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의대생의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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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의대생의 바람
  • 김해완
  • 승인 2020.03.16 16:21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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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의학을 찾아서 16] 쿠바 아바나 의과대학 김해완

'어쩌다 보니' 본지와 인연을 맺게 된 쿠바 아바나 의과대학에 재학 중인 김해완 씨는 지난해 8월부터 격주로 『쿠바의 의료 실험 - 일상의 의학을 찾아서』를 연재를 시작했다.

김해완 씨는 아바나 의대를 다니면서, 의대생으로서 보고 또 경험한 쿠바 의료시스템을 '일상의 의학'이라 칭한다. 대단한 의료기술은 없지만, 일상의 자질구레한 문제(병)을 해결하며, 병과 의료와 사람을 둘러싼 관계를 바꾼 쿠바의 의료시스템을 소개할 예정이다.

- 편집자 주

아바나의 평범한 길거리 풍경. 요즘은 어느 골목에 가나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한 사람들의 우려와 걱정을 들을 수 있다. (제공=김해완)
아바나의 평범한 길거리 풍경. 요즘은 어느 골목에 가나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한 사람들의 우려와 걱정을 들을 수 있다. (제공=김해완)

벌써 마지막 회에 접어들었다. 작년에 연재를 시작할 당시 쿠바에서는 뎅게가 한창 유행하고 있었는데, 끝날 즈음이 되니 코로나바이러스가 도착했다. 나와 동기 의대생들은 뎅게 뻬스끼사(11회 참고)를 나가면서 정신없이 순환계를 배웠고, 지금은 코로나 소식에 마음을 졸이면서 미생물학을 공부하는 중이다. 과학 기술과 지식이 아무리 발전해도 다이내믹한 생명의 세계는 늘 전문가의 예측을 비껴가는 모양이다.

건치신문에 연재를 했던 내 마음도 다이내믹했다. 쿠바 의료를 소개할 수 있는 영광을 얻었으나 그 영광이 부담스러울 때도 있었다. 나의 목표는 의대생의 위치에서 내가 보고 듣고 경험한 것들을 최대한 끌어모아, 의료가 녹아있는 쿠바 일상의 풍경을 그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시간까지는 끌어올 수가 없었다. 나는 아직 2학년에 재학 중이다. 아직 보지 못한 풍경들이 많다. 내가 나중에 이 글들을 다시 읽어본다면 아쉬운 구멍과 오류가 보일 것이다. 혹은 그때까지 쿠바에 큰 변화가 일어난다면, 이 글 모두가 철 지난 기록이 될 것이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 그리고 완전할 수 없는 앎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굳이 이야기를 만들고 공유하는 이유는 그 대상과 마음이 공명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객관적 정보든 주관적 경험이든 하나의 글이 될 때는 글쓴이가 대상과 맺은 가장 솔직한 관계가 기초로 깔린다. 이는 진심으로 마음이 움직이는 순간에 형성되는, 미리 준비된 개념이나 이미지로 도식화될 수 없는 관계다. 이를 ‘쿠바에 반했다’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 내가 쿠바와 공명하는 지점은 공부다. 이곳은 내가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 했던 의학의 길을 열어주었다. 때 묻지 않은 의학과 의술의 결속을 쿠바 외에 어디에서 경험할 수 있겠는가? 내가 훗날 직업으로서 의사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쿠바는 인간으로서 ‘의사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매일 보여주고 있다. 이 행운에 크게 감사하고 있다.

그래서 이번 마지막 회에는 의대생의 입장에서 쿠바 의료에 바라는 것을 적어보려고 한다. 쿠바에서는 비판도 칭찬도 쉽지 않다. 양쪽 다 오해를 산다. 국가 정책과 엇박자로 돌아가는 일상을 말하면 거시적인 시스템을 놓쳤다는 평이 돌아오고, 그럼에도 빛을 발하는 쿠바의 혁신적인 태도를 논하면 정치적 의도가 있는 게 아니냐는 의심이 돌아온다. 쿠바가 역사 속에서 쌓아 올린 상징성이 그만큼 거대하기 때문이리라. 나의 입장은 간단하다.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 그러니까 존경하는 교수님과 겸손한 의사들과 수다쟁이 환자들은 여기가 다름 아닌 쿠바이기 때문에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 때문에 이곳에 더 바라는 것들이 생긴다. 작은 변화가 가져오게 될 이곳의 더 나은 미래를 상상하게 된다.

