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 유언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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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유언의 의미
  • 송필경
  • 승인 2020.06.05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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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전태일인가?』- 여섯 번째 이야기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 올해는 전태일 열사가 분신한지 50주기 되는 해이다. 이를 기념해 열사가 살던 옛집이 남아 있는 대구에서는 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 대경지부 등 대구시민사회단체들이 오는 11월 13일 열사의 분신 50주기를 맞아 대구전태일기념관 개관을 목표로 활발한 활동을 벌여오고 있다.

본지에서는 한국 노동운동의 첫 출발점이자 우리 현대사에 가장 큰 발자국을 남긴 사람들 중의 한 분인 전태일 열사의 분신 50주기를 맞아 그의 삶이 우리 역사에 남긴 의미를 되돌아보고자, 대경건치 회원으로 오래 전부터 열사의 삶의 족적을 쫒아온 송필경 논설위원의 『왜 전태일인가?』를 연재한다. 송필경 논설위원의 『왜 전태일인가?』는 오는 8월까지 1달에 2-3회 연재될 예정이다.

- 편집자 주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

 

1970년 11월 13일 오후 1시 30분, 온 몸에 불붙은 청년이 ‘근로기준법’ 책 한 권을 들고 청계천 평화시장 앞 인도를 뛰어가면서 외쳤다. 그러다가 곧 쓰러졌다. 너무나 뜻밖의 일이라 아무도 급히 손을 쓰지 못했다. 그렇게 3분이 흘렀고 정신이 퍼뜩 든 주위 한 사람이 잠바를 벗어 불을 잡고 평화시장 경비원이 달려와 소화기로 불을 껐다.

겉옷은 거의 다 탔고, 온 몸은 화상을 입었다. 눈꺼풀은 뒤집히고 입술은 퉁퉁 부르텄다. 사람의 몸은 숯덩이가 된 나무토막과 다를 바 없었다.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

청년이 쓰러져 있던 중 몇 마디 더 말을 했지만 이는 평화시장 거리에서 겨우 알아들을 수 있었던 마지막 작은 외침이었다.

청년은 병원으로 옮겨졌고 뒤이어 어머니가 집에서 소식을 듣고 달려왔다. 어머니는 숯덩이 몸으로 죽어가는 아들의 가슴에 손을 얹고 기도를 했다.

“이 가엾은 목숨도 당신 뜻대로 하소서.”
병원에서 와서 다소 정신 차린 청년은 어머니께 겨우 말을 하였다.

“어머니 저를 원망하십니까?”
“어찌 원망하겠니!”
“어머니, 제가 못다 이룬 일 어머니가 꼭 이루어주십시오.”

어머니의 진심을 확인한 아들은 친구를 불러달라고 했다.

“자네들, 우리 어머니께 날 대신해서 효도해 주게. 내 말을 분명히 듣고 잊지 말게.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

이후 혼수상태에 빠지고 나서 밤 10시 30분쯤 이 세상에서 마지막 말을 힘없이 하고 나서 숨이 끊겼다.

“배가 고프다…”

 

숯덩이가 된 젊은이 전태일은 절망에 가까운 밑바닥 삶을 살면서도 따뜻하고 맑고 단호한 마음을 죽음의 순간까지 간직했다. 정규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지만 무언가 고뇌 깊은 큰 깨달음이 그의 짧은 삶을 지배했다.

전태일은 많은 글을 남겼다. 그 모든 글이 간직한 깊고 큰 깨달음은 '연민'이었다. 글 속 구석구석에 자리 잡은 힘없는 사람, 가난한 사람, 불쌍한 사람의 고통에 참을 수 없는 연민은 그 진정성이 신비롭기까지 했다.

20세기를 대표하는 다방면의 석학이자 인류의 양심이었던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 1872~ 1970)은 자신의 회고록 서문 첫 문장에 이렇게 썼다.

