q1. 많은 분들이 선생님의 요즘 근황이 제일궁금하다 합니다. 어찌 지내시는지?

아시는 것처럼 작년 1월에 식도암으로 수술을 했어요. 요즘은 주중에 치과 환자 보고 주말마다 틈틈이 농사지으며 지내요. 칠암 옆에 옛집을 사놓은 게 있는데 주말에 들러 집도 조금씩 손보고 농사일도 합니다. 지난 주말엔 창고를 짓느라고 용접하는 걸 한번 배워볼 요량으로 조금 거들었더니 새벽에 눈이 아파서 깨어서 1시간가량 눈물을 흘리고 있었어요. 역시 ‘전문가의 일에 아무나 도전하는 게 아니구나~’ 했어요.

치과 일은 예전에 비해 환자가 많이 줄어 힘들지는 않아요. 직원들이 1시간 환자 보고 10분 쉬는 패턴을 만들어 주어서 쉬엄쉬엄 진료할 수 있어요. 중간에 낮잠을 자지 않으면 힘에 부쳐서 낮잠도 자고. 요즘 퇴근 후엔 귀가해서 밥 먹고 선희(사모님성함입니다!-편집자)랑 맞고를 쳐요.

Q2. 병환은 어떤 상탠지?

위 상층부 1/3 부위까지 절제를 한 상태라 한 번 에 많이 먹지 못해요. 단백질 위주로 조금씩 중간중간에 먹어 주라는데 일하다 보면 그러지를 잘 못해요. 원래 식탐이 많은 편은 아니라 많이 불편하지는 않는데 가끔씩 맛있는 음식을 먹다 과식하게 되면 구토가 올라와 불편해요. 소주와 커피를 좋아하는데 이제 소주는 안 마시고 커피도 매일 1잔 마시는 걸로 만족하고 있어요. 소주 생각이 많이 나면 와인이나 매실주를 1잔씩 마시기도 해요. 와인잔은 제법 크니까 1잔만 먹어도 어느 정도 양이 되어 괜찮아요^^ 예전에는 매일 술을 마 시다시피 하니까 술을 안 마시면 잠이 안 왔는데 이젠 술을 안 마셔도 잘 자요.

따로 운동을 하거나 챙겨 먹는 건 없고, 먹는 양이 줄다보니 체중이 많이 빠졌어요. 아프기 전에 몸무게가 74kg이었는데 10kg 정도 빠져서 예전 입던 옷들이 헐렁해서 못 입어요. 어머니가 연세가 많으셔서 내가 아픈 줄 알면 큰일 날까 걱정되어 제 상황을 말씀을 안 드렸더니 제 딸아이에게 ‘느그 아부지 와 저래 말랐노?’ 물으시더래요. 딸이 ‘아빠 다이어트해~’ 했다길래 저도 어머니께 ‘어머니도 살 빼셔야 해요~’ 했어요. 특별한 불편감은 없어 몸 살피며 4개월 마다 follow-up check 하고 있습니다.

Q3. 큰 병을 지나고 나니 몸과 마음이 많이 달라졌다고 느끼는가요?

암 수술도 2번째고, 30대에 큰 사고도 있었고 워낙 이벤트가 많게 살아온 인생이라 여느 때와 같이 가볍게 생각했어요. 수술하고 1주일 쯤 지나면 바로 일상으로 복귀할 줄 알았어요. 수술 전날에도 1주일 후 환자 볼 스케줄을 잡을 정도였는데 막상 수술하고 보니 회복이 생각만큼 빨리 되지 않았어요. 위 위치가 잘못돼서 재수술도 하다 보니 1달을 꼬박 입원해 있었고 치과 복귀는 2~3달 후에 했지요. 몸이 쉬이 피로해지는 점이 좀 달라졌고, 옆에서 나보다 더 마음 졸인 집사람한테 더 많이 미안해졌지요. 이전에 비해 크게 많이 달라진 점은 없는 것 같아요.

Q4. 그러고 보니 큰 일이 참 많으셨네요. 교통사고로 오래 누워 계셨던 건 부산치대의 유명한 대형 사고로 두고두고 회자되는 일이네요.