나의 첫 번째 바람은 청소부의 활약이다. 쿠바에서 청소부는 언제 어디서나 필요한 귀한 일꾼들이다. 사적으로 고용된 가정부라면 모를까, 공공장소에서 프로답게 청소하는 청소부를 만나는 것은 쉽지 않다. 내가 아바나 대학교에서 스페인어를 배울 때에는 청소부를 구하지 못해서 건물 화장실을 임시로 폐쇄한 적도 있었다. 왜 청소부가 부족하냐고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이런 답이 돌아온다. 월급이 약 1,000페소 (40달러) 남짓 되는데, 기초 생활비도 안 되는 돈을 위해서 청소를 열심히 할 사람은 많지 않다는 것이다.

병원에서 이들의 빈자리는 치명적인 구멍이다. 위생은 서구 의학의 기본 중의 기본이 아닌가? 쿠바의 대형병원은 좋게 보아도 깨끗하다고 말하기 어렵다. 병실이 부족할 때는 대기실에 환자들을 눕히는 경우도 있고, 깨끗한 침대보는 늘 부족하다. 아바나에서 제일 큰 병원인 칼리스토 가르시아에서도 관계자들이 이용하는 식당의 청결 상태는 좋지 않다. 제3세계 다양한 국가들로 미션을 갔다 온 의사들은 쿠바 병원이 훌륭하다고 평가하지만, 비교 평가에 안주하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니다. 위생에 구멍이 뚫리면 도리어 병원에서 병을 얻게 된다.

꼰술또리오에서 아이의 건강을 체크하는 간호사와 그 옆에서 도와주는 엄마. (제공=김해완)
꼰술또리오에서 아이의 건강을 체크하는 간호사와 그 옆에서 도와주는 엄마. (제공=김해완)

사람들이 위생에 대해서 가장 걱정할 때는 출산할 때다. 위생 관리의 부족으로 인해서 출산 후에 산모에게 자궁내막염과 같은 산후병이 생기는 경우가 있다. 감염이 급격히 진행되어서 어쩔 수 없이 자궁을 들어내는 안타까운 경우도 있다. 따라서 만삭의 몸으로 병원으로 향하는 산모에게는 반드시 집에서 준비한 깨끗한 침대보가 함께 따라간다. 비누와 수세미를 준비해서 손수 병실 화장실까지 청소하는 가족도 있다.

똑같은 이유로 꼰술또리오와 뽈리끌리니꼬도 준수한 위생 상태를 유지한다. 청소부가 아니라, 가족주치의와 간호사가 자발적으로 쓸고 닦기 때문이다. 산모와 아이들과 노인들이 가장 자주 방문하는 의료 기관이기 때문에, 이곳의 청결은 특히 중요하다. 바쁜 와중에도 기본을 잃지 않는 꼰술또리오 의료인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그렇지만 위생 관리를 가정집과 가족주치의들의 자발성에만 맡길 수는 없다. 더 조밀한 조직력이 필요하다. 이는 신체에 대식세포가 부족한 상황과 비슷하다. 대식세포는 다른 세포들이 대사 활동 후에 싼 ‘똥’이나 외부에서 침투한 ‘불청객’을 치워버리는 세포다. 이들의 소속은 결합조직이다. 결합조직은 대뇌피질부터 손톱 끝까지 온몸에 가리지 않고 퍼져있다. 그만큼 생존에 필수적이라는 뜻이다. 이런 대식세포가 부족해지면 몸 전체의 면역기능이 망가진다. 사회 또한 ‘공동의 몸체(공동체)’라면, 청소라는 행위는 공통의 생명 활동을 보장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청소부를 부활시킬 수 있을까? 가장 단순한 방법은 월급을 올리는 것일 텐데, 그 경우엔 다른 직업군의 월급도 덩달아 올라야 하는지라 현실성이 없다. 고정된 직업으로 사람들을 유인하는 게 어렵다면 기존의 노동력을 유연하게 재조직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당직을 설 때마다 멍때리고 돌아오는 의대생 1‧2학년들에게 의무적으로 병원 청소를 시키는 것도 좋은 생각인 것 같다. 기본을 잃지 않는 의사가 되라는 교육적 의미에서도 좋을 것이다!