단순하지만 누를 길 없이 강렬한 세 가지 열정이 내 인생을 지배했다. 사랑에 대한 갈망, 지식에 대한 탐구욕, 인류의 고통에 대한 연민이었다. (Three passions, simple but overwhelmingly strong, have governed my life: the longing for love, the search for knowledge and unbearable pity for the suffering of mankind.)

 

사랑, 지식, 연민 가운데 인류가 러셀에게 ‘위대한’ 존경을 헌사 하도록 한 러셀의 행위는 연민이었다. 삶의 목표가 사랑과 지식 탐구를 넘어 '인류의 고통에 대한 연민'에 이르면 숙연해진다. “네가 아프냐, 그럼 나도 아프다”는 연민은 위대한 종교들의 가르침인 사랑, 어질음, 자비와 다름이 아니다.

언어학자로써 대석학이자 인류의 양심이라 부르는 촘스키(Noam Chomsky; 1928∼) 교수는 자신의 매사추세츠공과대학교 연구실에 러셀의 초상화를 걸어놓고 그 아래 이 말을 붙여 놓았다고 한다. 촘스키의 좌우명은 바로 러셀의 3가지 열정이었다.

우리 전태일의 어린 여공에 대한 연민은 세계적인 대석학인 러셀이나 촘스키가 보여준 인류애와 한 치도 다를 바가 없다.(사진제공= 송필경)
우리 전태일의 어린 여공에 대한 연민은 세계적인 대석학인 러셀이나 촘스키가 보여준 인류애와 한 치도 다를 바가 없다.(사진제공= 송필경)

전태일은 수기에 자신의 감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나는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감정에는 약한 편입니다. 조금만 불쌍한 사람을 보아도 마음이 언짢아 그날 기분은 우울한 편입니다. 내 자신이 너무 그러한 환경들을 속속들이 알고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무지렁이 젊은이 전태일의 어린 여공을 위한 연민은 완숙한 대석학 러셀과 촘스키가 실천한 인류의 고통에 대한 연민과 하등 다를 바가 없었다. 이 숭고한 감정은 인간 마음속에 잠재해 있는 타인에 대한 사랑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전태일이 보인 연민도 본질의 핵심을 파고들어 확대하면 인류애였다. 젊은이는 이런 큰 깨달음에 어떻게 이르렀을까?

러셀은 넓고 깊은 지성을 바탕으로 한 윤리적인 확신을 지니고 반전 평화 인권 운동에 평생 적극 참여했다. 당시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조차 여성 참정권에 단호하게 반대할 때, 가장 강력하게 여성 해방을 옹호하다가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지구에서 벌어지는 악이라고 생각한 모든 것에 맞서 싸웠다. 베트남전쟁 반전에도 깊숙이 참여했다.

러셀은 윤리에서 순수하게 합리적인 것보다 감정적인 것을 중요시 했다. 윤리의 바탕을 이루는 것은 ‘감각과 감정’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러셀은 인간의 공동생활이라는 현실적인 문제에 접근했다. 윤리적 바탕으로 무장한 그의 정치적 참여는 자신의 직접적인 감정에 따랐다.

고통이 외치는 메아리가 내 마음을 가득 채웠다.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아이들, 억압하는 사람들에 의해 고문을 받는 희생자들, 자식에게 증오스런 부담이 된 가난한 노인, 버림받음, 가난, 고통의 세계 전체는, 인간 삶이 마땅히 그래야 할 모습에 대해 조롱에 가득 찬 일그러진 모습을 만든다.

 

전태일은 쓴 미완성 소설 작품의 초고에서 이렇게 현실에 반문했다.

다 같은 인간인데 어찌하여 빈(가난)한 자는 부한 자의 노예가 되어야 합니까? 왜 가장 청순하고 때 묻지 않은 어린 소녀들이 때 묻고 부한 자의 거름이 되어야 합니까? 이것이 사회의 현실입니까? 빈부의 법칙입니까?

 

또 한 수기에서는 현실에 이렇게 분노를 나타냈다.

