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의 오병이어(五餠二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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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의 오병이어(五餠二魚)
  • 송필경
  • 승인 2020.04.14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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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전태일인가?』- 첫번째 이야기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 올해는 전태일 열사가 분신한지 50주기 되는 해이다. 이를 기념해 열사가 살던 옛집이 남아 있는 대구에서는 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 대경지부 등 대구시민사회단체들이 오는 11월 13일 열사의 분신 50주기를 맞아 대구전태일기념관 개관을 목표로 활발한 활동을 벌여오고 있다.

본지에서는 한국 노동운동의 첫 출발점이자 우리 현대사에 가장 큰 발자국을 남긴 사람들 중의 한 분인 전태일 열사의 분신 50주기를 맞아 그의 삶이 우리 역사에 남긴 의미를 되돌아보고자, 대경건치 회원으로 오래 전부터 열사의 삶의 족적을 쫒아온 송필경 논설위원의 『왜 전태일인가?』를 연재한다. 송필경 논설위원의 『왜 전태일인가?』는 오는 8월까지 1달에 2-3회 연재될 예정이다.

- 편집자 주

‘오병이어’는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 명을 먹였다는 기적을 일컫는다. 비종교인인 나는 인과(因果;원인과 결과)없이 일어나는 종교의 이런 기적을 믿지 않았었다.

내 인식은 인류가 21세기인 지금까지 이룩한 과학과 이성의 환경에 둘러 싸여 있기 때문에, 내 실존적인 판단은 과학과 이성이 해석한 체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인과 없이 일어나는 기적을 내 의식은 거부했다.

‘아궁이에 불을 때야만 굴뚝에 연기가 난다’ 또는 ‘아궁이에 불을 때지 않으면 연기가 날 리가 없다‘는 과학과 이성의 인과가 분명한 사건만을 내 의식은 받아들였다.

비록 무종교지만 자랄 때 우리 집안 분위기는 기독교보다 불교가 생활에서 더 가까이 있었다. 불교 인식은 철저한 연기(緣起) 다시 말해 인과로 바라보기 때문에 기적을 망상으로 치부했다.

하지만 상상력의 결과물인 예술과 문학을 과학과 이성의 인식으로 바라보지는 않는다. 영화 ‘ET’에서 자전거를 타고 달을 향해 하늘을 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고 ‘말도 안 돼’라고 하기보다는 이런 동화 같은 상상력의 아름다움을 즐긴다.

콩쥐에게 계모는 구멍 난 독에 물을 가득 채워라 했다. 콩쥐가 도저히 물을 채울 길이 없어 쩔쩔 매자, 두꺼비가 나타나 몸으로 독의 구멍을 막아 콩쥐는 물을 가득 채울 수 있었다. 이런 우화는 얼마나 기발한 상상력인가.

동화나 우화가 보여주는 얼토당토않은 상상은 때로는 건조한 삶에 지친 우리를 흥미로운 세계로 이끈다. 그래서 현실의 삶이 부조리하고 암울하더라도 곤궁에 빠지지 말고 희망을 갖자는 유머 가득한 교훈에서 재치를 본다.

우화나 동화가 예부터 요즈음까지 일상적 삶에 윤활유 역할을 하는, 꾸며낸 자질구레한 이야기라면 신화는 과학과 이성이 발달하지 않은 먼 옛날에 꾸며낸 웅장한 이야기이다.

신화란 무엇이었는가? 인류가 원시상태에서 이른바 ‘문명시대’에 돌입하자 인류는 늘 신화를 창조했다고 한다. 인류가 이룩한 최초이자 가장 중요한 문명은 아마 말이었을 것이다. 이어서 인류는 문명의 또 다른 핵심인 글을 발명했다. 말과 글이 진화하면서 인간이 가장 깊이 고민한 한 것은 죽음이 아니었을까? 말과 글을 서로 주고받으며 인류가 깨달은 것은 생명의 유한함이었을 것이다.

신화는 죽음 뒤에 어떤 세계가 있을까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고고학 자료에 따르면 네안데르탈인조차 의미 있는 장례를 치렀다고 한다. 신화의 상상력은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생각하고 경험하게 해 주었다. 눈에 보이는 세계만이 유일한 세계가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주려고 했다.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달리 본능을 넘어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동물이기 때문에 신화는 삶의 의미와 본질을 파고들었다.