뽈리끌리니꼬의 진료실 구석 풍경. 손을 씻는 세면대와 아기의 몸무게를 재는 저울이 보인다. (제공=김해완)
뽈리끌리니꼬의 진료실 구석 풍경. 손을 씻는 세면대와 아기의 몸무게를 재는 저울이 보인다. (제공=김해완)

두 번째 바람은 정보 수집의 효율성을 높이는 것이다. 쿠바가 발표하는 의료 통계가 과연 믿을 만한 것인지 논란이 꾸준히 있어 왔다. 그러나 나는 쿠바 정부가 의료 통계를 조작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발표된 통계와 현장의 상황은 대체로 호응된다. 낮은 유아사망률에 걸맞게 신생아와 산모는 주의 깊은 돌봄을 받고, 시골 구석구석까지 퍼져 있는 꼰술또리오는 천 명의 인구 당 의사 수가 아홉 명이라는 통계가 사실임을 증명한다.

만약 통계에 오류가 발생한다면 그것은 정보 수집 과정에서 발생하는 실수 때문이다. 쿠바의 의료 통계는 매년 업데이트 된다. 다시 말하면, 연말마다 꼰술또리오와 뽈리끌리니꼬는 한 해의 자료를 싹 정리해서 당국에 제출해야 한다. 이는 세금 정산보다 더 골치 아픈 작업이다. 이 자료를 업데이트하려면 일 년간 이 기관에 속해 있는 가정집을 빠짐없이 방문해서 꼼꼼하게 기록을 남겨야 하는데(아바나에서는 평균 400~500가구가 한 꼰술또리오에 속한다), 가족주치의들의 평소 업무량을 감안했을 때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다. 오전에는 진료를 하고, 오후에는 모든 진료기록을 두 부씩 필사하면서 회의에 참석하고, 때때로 밤에 당직까지 서야 하는 게 이들의 스케쥴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정보를 빠뜨리거나, 작년 혹은 재작년의 통계를 수정해서 은근슬쩍 제출하는 행동도 암암리에 실천된다.

이는 현재 쿠바 가정의학계에서 큰 이슈다. 50~60대 가족주치의들은 자신들은 핸드폰도 없던 시절에 두 발로 뛰면서 문제없이 통계 산출을 해냈는데, 젊은 세대가 이를 못한다는 것은 게으르다는 이유밖에 안 된다며 비판의 날을 세운다. 하지만 나는 솔직히 내가 당장 가족주치의가 된다고 해도 이 정보 수집을 제대로 해낼 자신이 없다. 의사의 건강을 희생해야 가능할 정도의 작업이다.

마음 같아서는 모든 꼰술또리오에 컴퓨터를 보급하고, 또 건강 정보를 디지털화하는 길을 제시하고 싶다. 가족주치의의 스트레스를 줄이면서 자료의 정확도도 높이는 일거양득의 방법이다. 그러나 당장 필요한 의약품을 구입하는 것도 어려운 쿠바가 여기까지 투자할 여력은 없을 것이다. 지금 할 수 있는 수준의 조치는 분업이라고 본다. 통계 자료를 수집 및 관리하는 공무원을 따로 배정하고, 가족주치의가 집을 찾아가는 대신에 가족들이 자발적으로 꼰술또리오를 찾아오게 하며, 주거환경 조사는 과감하게 커뮤니티 리더에게 맡기는 식으로 일을 분산시키는 것이다. 의사의 어깨에서 통계 업무의 부담을 덜어내야 진료도 통계도 ‘윈-윈’의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아바나 의과대학교의 점심 시간 풍경. 다음 수업이 시작하기를 기다리고 있다. (제공=김해완)
아바나 의과대학교의 점심 시간 풍경. 다음 수업이 시작하기를 기다리고 있다. (제공=김해완)
생리학 실험 시간. 생쥐의 혈압을 어떻게 재는지 배우고 있다. (제공=김해완)
생리학 실험 시간. 생쥐의 혈압을 어떻게 재는지 배우고 있다. (제공=김해완)

