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에티쿠스(윤리적인 인간)' 전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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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에티쿠스(윤리적인 인간)' 전태일
  • 송필경
  • 승인 2020.07.21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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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전태일인가?』- 아홉 번째 이야기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 올해는 전태일 열사가 분신한지 50주기 되는 해이다. 이를 기념해 열사가 살던 옛집이 남아 있는 대구에서는 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 대경지부 등 대구시민사회단체들이 오는 11월 13일 열사의 분신 50주기를 맞아 대구전태일기념관 개관을 목표로 활발한 활동을 벌여오고 있다.

본지에서는 한국 노동운동의 첫 출발점이자 우리 현대사에 가장 큰 발자국을 남긴 사람들 중의 한 분인 전태일 열사의 분신 50주기를 맞아 그의 삶이 우리 역사에 남긴 의미를 되돌아보고자, 대경건치 회원으로 오래 전부터 열사의 삶의 족적을 쫓아온 송필경 논설위원의 『왜 전태일인가?』를 연재한다. 송필경 논설위원의 『왜 전태일인가?』는 오는 8월까지 1달에 2-3회 연재될 예정이다.

- 편집자 주

전태일은 다재다능한 젊은이였다. 평화시장 봉제공장에서 가장 밑바닥인 미싱 보조로 취직해 가장 권위있는 재단사로 가파르게 직급이 상승했다. 우연히 백화점에 들렀다가 세련된 옷을 관찰한 후 평화시장에 돌아와 즉석에서 그 옷을 감쪽같이 복제해 주위를 놀라게 했다고 한다.

평화시장 업주를 통해서는 어린 여성 노동자의 열악한 노동 환경이 개선될 기미가 없자, 스스로 모범 업체를 설립할 계획을 세웠는데 웬만한 경영인 못지않게 사업 계획서가 치밀했다. 단지 자신의 처지에서는 막대했던 창업 자금이 없어 실행하지 못했을 뿐이다.

전태일은 많은 글을 남겼는데 그 글에는 열정이 넘쳤고 재능이 빛났다. 어린 시절 회상 수기와 일기는 고통 속에서 성숙한 자신의 정신적 깊이가 잘 나타나 있다. 게다가 시에 조예가 깊었고, 미완성 소설도 몇 편 구상할 정도로 글쓰기 재주는 탁월했다.

머리가 총명한데 더하여 무엇보다도 가장 전태일다운 것은 마음이 따뜻했다는 점이다.

성격이 조금만 이기적이었다면 당시 급팽창하는 남한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느 누구 못지않게 돈 벌며 계층상승을 이루어 가족을 돌보며 편히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바보’ 전태일은 이 세상의 바보 가운데서도 가장 까다롭게 이 사회를 바라보았다. 그 풍부한 재능을 가장 바보같이 발휘하여 남한에 막 불어 닥친 천박한 자본주의 회오리에 정면으로 맞섰다.

“정말 지혜로운 사람이 되려면 바보가 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올로의 말씀이다. 이 말씀은 지혜가 있다고 뽐내거나 재빠른 체하지 말고, 전지전능한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따르는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이란 뜻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은 전태일의 ‘어린 시절 회상수기’에 나오는 글이다.

한 인간이 인간으로써 인간적인 모든 것을 박탈당하고 있는 이 무시무시한 시대에 나는 절대로 어떠한 불의와도 타협하지 않을 것이며 동시에 어떠한 불의도 묵과하지 않고 주목하고 시정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인간을 필요로 하는 모든 인간들이여 그대들은 무엇부터 생각하는가? 인간의 가치를, 희망과 윤리를, 아니면 그대 금전대의 부피를?

시류에 영합하지 않는, 현실과 적당히 타협하지 않는, 올곧은 바람을 포기 않고 끝까지 밀고나간 이 까다로운 바보가 우리가 우러러 봐야 할 지혜를 지닌 사람이 아닌가?

전태일이야말로 사도 바올로가 말씀하신 바로 그런 착하게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여기 전태일의 회상 수기에 있는 글이다.