신화는 생명의 유한함을 인식하여 인간을 죽음과 타협하기 위해 일종의 대응 논리를 만들었을 것이다. 죽음 뒤에 세계에 대한 어떤 믿음을 가졌을 것이다. 예를 들어 고대 이집트에서 왕들의 주된 작업은 자신의 무덤인 피라미드를 매우 정성을 다하여 만드는 것이었다.

생명의 유한함을 가진 인간이 쉽게 절망에 빠지기에 애초부터 상상력을 동원하여 이야기를 꾸민 것이 신화였다. 그 이야기들은 인간으로 하여금 더 큰 시야를 갖고 삶을 바라보게 하였고, 삶의 바탕에 깔린 원형을 드러냈으며, 아무리 암울하고 무질서해 보일지라도 인생에는 의미와 가치가 있다고 느끼게 해주었다.

신화는 우화와 달리 재미로만 하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다른 어떤 세상에 대해 이야기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더욱 강력한 실재, 신들의 세계라고 불리기도 하는 이 실재에 대한 믿음이 신화의 근본적인 주제였다.

과학적 근대 이전의 신화는 모든 사회의식과 사회구조에 작용했으며 오늘날까지도 전통을 유지하는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신화는 쓸모없는 호기심을 충족시키거나 재미있는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으로 하여금 전능한 신들을 모방함으로써 그들 스스로 신성을 경험하게 해주었다. 유한하고 나약한 인간이 스스로의 잠재력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상상력으로 만든 신들의 세계를 모방하려고 노력했다.

이런 상상력의 신화 세계에는 강력한 윤리적 의무가 없었다. 약육강식의 신들의 세계인 신화에서는 인간이 윤리적으로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를 보여주지는 못했다. 사랑, 분노, 성적 열정, 탐욕과 같은 인간의 강렬한 감정을 어떻게 조절해야 하는지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철기 문명이 발달하자 농업 생산력은 급속히 발전함과 동시에 탐욕이 강한 힘 센 무리들이 등장하며 인류는 대규모 전쟁의 늪에 빠져들었다. 힘 센 자들은 폭력과 살상을 일삼으며 약자를 무자비하게 억압하고 착취했다.

전태일과 오병이어(=제공 송필경)
전태일과 오병이어(=제공 송필경)

대규모 살상이 벌어지자 신화의 힘이 차츰 약해지기 시작했다. 인간의 폭력을 제어하자는 인류의 스승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인류는 축의 시대(인류의 현자들이 탄생한 시대; 붓다, 공자, 소크라테스, 예수의 시대)를 맞이했다.

대규모 전쟁으로 들판에 쌓이는 시체, 강자의 무자비함에 허덕이는 비참한 노예의 삶에 ‘축의 시대’ 스승들은 인류에게 강력한 윤리를 요구했다.

그 윤리적 요구란 “네가 당하고 싶지 않는 일은 남에게 강요 말라”는 <윤리의 황금률>이었다.

자신의 생명이 소중한 만큼 다른 사람의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라는 말씀이었다. 모든 위대한 종교들이 공통으로 요구한 윤리였다. 예를 들어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계명이 바로 ‘살인을 하지 말라’였으며 이는 불교의 ‘살아있는 모든 생명에게 폭력을 쓰지 말라’는 간곡한 말씀과 같다. 누가 남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을 좋아하겠는가.

신화는 비록 꾸며낸 이야기지만 그 속에 삶의 깊이가 있었다. 특히 신화가 발달한 그리스에서는 인간이 꾸며낸 신들이 등장하는 재미있는 이야기라고만 생각한다면 너무나 피상적인 이해다. 그리스 사람들이 신에 관해 이야기한 의도는 현실 너머에 있는 보이지 않는 삶의 깊이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종교는 신화가 포함했던 상상력을 보존하면서 삶의 태도에 명료한 윤리를 요구했다. 삶을 약육강식의 피비린내 나는 투쟁 속에서가 아니라, 삶에서 경건하고 거룩한 의미를 찾으라고 종교는 가르쳤다.