인간을 물질화하는 시대. 인간의 개성과 참 인간적인 본능의 충족을 무시당하고 희망의 가지를 잘린 채 존재하기 위한 대가로 물질적 가치로 전락한 인간상을 증오한다.

 

러셀은 풍족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거목으로 자랐다.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을 나왔다. 수학과 철학 분야에서 세계적 대가였을 뿐만 아니라 문장력이 뛰어나 논리학, 사회학, 교육, 정치, 예술, 종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저작활동을 했다. ‘인도주의적 이상과 사고의 자유를 옹호하는 다양하고 의미 있는 작품’을 쓴 공로로 1950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러셀은 스스로 무정부주의자, 좌파, 회의적 무신론자로 자처하면서 학문의 바다에만 머물지 않고 정치 활동과 대중 계몽, 교육에 힘을 쏟았다. 1918년에 전쟁에 반대하는 글을 썼다가 6개월 감옥 생활을 했다. 이에 굴하지 않고 평생 반전운동, 핵무장 반대운동에서부터 쿠바 위기와 중국-인도 국경분쟁에도 적극 개입했다.

98세까지 장수를 누리면서 인류애에 지칠 줄 모르는 열정을 과시했다. 미국의 양심이라 불리는 대학자 노암 촘스키 교수는 이런 러셀을 정신의 스승으로 여겼다.

전태일은 하층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삶이 끝날 때까지 잡초처럼 살았다. 평생 노숙, 천막, 판자촌을 떠돌아 다녔으며 돈이 없어 초등학교조차 다니는 둥 마는 둥 했다. 가정 형편이 아주 조금 나아지자 15세 늦은 나이에 중학교 1학년 과정을 청옥고등공민학교에서 보냈다. 1년 조금 더 다니다가 집에서 자신의 일을 거들라는 아버지의 강권으로 그만 두어야 했다. 최종학력을 굳이 따지자면 중학교 1학년이라 해야 할까. 지식에 대한 탐구욕은 대단하여 독학으로 공부하려 했으나 한계가 있었다.

“대학생 친구 한 사람 있었으면”하는 바람이 있었지만 결국 이루지 못했다. 어린 여공의 고통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몸서리치게 외쳤지만 누구하나 귀 기울이지 않았다. 자신의 몸을 던지지 않고선 자신의 연민을 세상에 알릴 길이 없다는 것을 깨닫자 22살의 젊은 몸을 스스로 불살랐다.

1970년, 전태일보다 76년이나 빨리 태어난 러셀과 전태일이 이 세상을 떠난 해가 공교롭게도 같았다. 전태일이 평화시장에서 일했던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까지는 세계적인 대격변기였다.

1964년부터 미국은 베트남에서 전쟁을 일으켜 인류 역사상 최악의 폭력을 베트남 인민에게 행사했다. 러셀은 1966년 여름 ‘베트남에서 전쟁 범죄에 관한 국제재판소’를 조직했다. 1967년에 프랑스 철학자 사르트르가 이 재판소의 집행위원장으로 참여했다. 이 재판소는 미국의 행위를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 대량학살을 뜻하는 ‘제노사이드(genocide)’라는 범죄로 규정했다.

1968년 설날, 미국의 침략에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는 베트남 유격대는 미국 대사관을 잠시 점령했다. 전 세계에 TV를 통해 누더기만 걸친 다윗이 완전 무장한 골리앗을 쓰러뜨리는 현장 장면이 생중계되었다.

전 세계 민중은 베트남이 할 수 있다면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영감을 받고 용기를 얻었다. ‘도전하지 못할 권위’란 없다는 권위주의에 반항하는 물결이 프랑스에서부터 쓰나미처럼 일어나 전 세계를 강타했다.

이 세계적인 대격변 사건을 역사는 '68혁명'이라 부른다. 젊은이들과 양심 세력이 벌인 반전평화 운동은 물론 기성질서와 기성세대의 모든 권위에 도전을 했고, 여성은 모든 분야에서 남녀평등을 요구하는 성해방에 비로소 제대로 목소리를 높였다.

