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열병을 앓은, 젊은 베르테르 '전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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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열병을 앓은, 젊은 베르테르 '전태일'
  • 송필경
  • 승인 2020.07.31 16: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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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전태일인가?』- 열 번째 이야기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 올해는 전태일 열사가 분신한지 50주기 되는 해이다. 이를 기념해 열사가 살던 옛집이 남아 있는 대구에서는 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 대경지부 등 대구시민사회단체들이 오는 11월 13일 열사의 분신 50주기를 맞아 대구전태일기념관 개관을 목표로 활발한 활동을 벌여오고 있다.

본지에서는 한국 노동운동의 첫 출발점이자 우리 현대사에 가장 큰 발자국을 남긴 사람들 중의 한 분인 전태일 열사의 분신 50주기를 맞아 그의 삶이 우리 역사에 남긴 의미를 되돌아보고자, 대경건치 회원으로 오래 전부터 열사의 삶의 족적을 쫓아온 송필경 논설위원의 『왜 전태일인가?』를 연재한다. 송필경 논설위원의 『왜 전태일인가?』는 오는 8월까지 1달에 2-3회 연재될 예정이다.

- 편집자 주

전태일이 평화시장 봉제업체 한미사 재단보조공이 된 지 서너 달 가량이 지난 1967년 2월 초, 설날을 열흘 가량 앞두고 대목일이 끝났다.

당시 전태일은 한미사에서 재단 보조로 일했던 한 재단사와 사귀었다. 이름은 흥선이었고 나이는 2살 위여서 형이라 불렀다. 전태일은 흥선이가 살던 서울대 법대 뒤 낙산 기슭 판잣집의 좁은 셋방에서 같이 지냈다. 미싱사들과 시다들은 설이라고 기뻐하면서 고향인 시골로 내려가는데 태일은 집이 서울 도봉산인데도 가지 못했다. 돈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전에 미싱사로 있었을 때에는 7,8천원을 가지고 들어갈 수 있었는데 지금은 한 달에 4천원밖에 못 받는데 그나마도 식비로 쓰고 용돈도 궁한 형편이다. 방세에 많이 드는 것은 아니지만 연탄 값과 수도세, 전기세를 흥선이 형과 반반 나누어서 내고 나면 구경 한 번 안 가도 식비가 모자랐다. 이런 환경이지만 그래도 공장에 다니면서 돈을 번다는 것을 동네 사람들이 다 아는데 어떻게 동생들 옷가지 하나 안 사가지고 들어갈 수는 없었다.

주인 부부가 지방으로 수금을 가며 태일이 집에 안 간다는 사실을 알고, 주인 처제와 함께 일주일간 전태일에게 가게를 보고 있으라 했다.

처제 이금희는 1944년 생으로 전태일보다 네 살 연상이었다. 전에 가게에서 몇 번 봤지만 막상 처녀를 소개 받자 전태일은 얼굴이 붉어지며 수줍어했다.

조영래의 『전태일 평전』 에는 전태일과 오금희 관계를 이렇게 간략하게 소개했다.

이 일로 하여 전태일은 한동안은 무척 가슴 설레이는 기쁨을 맛보기도 하였고 그 뒤로는 상당히 고민도 하게 되었다.

그런데,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어느 날, 나는 깊은 죄의식을 깨달았다. 지금 이 시간 집에서는 이 불효한 자식을 위해서 정성을 드리고 계실 어머니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렇다. 내가 지금 이런 사치에 한 눈을 팔 때가 아니다.”

