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탕·중독·가난의 연쇄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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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탕·중독·가난의 연쇄고리
  • 김해완
  • 승인 2019.12.18 17:37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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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의료를 찾아서 10] 쿠바 아바나 의과대학 김해완

'어쩌다 보니' 본지와 인연을 맺게 된 쿠바 아바나 의과대학에 재학 중인 김해완 씨는 지난 8월부터 격주로 『쿠바의 의료 실험 - 일상의 의학을 찾아서』를 연재를 시작했다.

김해완 씨는 아바나 의대를 다니면서, 의대생으로서 보고 또 경험한 쿠바 의료시스템을 '일상의 의학'이라 칭한다. 대단한 의료기술은 없지만, 일상의 자질구레한 문제(병)을 해결하며, 병과 의료와 사람을 둘러싼 관계를 바꾼 쿠바의 의료시스템을 소개할 예정이다.

- 편집자 주

 

마을마다 있는 보데가. 간판이 없어서 외지인들은 한 번에 알아채기 힘들다. (제공=김해완)

쿠바 경제는 월급에 물가상승률이 반영되지 않기로 유명하다. 쿠바인들이 받는 한 달 평균 월급은 3만원에서 5만원 사이지만, 슈퍼마켓에서 주스 한 병을 살 가격은 거의 3천원이다. 이 때문에 쿠바인들은 국가가 주는 월급 이외의 수입처를 찾아 나서야만 한다. 이는 정부의 배급 정책이 유명무실해졌기 때문이다. 쿠바인들은 과거에 노트 한 권의 두께만 했었던 배급표가 이제는 자기들 지갑만큼 얇아졌다고 불평을 한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제는 꿈처럼 느껴지는 과거에 배급받았던 생선과 고기를 안타깝게 떠올리면서, 사람들은 ‘보데가(Bodega)’에 줄을 선다. 이곳은 사람들이 몇몇 물품들을 배급표와 교환하거나 아주 값싼 가격에 구매할 수 있는 장소다. 물론 보데가에는 더 이상 생선과 고기가 없다. 쌀, 소금, 설탕, 커피처럼 기본적인 식료품이 구비되어 있을 따름이다. 사실 쿠바의 낮은 자급자족률을 생각한다면 이 정도 배급이 유지되고 있는 것만 해도 기적이다. 쌀은 베트남에서 거의 무상으로 원조 받고 있는 형편이다. 소금 역시 작년만 해도 갑자기 부족해져서 스페인에서 수입해야 했다.

마을마다 있는 보데가. 간판이 없어서 외지인들은 한 번에 알아채기 힘들다. (제공=김해완)

그런데 이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절대로 동이 나지 않는 식품이 딱 하나 있다. 바로 설탕이다. 아쑤깔(Azúcar)! 설탕은 쿠바의 진정한 자족 상품이다. 쿠바 땅에서 근 400년 동안 설탕이 부족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외국 자본이 스며들고 있는 21세기에도, 구소련이 붕괴되었던 90년대에도, 스페인 지배 체제 하에서 농민들이 신음했었던 식민지 시기에도, 설탕만큼은 넘쳐났다. 왜일까? 쿠바는 애초에 스페인의 거대한 설탕농장으로 개발된 섬이기 때문이다. 16세기, 이 아름다운 카리브해 섬이 사실 금이 한 조각도 없는 ‘빈 깡통’이라는 것을 알게 된 스페인 제국은 이곳에 설탕 플랜테이션을 계획한다. 설탕이 쿠바의 존재이유였고, 설탕 덕분에 쿠바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 1959년 혁명 정부는 단일 작물 경제 체제에서 벗어나겠다며 농업 개혁을 실시했지만, 갖가지 실패 끝에 역사의 고리를 끊지 못하고 결국 설탕 재배로 되돌아갔다.

땅과 작물과 사람 사이의 기구한 운명. 이 오래된 시간은 오늘날 쿠바 의사들에게 스트레스를 안겨주고 있다. 설탕이 스며들지 않은 음식이 없고, 설탕에 잠식되지 않은 신체를 찾기 어렵다. 설탕 과다 섭취를 기준으로 국가 순위를 만든다면 쿠바는 분명 다섯 손가락 안에 들 것이다. 아침마다 마시는 진한 에스프레소 한 잔에 설탕 두 스푼, 간식으로 마시는 요거트에 설탕 세 스푼, 젊은이들이 즐겨 찾는 탄산음료와 온 가족이 나누는 디저트에는 더욱이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설탕이 들어 있다. 식재료가 제한되고 또 식문화가 단조로운 쿠바에서 무설탕 식단을 유지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의사들의 끊임없는 잔소리와 교육에 힘입어, 쿠바인들도 이제는 설탕이 건강의 적이라는 것을 안다. 그렇지만 이 ‘팩트’ 한 조각이 낡은 습관을 단번에 뿌리 뽑을 수는 없다. 그리하여, 꼰술또리오와 뽈리끌리니꼬에서는 설탕을 먹고 무럭무럭 자란 병들이 활개를 친다. 가장 대표적인 병은 비만이다. 세포들은 각자 당(糖)을 저장하는 공간을 가지고 있다. 만약 설탕이 저장 공간을 초과해서 흡입된다면, 이 여분의 당들은 분해되었다가 지방으로 재합성된다. 설탕이 지방이 되는 것이다. 지방 세포는 일반 세포보다 더 쫀득쫀득하게 잘 늘어나기 때문에 저장이 쉽다. 그렇게 지방 조직이 늘어나는 만큼 몸은 과체중이 되고, 또 비만이 된다. 실제로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쿠바 인구의 23%가 비만이다. 절반이 넘는 58%는 과체중이다. 아바나의 길거리에는 옆 동네 미국만큼 몸집이 거대한 사람들이 많다.