전태일의 활동하던 시절에 우리나라에서는 베트남전쟁에 대한 어떤 비판도 허용하지 않았다. 박정희는 미국에 이어 베트남에 대규모 전투부대를 파병했기 때문에 베트남전쟁과 관련한 비판적인 언론 기사를 철저히 통제했다.

박정희 정권은 1960년대 중반 이후 반전 평화운동과 그에 따른 세계사적 조류가 국민의 귀와 입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을 언론을 통해 철저히 막았다. 사회적 불만의 표출은 빨갱이 짓이라 국민에게 협박했다. '68혁명'의 광채가 지구촌에서 우리나라에서만 깜깜했다.

평화시장을 융성케 한 우리의 베트남전쟁 참가는 인류 양심에 반하는 비도덕적 행위였다. 돈벌이를 위해 우리 젊은이도 죽었고, 죄 없는 남의 민족 민중을 죽였기 때문이다.

우리 젊은이들이 남의 나라에서 피 흘리며 참전한 대가로 적잖은 돈을 벌어들였다. 이 돈이 국내로 흘러들어 봉제 공장이 즐비했던 평화시장의 활성화에 밑거름이 된 것은 맞는 말이다.

전태일이 재단사 아들로써 평화시장 봉제 공장에 취직한 것은 어쩌면 필연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평화시장에서 굶주린 짐승처럼 본능적으로 돈벌이에 신경을 곤두세워야 할 찢어지게 가난한 젊은이가 자신의 처지보다 더 열악한 어린 여공의 처지에 눈을 돌린 것은 인간의 본능으로 볼 때 쉽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무지렁이 노동자가 자신의 몸을 태우며 외친 사자후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는 남한 사회의 기적이오, 나아가 현대 인류의 신화라 해도 전혀 지나친 말이 아니다.

마르크스의 ‘마’자도 모르는 청년이 외친 사자후는 당시 남한의 자본주의가 보여준 천박한 모순에 대한 직관적인 통찰이었다. 혁신적이었고 개혁적이었고 진취적인 통찰력이었다.

우리는 '68혁명'이란 세계사적인 사건에서 비켜있었지만, 전태일의 외침이라는 정신적 혁명이 대신 우리에게 찾아왔다.

러셀은 백작 출신에다 숲이 있는 대저택에서 살았다. 모든 삶의 환경이 풍족했지만, 자신이 속한 백인 귀족 계급의 관점을 초월했다. 제국주의와 산업 자본가들이 저지르는 인간 억압과 착취를 통렬히 비난하면서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모든 인류의 자유와 평등을 위해 생각하고 행동했다.

전태일은 계급의 관점이나 이념으로 세상을 바라보지 않았다. 러셀과 같은 크고 깊은 지식과 논리로 세상을 바라보는 훈련을 쌓지 못했다. 어린 여성 노동자의 비참한 현실에서 남한 자본주의 모순의 본질을 직관적으로 꿰뚫어 보고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여성과 노동의 해방을 부르짖었다.

“행복해지기 위해 세계가 필요로 하는 가장 필수적인 것은 통찰력이다”라고 러셀이 갈파했듯이, 전태일의 남한 자본주의 모순에 대한 통찰력은 계급과 지식의 관점을 떠나 엄청나게 예리했다.

세계적인 대석학과 비렁뱅이 노동자가 핍박 받는 인간을 같은 연민의 감정으로 바라본 것은 시공을 초월하여 인간 보편성의 위대한 유사점이 아닐까?
 
영국의 귀족 학자가 아시아의 가련한 베트남 민중의 아픔을 헤아리는 것과 가난한 노동자가 자신의 처지보다 더 못한 어린 여성의 아픔에 몸부림치듯 괴로워하는 것을 비교하여 어느 쪽이 더 큰 고귀한 감정을 지녔는가를 헤아리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본다.