14∼16살의 어린 소녀들이 마루바닥에 꿇어앉아서 오전 8시에서 밤 11시까지 하루 평균 15시간을 일해야 했다. 노동자들은 한 달에 이틀, 첫째 셋째 일요일에만 쉴 수 있었다. 할 일이 많을 때는 철야작업까지 해야만 했다. …그리고 깨어 있기 위해서는 각성제(암페타민)를 먹어야만 했다.

전태일이 처음 취직했을 때 청계천 평화시장 봉제공장은 거대한 닭장 같은 고도 착취 사업장이었다. 어린 여성 노동자들이 좁은 작업장에서 질식할 듯 구겨져 있거나 말거나, 못 본 체 하고 전태일 자신의 가족만을 생각했다면…

다음은 전태일의 막내 여동생 전순덕(현재 이름은 전태리; 1960∼)의 오빠에 대한 회상이다.(2020년 2월 1일 인터뷰)

남산에 살 때 불이 나(1966년) 쌍문동으로 이주를 온 거죠. 제 어릴 때 정서가 다 거기더라구요. 천막 교회가 생기고 모두 천막을 치고 살았어요. 천막 교회에서 전도사님들이 저희 어린아이를 모아 놓고 공부도 가르쳐주고 그랬어요. 그 추억이 저한테는 그래도 남아있어요.

그때 그 화재민촌에는 다 없는 사람들이잖아요. 없는 동네는 싸움을 많이 하더라구요. 눈만 뜨면 동네 어디에선가 막 싸우는 거예요. 부부끼리도 싸우고, 부모 자식 간에도 싸우고, 이웃끼리도 싸우고, 싸움이 잦을 날이 없더라구요. 왜들 이렇게 싸우나 그러는데, 그때 보면 청년들이 나름대로 삶이 고달프니까 부모들에게 저항도 하고 서로 갈등이 쌓여 있었겠지요.

분쟁이 가정에서부터 이웃으로까지 많이 일어나는데, 제가 볼 때 저의 큰 오빠는, 세상에 저런 오빠는 없어, 내가 느끼는 우리 오빠는 정말 좋은 오빠야, 우리 오빠는 효자야, 저는 어릴 때 느낌으로 그게 오는 거예요.

이웃집을 보면 못사는 동네니까 그게 공개가 되고, 밖에 나와서도 싸우고 막 싸우는 데 큰 오빠 같은 경우에는 한 번도 다른 사람이 보이는 모습을 안 보이더라구요.

아 우리 오빠는 참 착한 오빠구나, 그러면서 항상 공손하게 아버지한테도, 엄마한테도 말대꾸 한 번 안 하는 거예요.

…(중략)…

아버지가 돌아가시고(1969년) 이제 오빠가 저의 보호자가 된 거예요. 엄마는 아침에 일어나면 곧바로 일터로 가시고 나서 오빠가 출근을 해요.

저한테 오빠는 너무 큰 존재였어요. 모든 걸 전부 오빠한테 얘기 하면 오빠가 저의 요구를 다 들어줬어요. 대단한 건 아니지만 내가 조그마한 거 하나라도 얘기하면은, 예를 들면 오빠가 아침에 출근을 해요. 저는 그때 오빠가 평화시장 일을 하러 가는 건지 뭔지 모르는데 나가며는 제가 막 쫓아나가요. 나가서 오빠 돈 1원만 그래요. 그럼 오빠가 1원을 꼭 줬어요, 저한테는 그게 그 하루 중에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어요. 저는 오빠가 출근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중략)…

저는 우리 오빠가 세상에서 최고로 좋았어요.

전태일은 깊고 넓은 마음에 따뜻함을 가득 담은 인간이었다. 어린 여성 노동자들을 어린 친동생 순덕이에게 하듯 그지없이 자상하게 대해준 오빠의 마음을 지녔다.

전태일의 연민과 무차별적인 이타심은 이기심만 존재하는 정글 자본주의와 전혀 어울릴 수 없는 바보 그 자체의 행위였다.

남한 자본주의 환경에서 신음하는 어린 여성 노동자의 처지는 이 자상한 오빠에게 돌이킬 수 없는 가혹한 시련과 고난을 안겼다. 전태일은 자신에게 안겨진 힘든 일과 괴로운 일에 고개를 돌리지 않고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인류문학사에서 최고의 작가로 추앙받는 셰익스피어의 너무나도 유명한 대사는 『햄릿』 3막에 나오는 햄릿의 독백이다.

