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한편] 파란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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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한편] 파란대문
  • 김철신
  • 승인 2004.08.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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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혹한 현실에 놓이거나 억압받을때 내가 나를 위해 싸우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잘못된 구조와 체계 속에서 부당한 대우와 지위를 받을때의 저항은 그 극복 가능성 여부를 떠나 당위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그 왜곡된 구조의 수혜자로 살아간다면 그때도 피억압자의 저항을 당위라 쉽게 말할 수 있을까? 그 폭력적 구조가 가져다 주는 달콤한 혜택을 버리고 올바르다고 일컬어지는 구조를 만들기 위해 진정으로 노력할 수 있을까?

영화 파란대문은 이 사회의 수많은 억업 구조 속에서 내가 서 있는 위치를, 내가 취하는 자세를 물어 보았다.

여성영화를 보고 토론하는 자리가 있었다. 여성영화가 무엇을 뜻하는지 나는 아직 명확한 정의를 내리지 못했지만 영화를 여성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해석하고자 하는 뜻이리라. 그런데 남성이 여성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게 되면 여간 불편하지 않다. 당연하게 누려왔던 수많은 일들이 부당한 행위로 평가되고 쉽게 비난했던 여성의 모습에 더 이상 불평하지 못하며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은 나 자신의 행위가 얼마나 많은 ‘인간’들을 좌절시키고 피폐하게 만들었었는지 깨달아야 한다. 정신건강에 무척 충격적인 일이다. 그럴때 가장 쉬운 방법은 사실을 외면하는 것이리라. 그런일은 나와는 상관없다거나, 이미 일상화되어 내가 어쩔수 없는일일 뿐이라는 둥 나름의 논리로 외면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외면조차 힘들게 누군가가 정면으로 내 눈앞에 그런 사실을 들이밀면 그때는 불편함을 넘어 화가 나기도 한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를 보면 항상 그 불편함을 눈앞에 들이댄다는 느낌이다. 내안에 숨어있는 잔혹성과 변태성, 그리고 그보다 더 잔혹하고 변태적인 우리사회의 폭력적인 모습들을. 그런데 그 불편하고 외면하고 싶은 현실속에 나를 포함한 인간들이 존재하고 삶을 영위한다는 엄연한 사실이 버티고 있다.
파란대문이 여성영화를 보는 자리에 선택된 것은 이 영화가 명확한 여성의 관점을 가져서 때문은 물론 아니다. 아마 김감독이 그리는 여성상에 대한 평가가 워낙 극단으로 나뉘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를 보고 일단의 여성들이 느끼는 불편함을 나는 느끼지 못했고 그 폭력에 분개하는 이들과는 달리 감독의 시선이 참 따뜻하다고 느꼈는데 아마도 그건 영화가 품고 있는 피억압과 억압이 공존하는 모순의 고통속에서, 억압자임을 직시하며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나의 혼란을 위로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는 성을 파는 창녀 진아와 그 진아를 고용한 여관주인의 딸 혜미의 이야기다. 혜미로선 외면하고 싶은 일이지만 진아는 같은 울타리안에서 밥을먹고, 같은 치약으로 양치질을 하며 심지어 혜미가 누리는 삶의 소득원이기까지 하다. 뭐 영화의 내용이야 그런 진아와 혜미가 갈등이 생기고 고조되다가 결국에는 화해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결말에 혜미가 아픈 진아를 대신해서 손님을 받게 된다는 설정에 대해 비현실적이고, 감독이라는 작자의 비상식적인 정신상태를 설명하는 또다른 증거라고 하는 이들도 많지만 눈내리는 밤, 혜미가 만든 눈뭉치에 묻은 눈먼지들이 혜미의 하얀 눈뭉치를 결코 더럽히지 못한 것처럼, 내가 본 진아는 결코 싸구려 인간이 아니었고, 혜미는 더더욱 그렇다. 다만 그 먼지가 가져올 수많은 편견과 폭력이 두려워 외면하고 싶었을 뿐... 자신이 그렇게 경멸하던 창녀의 위치가 되어 스스로 손님방으로 걸어들어가는 혜미의 뒷모습에서 내 모습이 얼핏 보인건 그래서가 아니었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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