인간에 대한 연민이라는 인류애적인 가치의 저울에 올려보면 무지렁이 전태일의 무게는 대석학 러셀의 무게에 비해 결코 가볍지 않다.

소원이란 개인적 행복을 추구하는 열망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자식을 위한 부모의 소원처럼 이타적인 열망도 있다. 인간으로서 가장 값어치 있는 이타적인 소원은 사회적 약자를 불쌍히 여기고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려는 노력이다.

‘불쌍히 여김과 공감’의 구체적인 윤리는 ‘미움이 아니라 사랑, 경쟁이 아니라 협조, 전쟁이 아니라 평화를 열망하는 자세’가 아닐까.

우리 시대는 어둡다. 하지만 어쩌면 이 시대가 우리에게 주는 불안들이 지혜의 원천이 될지도 모른다. 지혜의 원천이 현실이 되기 위해서 인류는 자기 앞에 놓인 위험한 시기에 절망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해야 하고,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 나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보존해야 한다. 그것은 불가능하지 않다. 사람들이 원하기만 한다면 그것은 현실이 될 수 있다.

 

러셀이 인류에게 이렇게 호소했을 때 러셀의 의도와 한 치도 다름없이 올바르게 응답한 사람이 전태일이 아닐까. 아니 전태일이다!

전태일이란 존재는 우리 시대 지혜의 원천이었고, 도덕적 사유의 모범이었고, 시대의 희망이었고, 불가능을 희망으로 바꾼 실천가였다.

의무 없는 행복과 행복 없는 의무

 

전태일은 자신의 재능으로 자신만 잘 살겠다는 행복을 택하기보다 자신의 행복을 희생하더라도 고통을 함께 나누자는 의무를 택했다.

나이가 어리고 배운 것은 없지만 그들도 사람, 즉 인간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생각할 줄 알고, 좋은 것을 보면 좋아할 줄 알고, 즐거운 것을 보면 웃을 줄 아는 하나님의 만드신 만물의 영장, 즉 인간입니다. 다 같은 인간인데 어찌하여 빈한 자는 부한 자의 노예가 되어야 합니까. 왜 빈한 자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안식일을 지킬 권리가 없습니까?

종교는 만인이 다 평등합니다…

-1970년 초의 소설작품 초고에서

 

평화시장 봉제공장 업주 가운데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은 주일마다 교회에 꼬박 다녔다. 그러나 업주들은 여공들에게 일요일에 쉴 틈을 주지 않아 교회에 다닐 수 없게 했다. 업주 자신만 일요일에 교회 가서 구원을 받으면 그만이었다. 어린 여공은 그 시간에 돈을 벌어들여야 했다. 천박한 업주들에게 유일한 신은 오로지 돈이었다.

지독히 이기적인 이런 교인들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인 ‘이웃 사랑’을 내팽겨 칠지언정, 물질적 풍요가 선사하는 정신적 타락으로부터 자신을 지켜내려는 신앙의 본질에는 아예 관심이 없었다.

전태일이 평화시장 업주들에게 ‘일요일은 쉬게 하라!’는 외침은 돈 받고 면죄부를 팔아먹은 로마 가톨릭의 부패에 항의한 종교 혁명가 루터의 모습과 다름이 없었다. 자신의 몸을 불태우며 외친 호소는 남한 기독교 사회에 던진 처절한 절규였다.

고통 받는 노동자를 성찰한 전태일의 유언은 노동자는 물론 지식인과 종교인에게까지 각성을 일깨움으로써 남한 사회가 성숙하게 도약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전태일!
이 분은 단순한 노동자가 아니라 청계천 평화시장 어린 여공을 통해 버림받고 헐벗은 인간의 굶주린 고통에 동참하여 그 고통을 해소하려던 예수의 진실한 제자였다.

이 분의 존재는
내 시대의 축복이고, 기적이고, 신화였다.

이 분을 내 어찌 존경하지 않을 도리가 있으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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