사느냐, 죽느냐 이것이 문제로다.

이 대사 바로 이어 나오는 독백은 이렇다.

난폭한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을 맞고도 가슴에 꾹 참는 것이 고매한 정신이냐? 아니면 노도처럼 밀려오는 고난과 맞서 싸워 이를 물리치는 것이 옳은가? 죽는다는 것은 잠드는 일…

작품 『햄릿』 은 삶과 죽음, 정의와 불의, 진실과 허구와 같은 인류가 맞닥뜨리는 보편적인 문제의식을 표현한 불멸의 문학작품이다. 감수성이 예민하고 지성이 뛰어난 작품 주인공 ‘햄릿’은 가족 분쟁에 정신적 고뇌가 깊어지고 복수심에 불탔다. 셰익스피어가 창조한, 인류 문학사에서 우유부단한 인물의 대명사로 꼽히는 햄릿은 자신이 짊어지게 된 가족 운명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했다.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는 20세기 신학을 대표하는 독일의 천재 신학자였다. 불과 21세에 베를린 신학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교수들은 이 새파란 청년을 ‘천재적 신학 청년’이라고 절찬했고, 이 청년이 쓴 논문을 ‘신학적 기적’이라고 평가했다.

이런 신학자가 히틀러 암살에 가담했다가 체포돼 사형을 받았다. 목사가 살인 모의에 가담했다는 것은 현재 우리 기독교 심정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행태지만, 본회퍼는 자신의 행위에 이렇게 답했다.

만일 어떤 미친 사람이 자동차를 몰고 사람이 걸어 다니는 보도 위로 달리기 시작했다면, 나는 목사로서 그 자동차로 죽은 사람의 장례나 치러주고, 그 친족들을 위로하는 것으로 내 임무를 다했다고 생각할 수 없다. 나는 그 자동차에 올라타 그 미친 사람에게서 핸들을 빼앗아야 할 것이다.

본회퍼는 광기에 휩싸인 나치 시대의 포악한 모습을 보았다. 신학자인 동시에 올곧은 지성인으로써 당연히 반나치 운동에 뛰어들자 나치에게 요주의 인물로 찍혔다. 나치의 공포정치가 절정이던 1939년 6월에 미국 신학교의 초청으로 안전한 미국에 갔다. 본회퍼는 ‘자신이 미국에 온 것은 결국 실수였다’고 깨닫고 고통 받는 독일 민중을 생각하며 7월에 곧바로 귀국했다. 편히 갈 수 있는 길을 일부러 회피했다.

나치의 엄중한 감시에도 불구하고 히틀러의 암살 모의에 가담했다가 1943년 체포돼 나치가 망하기 며칠 전인 1945년 4월 9일 포로수용소에서 사형당했다. 본회퍼의 단두대 처형을 지켜본 피셔 훌슈츠룽 박사는 "본회퍼가 죄수복을 벗기 전에 열정적으로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단두대에 오르는 모습은 매우 대담했고 침착해 보였다"고 당시를 회고하면서 "내 50평생에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본회퍼 같은 사람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회고했다.

난폭한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을 맞고도 가슴에 꾹 참는 것이 고매한 정신이냐? 아니면 노도처럼 밀려오는 고난과 맞서 싸워 이를 물리치는 것이 옳은가? 죽는다는 것은 잠드는 일…

본회퍼는 생각에 잠긴 우울한 햄릿처럼 우유부단한 고민을 하지 않았다. 광폭한 히틀러의 나치에 맞서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노도처럼 밀려오는 폭력을 가슴 정면으로 맞받았다.

본회퍼는 약혼자에게 보낸 유언에서 “죽음은 끝이 아니라, 영원한 삶의 시작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죽음은 잠드는 일이 아니라는 확신을 가지고서 말이다.

오늘날, 본회퍼의 삶과 죽음은 반나치 저항의 대표적인 상징이 되었다.

전태일이 즐겨 읽었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 나오는 구절이다.

그것도 참지 않으면 안 돼요. 산을 넘지 않으면 안 되는 여행자와 같은 거지. 물론 산이 거기에 없다면 길은 훨씬 수월하고 가깝기도 하지. 그러나 산은 현실적으로 있기 때문에 넘지 않을 수 없는 거지요.