세 번째는 의료 인구 재생산 문제다. 이곳에서는 여전히 수많은 학생들의 의(醫)의 길을 택한다. 여전히 쿠바에서 의사는 대체불가능한 명예직이며, 선의를 실천하는 최고의 인간상이다. 그렇지만 의대에 입학하는 세대의 모습은 점점 달라지고 있다. 올해 의대에 입학할 쿠바 학생들은 2002년생이다. 혁명을 이야기와 책으로만 접한 세대다. 또한, 인터넷의 보급을 경험하면서 외국에 큰 관심을 보이는 세대이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이들은 더 적극적으로 쿠바 의사의 노동 조건에 대해 비판한다. 비판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한 달 생활비를 의사 월급으로 감당할 수 없다는 이야기로 끝이 난다. 이 때문에 교육은 쿠바에서 받더라도 일은 외국에서 하고 싶다고 말하는 학생들도 심심찮게 보인다.

쿠바 청년들의 문제의식은 자립의 문제와 연결된다. 청년의 자립은 국적과 사회 체제를 막론하고 심각하게 다뤄져야 할 이슈다. 자립은 단순히 돈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경제 조건과 기후 환경이 나날이 변화하는 21세기, 더 이상 과거의 삶의 형태를 반복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어떻게 먹고, 관계 맺고, 노동하며 살아야 하는가’라는 문제까지 확장된다. 경제 봉쇄를 당한 쿠바에서는 대답하기가 더 어려운 문제다. 인류를 위해 봉사하자는 쿠바 의료의 비전도 의사들에게 최소한의 자립의 조건을 보장해야 전승될 수 있다. 특권을 줄 필요는 없지만 소박하게 가정을 꾸리고 사는 게 가능하다는 희망은 주어야 한다. 그래야 젊은 의사들의 두뇌유출도 줄어들 것이다.

그러나 이 희망은 마지막 바람이 해결되지 않는다면 이루어지기 어렵다. 나의 마지막 바람은 미국이 경제 봉쇄를 철회하는 것이다. 모든 정치적 계산과 논쟁과 당위를 떠나서, 사람의 목숨을 볼모로 잡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 나의 입장이다. 최소한 의약품에 관련된 봉쇄라도 부분적으로 풀려야 한다. 거기서 한 발짝 나아가 경제 봉쇄가 완벽하게 철회된다면, 그로써 선의로 세워진 이 나라의 시스템이 처음으로 외부의 장애 없이 실험해볼 기회를 얻는다면, 쿠바가 뿌려온 의료의 건강한 씨앗은 마침내 풍요롭게 결실을 맺을 것이다. 교수님들이 조금 더 편안한 얼굴로 강의를 하고, 의사들이 의약품 부족에 대한 걱정 없이 처방전을 쓸 것이다. 그날을 쿠바를 떠나기 전에 볼 수만 있다면 나는 더 바랄 것이 없다.

석양이 지는 아바나의 바다. 섬나라는 쿠바의 지리적 조건은 경제봉쇄를 더욱 치명적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쿠바 바다의 풍경은 몇 번을 보고 또 봐도 아름답다. (제공=김해완)
석양이 지는 아바나의 바다. 섬나라는 쿠바의 지리적 조건은 경제봉쇄를 더욱 치명적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쿠바 바다의 풍경은 몇 번을 보고 또 봐도 아름답다. (제공=김해완)

 

 

김해완 (쿠바 아바나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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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성 2020-03-21 09:40:06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소중한 시각과 정보, 그리고 인류에 대한 따뜻한 마음 받아볼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감사합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나아가시는 바 더욱기대하겠습니다.

김용진 2020-03-16 18:17:56
그동안 소중한 글을 읽고 쿠바의 의료현실을 배울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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