공보의 1년차 때 후배 차를 타고 울산 상가에다녀 오는 길이었어요. 전후 기억은 잘 안 나지만 옆에 가던 트럭의 보복 운전 때문에 차를 조수석 쪽으로 틀었나 봐요. 측두골 함몰로 한 달 정도는 혼수상태로 있었고 6개월 정도 병원에 입원해 있었어요. 한 달 이후에도 정신이 오락가락해서 사람을 보면 이름은 모르고 별명을 불렀다는데 저는 기억이 없어요. 토성동 대학병원에 입원해 있으니 치대 선, 후배들이 실습복 입고 문병을 많이 왔어요. 같은 병실을 쓰던 환자들이 ‘왜 의사들이 전부 저 환자만 봐주냐?’고 컴플레인을 많이 했다는 후문이 있어요.

Q5. 학교 다니던 시절 별명이 ‘고정 남파 간첩’이라고 할 만큼 학생운동을 열심히 하셨다고…

의,치대에 많지 않은 학생운동권이고 부경총련정책위원장을 하다 보니 그런 이미지가 있었어요. 제가 85학번인데 예과 2학년 때인 1986년 10월에 건국대 사태가 일어나요. 신문에 연행된 사람 이름이 나오는데 고등학교 때 절친이 아주 많았어요. 이 친구들이 하는 일이라면 뭔가 이유와 의미가 있을 거라는 막연한 생각에 학내 집회에 나가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들어보기 시작했어요. 막상 들어보니 주장하는 바가 맞는 말이기도 했고 거기서 만난 선배와 같이 공부하면서 생각의 영역이 좀 더 넓어지기도 했어요.

87년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때는 새벽에 프린트된 유인물을 받아와서 신문지에 싸서 숨기고 지하철에서 나눠주는 일을 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별것 아닌 일이지만 엄혹했던 그 시절에는 매우 위험한 일이었거든요. 그 때 의대에서 나와서 같이 유인물 나눠주던 친구가 선희예요. 덕분에 결혼하게 되었네요. 부경총련 활동 중에 의장이 수배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경상대에 회의하러 갔다가 경찰에 연행되어 창원 대공분실까지 간 적은 있어요. 가명을 쓰며 활동했고 중요한 자료는 연행되기 전에 기지를 발휘해서 숨기는 바람에 훈방으로 풀려났어요. 그때는 학생운동 좀 한다면 한, 두번씩 구속당하던 시기라 구속 한 번 안되고 지나온 게 별스럽긴 했지요.

Q6. 그 때 학생 운동의 주요 쟁점은 무엇이었나요?

87년 민주화 항쟁을 지나면서 학내 민주화가 주요한 관심사가 되었어요. 치대는 실습공간을 비롯한 학내 시설이 정말 열악했거든요. 본과 1학년 때 학생회 기획부장을 맡으면서 학자추(학원자주화 추진위원회)를 시작했어요. 전국의 국립대학교 시설규정을 다 뒤져서 요구사항을 준비하고 병원장실 점거까지 했어요. 민주화 요구에 대한 시대적 분위기도 있고 학생들의 호응도 좋아서 수업거부도 했어요. 그 성과로 교수-학생협의회를 구성하고 원내 실습공간을 내 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냈어요.

하지만 치대 교수님들이 작정하고 학생회장과 이수근을 유급시키겠다고 마음먹고는 몇 번의 재시 끝에 제 점수를 기준으로 그 밑의 점수대학생을 10명가량 대량 유급시켰어요. 학생회장도 잘리고 저도 잘리고 나니 움직일 동력을 잃게 되어 교학협의회도 한번 열리고 흐지부지 없었던 일이 되어버렸어요. 많이 준비해온 걸 제대로 못 펼친 아쉬움이 많아요.

Q7. 그 아쉬움으로 졸업 후에 정당 활동을 열심히 하신 건가요?

졸업하면서 사회진출을 고민했어요. 치과의사로 살 것인지, 직업운동을 해야할지 진보정치를 해야할지. 진보운동 자체가 정당운동 없이는 자리잡기 힘들겠다는 판단 하에 합법정당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 생각을 좇아 97년 당시 민주노총 위원장이던 권영길을 대선후보로 추대하는 국민승리 21을 시작으로 민주노동당, 통합진보당, 진보신당, 정의당 까지 정당 운동 주위를 계속 기웃거렸어요^^. 매 순간마다 옳다고 생각하며 여기까지 왔네요. 세상이 꼭 내가 원한 방향으로 움직이지는 않았고, 항상 좋은 방향으로만 가지도 않았지만 사회는 변화, 발전해 오고 있는 것 같아요.