젊은 모녀가 바닷가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세계 어디나 그렇듯이, 어린아이나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비만이 큰 문제가 아니다. 40대에 가까워지면서 신체에 큰 변화가 일어난다. (제공=김해완)

하지만 지방의 저장고에도 한계가 있다. 제 자리를 찾지 못한 여분의 지방은 핏속을 떠돌다가 그냥 혈관 내벽에 주저앉는다. 이것이 소위 ‘나쁜 콜레스테롤’로 알려진 LDL(low-density lipoprotein)이다. 오래된 LDL는 산화되면서 망가지고, 몸속의 청소부인 대식세포는 LDL를 잡아먹으면서 혈관 벽에 상처를 낸다. 그 위에 혈관의 근육섬유질과 칼슘덩어리까지 엉키면서 딱딱한 조직을 형성한다. 이것이 바로 아테롬(atheroma)이다.

아테롬이 생기면 혈관 또한 딱딱해질 수밖에 없다. 특히 심장에서 혈액을 받아서 온몸으로 운반해야 하는 동맥에게 이런 경화(硬化)는 치명적이다. 동맥경화증은 필연적으로 고혈압을 야기한다. 혈관의 저항력이 세지니, 심장의 입장에서는 그만큼 압력을 올려야만 피를 뿜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고혈압은 쿠바인들 사이에서 가장 흔하게 찾아볼 수 있는 병 중 하나가 되었다. 쿠바 보건부의 웹사이트인 인포메드(infoMed)에 2017년 출판된 『쿠바 고혈압 안내(Guía Cubana de Hipertensión Arterial)』를 보면, 15세 이상인 쿠바 인구의 3명 중 1명이 고혈압이다. 또, 심장 질환에 의한 사망률은 10만 명 당 218.8명으로 사망 순위 2위를 차지하고 있다.

교수가 체지방을 분석하는 기계를 보여주고 있다. 사람들의 체지방을 줄이는 것은 쿠바 의료계에서 핵심 이슈다. (제공=김해완)

설탕을 향한 탐심의 대가를 세포들이 대신 치르는 것일까? 설탕의 흡수를 위해 꼭 필요한 인슐린을 세포가 받아들이지 않을 때 당뇨병 2형이 발생한다. 그리고 현재 쿠바에서 10명 중 한 명은 당뇨병 환자다. 여기에는 설탕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을 것이 분명하다. 설탕 섭취가 당뇨병을 어떻게 직접적으로 유발하는지는 학계에서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비만이 당뇨병 발생 확률을 높인다는 것은 임상에서 확실히 확인되었다.

이것이 설탕과 병과 삶이 공생하는 쿠바의 일상이다. 꼰술또리오에서 파견되어 가정 방문을 가보면, 가족마다 꼭 한 명은 비만, 당뇨병, 고혈압이라는 ‘삼세트’ 중 하나를 가지고 있다. 혈압기를 준비하고 인슐린 주사를 구비하는 것은 뽈리끌리니꼬에서 가장 기본적인 활동이 되었다. 이런 환자들이 꼰술또리오나 뽈리끌리니꼬를 방문하면, 가족주치의는 하도 반복해서 잠꼬대로도 읊을 수 있는 처방전을 내놓는다. 설탕 섭취를 줄이십시오. 기름 섭취도 줄이십시오. 걷는 시간을 늘리십시오. 모두가 다 아는 이야기다. 그리고 환자의 열에 아홉은 이 말을 따르지 않으리라는 것도 모두들 알고 있다. 왜냐하면 이 세 가지 병 속에는 진료기록에 적히지 않은 진정한 병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중독이라는 병이다. 설탕 중독을 치료하지 않는 한 다른 병들은 근치될 수 없다.

이 중독의 깊이는 아득하다. 위에서 언급했지만, 이것은 근대 제국주의가 남겨놓은 유산이기 때문이다. 가난한 땅을 벗어나 어떻게든 삶의 돌파구를 만들어보려고 했던 유럽인들은 고향과 완전히 다른 아메리카라는 자연을 만났다. 그리고 그 자연 속에서 본토 사람들의 욕망을 사로잡을 수 있는 ‘상품’을 개발했다. 제국주의 시대에 히트를 친 식민지 상품은 대부분 중독성이 강하다. 커피, 설탕, 담배, 아편, 기타 등등. 이국의 향기를 품고 수입된 물품은 말 그대로 유럽인들의 몸을 사로잡았고, 소비자의 요구가 거세질수록 식민지는 더욱 빠르게 플랜테이션 일색이 되었다. 거대한 자연이 중독 상품을 키워내는 땅으로 탈바꿈된 것이다. 중독은 계급 상하의 구별 없이, 지구 동서의 경계 너머로 퍼져나갔다. 18세기 즈음 되자 가난한 영국 가족의 식탁 위에도 커피가 반드시 올라갈 정도였다.