종교는 신화를 고스란히 반복할 수 없었다. 종교는 더욱 거룩한 것을 깨닫고 찾아야 했다. 피비린내 나는 현실에서 거룩한 것을 찾았다. 거룩한 것이야말로 현실 삶의 가치라고 보았다. 그러면서도 신화에서 참이라고 생각한 것을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 과정에서 종교는 현실 그 너머에 있는 더욱 깊은 것에서 우리의 삶이 지배하는 ‘참’을 강조했다.

현실 저 너머에서 더욱 깊은 원칙을 탐색하려는 것이야말로 정열적인 종교적 물음이었다. 눈에 보이는 세계를 거부하기 위해 더 깊은 근원을 찾기 위해 종교는 절대적 믿음을 필요로했다.

믿음은 위대하지만 과학과 이성의 인과 관계를 뛰어 넘어야 하는 힘든 과정을 거쳐야 했다. 왜냐하면 과학과 이성의 인식으로 이해하는 세계는 거룩함의 기원을 도무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의식 있는 인간이 맨 먼저 부딪히는 문제는 탄생과 죽음, 생겨남과 사라짐이라는 비극적인 현실이지만 과학과 이성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그러니 과학과 이성의 시각으로 죽음 혹은 사라짐이 어떻게 거룩한 것에 바탕을 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단 말인가? 인간은 거룩함은 영원한 것이고, 그래서 생겨남과 사라짐의 대립에서 벗어나 있다고 생각하는데 말이다. 어떻게 영원한 것이 무상하게 사라지는 것의 바탕이 될 수 있는가?

종교적인 믿음은 이 점에서 출발했다. 아무리 아름다운 것이라도 현실은 언제나 죽음과 허무의 위협을 받고 있다는 것이 모든 인류의 기본 체험이고 깊은 고통이었다. 그러나 종교적 정신은 무상한 세계라는 두려운 모습을 거룩한 것이라는 관점 아래서 더욱 깊이 파악하고자 정열적으로 노력했다.

인류의 스승은 무엇을 인간의 가장 거룩한 행위로 꼽았을까? 붓다는 자비를, 예수는 이웃에 대한 사랑을 인간이 마땅히 실천해야 할 으뜸가는 윤리적 의무라고 가르쳤다. 비로소 인류가 신화의 세계를 뛰어넘는 종교의 세계로 진입하면서 약자를 돕자는 위대한 연민이 탄생했다.

무종교인 내 입장에서 볼 때 윤리적 의무 실천은 강력한 믿음의 전제 없이 수행하기 어렵기 때문에 특히 기독교에서는 기적을 통해 믿음을 이끌어내려 했다고 생각한다.

예수의 ‘오병이어’는 기독교인에게는 강력한 믿음이겠지만 비기독교인 내게는 의미 있는 신화의 한 흔적으로 다가왔다. 나는 예수께서 나눔의 실천을 보여 주신 오병이어를 연민의 핵심적인 상징으로 보며 이를 과학과 이성의 눈으로 부정할 것이 아니라 과학과 이성의 사고를 뛰어 넘어 믿음으로 바라보자는 깨달음이 언제인가부터 다가왔다.

종교적인 믿음의 가치를 우리가 소중히 한다면, 차비 30원으로 굶주린 어린 여공들에게 1원 짜리 풀빵 30개를 사주고 자신은 서너 시간 이상 걸어 다닌 전태일의 연민을 현대판 오병이어라 불러도 전혀 어색하지 않으리라.

깃털보다 가벼운 죽음이 있고, 태산보다 무거운 죽음이 있다면 전태일이 선택한 죽음은 태산보다 더 무거운 거룩한, 순교자적인 죽음이었다. 연민을 실천하기 위하여 죽음을 결심하기까지 전태일의 삶은 경건한 신화였고, 무지렁이 노동자가 지닌 깊고 고귀한 의식은 기적적인 사건이라 불러야 마땅하리라.

전태일의 삶과 죽음의 의미가 우리 시대 가장 소중한 가치라는 것을 나는 앞으로 증명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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