이수근 회원 (제공=부경건치)

Q8. 그러고 보니 조국 전 장관 사태로 한참논란의 중심에 있던 바로 그 586 세대이시네요.

80년대와 90년대 형식적인 민주주의가 보장받지 못하던 시절에는 우리 세대에게 그 엄중했던 시기를 뚫고 나오는 역할이 주어졌어요. 이제 사회는 그 단계를 넘어서 내용적 민주주의를 채워나가야 하는 시기가 되었는데 우리 세대가 아직 자기상을 못 찾은 것 같아요. 형식적인 민주주의 쟁취에 심취해서 그저 그 자리에 머문 친구들이 자신의 역할에 대한 모색에 실패하면서 문제를 일으키지 않나 싶어요. 세대 간의 문제도 같은 맥락이겠지요. 다양화된 세상에서 각 세대가 사회적 힘을 갖는 방식을 아직 찾지 못했고 어떤 역할을 해야 할 지 고민을 계속 해야겠지요. 내가 꼭 답을 쥐고 그림을 그린다는 것 자체가 현대적인 방식이 아니기도 하구요.

Q9. 선생님 또래가 한창 활동하는 시기를 지나 다른 동력을 찾아야 하는 건치에게도 해당되는 숙제이겠지요. 앞으로 건치는 어떤 포지셔닝을 찾아야할까요?

건치가 사회운동에서 도드라지는 위치를 차지하지는 않았지만 직능단체 중에서 유의미한 자기의 역할을 하고 있어요. 다음 단계에 대한 고민은 아직 탐구해야 하는 몫이니 매 순간 고민하며 시절에 맞는 역할을 찾아 해야지요. 조직이란 게 생명력 있는 살아있는 존재라 끈을 놓지 않고 고민하다 보면 우리의 길을 찾을 수 있을 거예요.

Q10. 앞으로 계획이나 하고 싶은 일이 있으신가요?

치과 은퇴 계획은 아직 없어요. 그리 오래 하고싶지는 않은데 치과 일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별로없어서…, 주말 농부 일을 열심히 공부하고 있긴 해요. 전지, 과수재배, 목공 등을 책으로 배우고 있어요. 작년에 책에서 배운 대로 열심히 과일 나무 가지치기를 해줬더니 올해에 열매가 안 맺더구만요. 비록 맘대로 안 될 때도 있지만 손이 간만큼 정직하게결실을 보여 주니 농사 일이 재미있어요. 건치 모임에 나가볼까 했는데 고민 없이 나가려니 미안한 마음에 선뜻 나서지를 못하고 있어요. 일상을 회복하면서 건치도 포함해서 어딘가로 복귀를 해야겠다는 생각은 하고 있어요.

사람을 만나 ‘지인’이라는 관계가 되고나면 가끔 이 사람과 내가 모르는 사이였던 시절의 모습을 상상해 보곤 합니다. 내가 철 모르고 들판을 뛰어다니던 87년이 선생님에게는 엄중한 민주화 운동의 시간, 내가 대입이 세상의 전부이던 90년대 초반이 선생님에게는 학원자주화의 시간, 치대 공부에 숨이 턱까지 찼던 90년대 후반은 선생님의 진보정당 건설의 시간. 서로가 존재도 모르고 사는 사이였지만 알게 모르게 큰 영향을 주었던 사람을 알게 되는 관계맺음이 신기하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합니다. 쉽게 뭉뚱그려서 586이라 이름 붙이기도 하고 싸잡아 비난하기도 하지만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소중한 것들을 내걸고 싸운 치열한 시간을 보낸 선배들이 있기에 오늘의 이 자유로운 공기를 말 그대로 ‘자유롭게’ 누리고, 우리가 ‘건치’라는 이름으로 모여, 되지 않는 고민을 나눌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선배들 ‘덕분에’ 후배들은 좀 더 나은 세상에서 좀 더 나은 꿈을 꾸게 되겠지요. 그것만 해도 ‘덕분’이니 모임에는 고민없이 오셔도 됩니다. 단단하게 살아가는 선배의 뒷모습을 보며 가는 것만으로도 후배에게는 큰 힘이 되니까요. 서로의 모습을 바라보며 사는 이 시간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 ‘덕분’이 되도록 우리 오래오래 보고 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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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의동 2019-12-20 08:56:42
이수근 선생님이 85학번이셨군요...건강 잘 챙기시고, 건치에서도 오랫만에 얼굴 뵈었으면 좋겠네요. 좋은 인터뷰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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