폭풍 같은 식민지 시대가 다 지나간 현재, 우리 모두는 돈이 있다면 중독 물질에 접근할 수 있는 ‘평등’을 누리고 있다. 남미에서 수입되는 커피 없이, 동남아에서 수입되는 설탕 없이 사는 일상을 상상해보라. 설탕을 금지당한 쿠바인들이 보일 반응을 우리 역시 보이지 않을까? 경제봉쇄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쿠바는 지난 400년의 업을 더 극적으로 소화해야 하는 땅이 되었을 뿐이다. 하지만 이것이 쿠바만의 업은 아니다.

말레꼰을 따라 조깅하거나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 운동은 꼰술또리오 가족주치의가 반드시 권하는 생활습관이다. (제공=김해완)

쿠바의 건강 상태는 새로운 문제의식을 시사한다. 가난과 건강의 박탈 사이의 필연적 연관성은 줄곧 사회 문제로서 제기되어 왔다. 그렇지만 이때 가난을 꼭 물자의 결핍으로만 정의할 필요는 없다. 다양성의 박탈 또한 가난이다. 중독은 신체가 외부와 소통하는 채널이 하나로 좁아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채널화는 가장 반생명적인 활동이다. 병은 삶 속에서 다양한 경로로 표현될 수 있다.

태아로 자궁 속에 있을 때 끼어든 한 순간의 우연 때문에 장애를 안고 태어날 수도 있고, 유전자에 새겨져 대대로 이어지는 병을 받았을 수도 있으며, 예기치 못한 사고로 신체의 일부와 작별할 수도 있다. 이것들은 모두 생명이 삶이 되는 여정의 넓은 스펙트럼 속에 놓여 있다. 그러나 중독은 몸의 주도권을 외부 물질에 내어준다는 점에서 앞선 병들과 근본적으로 성격이 다르다. 이것은 생명을 무생물에 의해 표현당하는 것이요, 몸을 소유당하는 것이다. 이것이 가난한 생명이 아니면 무엇일까? 물자의 풍요 속에서도 신체는 얼마든지 가난해질 수 있다.

쿠바에서 설탕 중독의 조건이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듯이, 설탕의 늪에 빠진 몸도 하루아침에 구조되지는 않는다. 그래서 쿠바 일차 진료에서는 설탕과 관련된 병들을 거의 풍토병처럼 취급한다. 쿠바가 열대기후의 섬인 이상 뎅기열이나 지카 바이러스를 완전히 박멸할 수 없는 것처럼, 쿠바가 ‘쿠바’인 이상 설탕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는 것이다. 풍토병이라니, 어찌 보면 적확한 표현이다. 이것은 이 땅이 켜켜이 쌓아온 역사의 지층 속에서 만들어진 병이니 말이다. 하지만 신체를 변화시키는 것이 지독히도 어렵지만 또 가능한 것처럼, 이 섬나라에 녹아든 설탕의 독을 빼내는 것 역시 장기적으로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의지와 인내심을 잃어버리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앞으로 우리는 보게 될 것입니다. 왜 의사가 또한 농부가 되어야 하는지, 어떻게 그가 새로운 영양식품을 파종하는 법을 배우는지 말입니다. 그리고 농업과 가능성의 측면에서 볼 때 지구상에서 가장 풍요로운 나라 중 하나일지 모르는 작고 가난한 쿠바에서, 새 식품을 소비하려는 열정과 영양 구조를 다양화 하려는 열망의 씨앗을 사람들 사이에 심는 법을 그가 어떻게 배우는지 볼 것입니다.”

(1960년 8월 19일, 의대생과 건강 근무자들에게 한 연설 중에서)

체 게바라는 1960년 의료계 종사자들을 향해 이렇게 연설했다. 이 말은 혁명 60년을 맞이한 오늘날 더욱더 참된 말이 되었다. 쿠바의 의사들은 여전히 “새 식품을 소비하려는 (...) 열망의 씨앗”을 사람들 사이에 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 씨앗이 싹을 틔울 곳은 병원이 아니라 식탁이다. 보데가에는 채소, 고기, 생선 뿐만 아니라 이것들을 새롭게 조리해먹을 다양한 레시피가 필요하다. 새로운 삶의 방식, 새로운 신체가 필요하다.

마을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사람들. 차가 없고 대중교통을 이용해야만 하는 상황이 오히려 쿠바인들의 건강에는 더 도움이 되는지도 모른다. (제공=김해완)

 

 

김해완 (쿠바 아바나 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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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훈 2019-12-21 17:56:44
대단한 식견과 필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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