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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문: 하늘에 묻는다』영화 역사에 말을 걸다- 열 다섯 번째 이야기
박준영 | 승인 2020.01.06 18:14

크로스컬처 박준영 대표는 성균관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국대 대학원에서 영화를 전공했다. 언론과 방송계에서 밥을 먹고 살다가 지금은 역사콘텐츠로 쓰고 말하고 있다. 『나의 한국사 편력기』 와 『영화, 한국사에 말을 걸다』 등의 책을 냈다. 앞으로 매달 1회 영화나 드라마 속 역사 이야기들을 본지에 풀어낼 계획이다.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 편집자 주

(출처= 네이버영화)

영화 『천문: 하늘에 묻는다』 는 한마디로 세종과 장영실의 브로맨스 영화다. 조선만의 시간과 하늘을 열고자 했던 두 천재가 만나 서로를 아끼고 존중하며 새로운 조선을 만들어내는 시간을 감동적으로 그렸다.

당시 조선사회는 양천제의 철저한 계급사회였다. 천상천하 지엄한 임금과 아무리 손재주와 실력이 출중하다하나 이제 막 노비의 신분을 벗어난 평민과의 교류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세종은 능력우선주의자다. 관노인 장영실을 면천하고 종5품 행사직을 하사하며 서운관에서 새로운 발명품을 만들도록 독려와 조력을 아끼지 않는다.

여기에 세종의 위대함이 있다. 백성을 위해서라면, 조선을 발전시킬 수 있다면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불러들여 쓰임을 다하게 만드는 실질숭상의 군주였다. 이는 백성을 긍휼이 여겨 실행한 훈민정음 창제로까지 이어졌다.

장영실의 아버지는 원나라의 기술자라고 전해진다. 조선에 귀화토록 해 기술을 발휘토록 했고 기생과 결혼해 요즘말로 다문화가정을 이루었다. 장영실의 어린시절은 결코 행복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죽자 엄마는 관기가 됐고 아들 영실은 동래현의 관노가 된다. 그러나 영실은 어린 시절부터 남다른 손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뛰어난 실력이 당시 공조 참판 이천의 눈에 띄어 조정에 천거하게 되었고 이때부터 허드레 일을 하면서 궁궐 생활을 시작한다. 세종이 영실을 발탁하는 영화의 내용과는 다르게 이미 영실은 세종의 아버지 태종에게 재주를 인정 받았다. 세종실록을 보면 “장영실은 공교한 솜씨가 뛰어나 태종께서 보호하시었고 나 역시 이를 아낀다”고 적혀 있다.

(출처= 네이버영화)

면천을 했다고하나 고위직에 영실이 임명되자 대신들이 벌떼처럼 일어난다. 이는 영화에서도 그대로 반영된다. 나라의 근간을 흔드는 일이라며 정남손(김태우)을 비롯한 문무대신들이 극력 반대를 하지만 세종의 고집과 소신을 누가 꺽겠는가? 세종은 자신의 지식과 철학으로 신권(臣權)을 제압했다.

이후 세종은 장영실을 곁에 두고 조선만의 하늘과 시간을 측정하기 위한 천문 사업을 펼치기 시작한다. 먼저 장영실을 포함한 조선의 과학자들을 명나라에 유학 보내 선진 문물을 습득케했고 장영실은 자신의 뛰어난 재주로 관련지식을 빠르게 흡수한다. 그리고 조선에 돌아와선 천문을 연구하는 관청인 서운관의 학자들과 함께 여러 천문의기들을 발명해낸다.

사실 장영실의 자격루 발명은 15세기 당시 조선의 과학기술이 이미 세계적으로 수준급에 있음을 의미한다. 먼저 만들어졌던 앙부일구, 즉 해시계는 비가 오거나 날이 흐리면 시간 측정이 어려웠다. 그래서 부력을 이용한 물시계, 자격루가 만들어졌다. 측우기만 해도 이탈리아의 가스텔리보다 무려 200여 년 앞선 기술이었으며, 혼천의 등 당시 과학적인 기구를 이용해 하늘을 관측한 나라는 아랍과 중국뿐이었다.

특히 물시계 자격루의 원리가 영화에 잘 드러나 있으며, 1년의 길이를 측정하고 24절기를 관측할 수 있는 규표(圭表)라든지, 천체의 운행과 그 위치를 측정하던 천문 관측기 혼천의(渾天儀)도 영화에서 확인할 수 있으니 청소년들의 교육적 효과도 꽤 높은 영화임에 틀림없다.

(출처= 네이버영화)

순조롭게 흘러가던 세종과 장영실의 ‘신분 차이를 뛰어넘는’ 특별한 우정은 세종 24년에 일어난 ‘안여사건’(임금이 타는 가마 안여(安與)가 부서지는 사건)을 계기로 전환점을 맞게 된다.

대호군이 안여 만드는 것을 감독했는데 튼튼하게 만들지 못해 부러지고 허물어졌으므로 의금부에 내려 국문하게 하였다. - 세종실록 1442년 3월16일.

여기서부터 영화는 극적 긴장감과 클라이막스로 치닫게 되는데 수많은 발명품을 만들던 천하의 장영실이 임금의 가마 하나를 온전히 만들지 못했을까 하는 의문에서 영화 기획은 시작됐고 안여 사건 이후 장영실이 장 80대를 맞고 역사적 기록에서 사라져 행방이 묘연해지면서 작가의 상상력은 날개를 펴기 시작한다. 영화에선 힘들게 만든 간의대를 세종이 직접 부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역시 세종실록에 기록돼 있는 내용을 근거로 창작된 것이다.

 “이 간의대가 경회루에 세워져 있어 명나라 사신으로 하여금 보게 하는 것이 불가하므로 내 본래부터 옮겨 지으려 하였다.” - 세종실록 1443년 1월14일

천문 관측은 제후국도 할 수 있었지만, 소위 역(曆)을 만드는 것은 황제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조선정부는 때마침 온 중국 사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고 명나라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세종은 장영실을 희생양으로 삼을 수밖에 없지 않았겠느냐는 추측이 그래서 나온다. 간의대가 허물어진 시점이 바로 장영실이 쫓겨난 시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세종이 장영실의 목숨을 구해주기 위해, 장영실은 또한 그 나름대로 세종의 정치적 부담감을 덜어주기 위해 애쓰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아마 감독이 가장 말하고 싶었던 장면일 게다.

(출처= 네이버영화)

두 주인공 역할을 맡았던 한석규와 최민식의 케미는 일품이었는데 허진호 감독도 두 사람의 연기에 빠져 디렉팅 하는 것을 잊었을 정도였다니 우리나라 최고의 연기파 배우인 두 사람의 연기대결을 보는 것도 중요 포인트일 듯하다.

세종대왕은 애민사상을 실천적으로 보여준 임금이다. 장영실 역시 조선 최고의 천재 과학자로 불릴만 하며 자신을 알아주는 주군에게 결과로 보답한 신하임이 틀림없다. 공교롭게도 장영실의 행불 이후 부국강병의 토대를 닦았던 조선의 모습은 급격하게 문약의 나라로 기운다.

세종이후 자연과학과 기술의 발전은 사농공상이라는 사회체계 속에 오히려 퇴보를 하게 된다. 제2, 제3의 장영실 같은 인물이 대를 이었다면 이후 조선의 역사는 상당히 달라졌을 것이다.

박준영  gcnews@gunch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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