전태일의 평화시장에 놓여 있었던 착취의 산은 실크로드를 가로막고 있는 만년설이 덮인 텐산(天山)산맥보다 험했고 메마른 타클라마칸 사막보다 거칠었다. 아라비아 상인들은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중국 장안까지 험한 산을 넘고 거친 사막을 건너기 위해 수 백 명이 수 백 마리 낙타를 동원했다고 한다.

변변한 등산장비가 없었던 전태일은 현실에 존재하는 산을 어쨌든 넘어야 했다.

아아, 몸은 넘지 못했지만, 그 위대한 혼이 넘었던 것이다!

어머니에게 자신의 몸이 넘을 수 없었던 산을 대신 넘어달라고 유언했다. 이소선 어머니는 노동자 무리를 이끌고 전태일의 혼이 인도하는 대로 험한 산을 넘고 거친 사막마저 거침없이 지났다.

평화를 위해 저항한 신학자 본회퍼는 2차 대전 이후 각종 신학의 흐름에 출발점이 되는 통찰력을 지녔다는 평가를 받았다. ‘비종교적 해석’, ‘성숙한 세계’ 같은 개념은 현대 신학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무엇보다 사상 못지않게 위대한 ‘행동’은 많은 지성인에게 반향을 일으켰다. 본회퍼의 영향을 받은 독일의 몰트만은 ‘희망의 신학’,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해방 신학’, 우리나라에서는 서남동과 안병무의 ‘민중 신학’을 낳았다.

본회퍼는 체포된 1943년 4월부터 1945년 4월 9일 처형까지 약 2년간 각처의 강제수용소를 전전하면서 가족과 친구 베게트에게 편지를 썼다. 베게트는 옥중 편지들을 편집해 1951년 『반항과 복종』 이라 제목으로 출간했다. 우리나라에서는 1967년 『옥중서간』 으로 번역됐다.

국가의 권력과 신앙인의 양심이 충돌했을 때, 과감히 목숨을 걸고 돌파한 자유 투사의 의지를 절절이 담았다. 암울한 유신과 전두환 시절에 내 용기를 북돋워주는 빛과 소금 구실을 한 글들이 주옥같이 빛났다.

나는 무지렁이 전태일이 어린 여성 노동자에게 보낸 연민을 위한 삶과 죽음을, 위대한 천재 신학자 본회퍼의 극악한 나치 폭력에 저항한 삶과 죽음하고 비교해도 그 의미의 깊이와 폭과 무게는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한다. 한마디로 두 분은 숭고한 역사적 인물의 모범이다.

그래서 나는 오래전부터 전태일의 숭고함에 관한 글을 썼고 앞으로도 쓸 것이다.

숭고한 인물의 전형; 전태일(왼쪽)과 본회퍼(사진제공= 송필경)
숭고한 인물의 전형; 전태일(왼쪽)과 본회퍼(사진제공= 송필경)

예수를 빛나게 한 것은 예수의 삶만이 아니라 세례자 요한과 성모 마리아가 있었다고 존경하는 신학자 김근수 선생이 말씀하셨다.

그렇다! 우리 사회는 전태일에게만 빚이 있는 게 아니다. 세례자 요한 같은 영혼의 친구 조영래가 있었고, 성모 마리아 같은 이소선 어머니가 계셨다.

전태일, 조영래, 이소선, 이 세분은 서로 다른 분이 아니셨다. 세 분이 한 몸이셨다. 내 남은 생애에서 이 세분의 일체감을 탐구하는 것으로 삶을 이어가겠다고 다짐한다.

나에게 전태일 정신을 찾도록 영감을 불어넣어 주신 전남대 철학과 김상봉 교수께 깊은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언제나 간직하고 있다.

김상봉 교수가 쓴 책 『호모 에티쿠스; 윤리적 인간의 탄생』 의 뒤표지 글을 여기에 꼭 소개하고 싶다.

참으로 선하게 살기 위해 우리는
추수에 대한 희망 없이 선의 씨앗을 뿌리는 법을,
희망 없이 인간을 사랑하는 법을,
그리고 보상에 대한 기대 없이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의무를 다하는 법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는 그런 비극적 세계관 속에서도
언제나 기뻐하는 법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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