이것으로 전태일의 짧은 사랑은 고백 한 번 못한 채 끝나버렸다. 열아홉 소년이라면 한창 이성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밤낮을 보낼 것이다. 그러나 태일에게는 그것도 ‘사치’였던 것일까…

바로 이즈음인 1967년 2월 14일자 전태일의 일기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오늘도 보람 없이 하루를 보내는구나. 하루를 보내면서 아쉬움이 없다니, 내 정신이 이렇게 타락할 줄은 나 자신도 이때까지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이 공장에서 완전한 재단사가 되기 위해서는, 내 스스로 절제할 수 없는 감정의 포로가 되기 전에, 한창 피어오르는 사랑을 꺾어버린 것이다. 내 마음에 내린 뿌리가 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줄기 없는 뿌리가 얼마나 더 존재하겠는가… 부디 동심을 버리고 현실에 충실 하라.”

냉혹한 현실이 지워준 짐은 무겁고, 힘과 시간은 모자라는 그에게는 남들이 다 해보는 연예라는 것도 잔인하게 꺾어버려야 할 환상이었을까?

다음은 전태일의 수기와 일기에서 추린 것이다. 19세 무지렁이 노동자가 쓴 글로 믿기지 않게 간결하고 묘사가 뛰어나다.

…나는 일찍 가게 문을 열고 손님을 기다렸다. 어떤 남자 손님이 와서 물건을 흥정하고 있을 때 주인아주머니 동생인 처녀가 밥을 가지고 왔다.
“재단사, 식사하세요. 식기 전에 빨리요”
예쁜 장미꽃 무늬가 박힌 3층 찬합에 팥밥을 담고 여러 가지 찬이 정성스럽게 담겨 있었다.

나이가 이제 겨우 십 팔구 세밖에 안 들어 보였고 얼굴 어느 곳을 봐도 이제 갓 고등학교 교복을 벗고 대학 초년생 같은 밝은 청초함을 발산하고 있었다. 2, 3개월 전 가게에서 두 번 볼 때는 아무런 감정을 못 느꼈는데, 지금 이 처녀가 손수 들고 나온 밥을 먹으면서는 이상하리만큼 나 자신이 대견스럽고 사랑스러웠다. 식사를 다 마치자 “물드세요”하면서 집에서 가지고 온 물통에서 뜨끈한 숭늉을 부어 주는 그 손, 마치 상아로 조각을 한 것 같은 맑은 베이지색의 조그만 손을 눈앞에서 움직일 때 너무나 탐스러워서 힘껏 만지고 싶은 충동을 억제했다.

바로 맞은 편 가게는 아직도 문을 열지 않고 우리 가게가 아마 제일 먼저 문을 열은 관계로 꽤 많은 매상고를 올렸다. 정오가 다 될 때까지 나란히 앉아 있었지만 나는 한 마디도 먼저 말을 못하는 그런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처녀가 먼저 물어 보면 사뭇 정확하게 사무적인 대답을 할 뿐, 내 스스로 화제를 만들 줄도 몰랐으며 대답을 할 때도 시선은 한 번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 이상하리만큼 수줍어했었다. 내가 너무 수줍어하고 어려워하자 처녀는 어려운 분위기를 없애려고 나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해왔다.

“재단사 고향은 어디예요?”
충청도 사투리가 연하게 섞인 서울말로 상냥하게 물으면
“경상북도 대구입니다.”
무뚝뚝하게 아무런 감정을 내포하지 않으려고 사무적인 태도로 대답한다.
…(중략)…
“재단사요, 문을 닫고 들어가요.”
“조금 더 있다가 들어가겠습니다. 먼저 가십시오.”
“다른 가게도 다 들어가는데 있으면 얼마나 더 팔겠어요?”
나는 아저씨께서 가시면서 시키시는데로 맨 마지막에 문을 닫기로 한 것이다.
“그럼 먼저 가겠어요. 빨리 들어오세요, 네?”
“네, 먼저 가십시오. 빨리 가도록 하겠습니다.”

저녁 10시가 되자 장부를 정리하고 문단속을 잘하고 주인집을 향해 동대문 옆으로 걸었다. 몇 시간 전에 내린 싸락눈은 밝은 전깃불에 반사되어 곱게 반짝이고 오가는 행인들의 발바닥에 눌려 고운 결정체가 부서져버리기도 한다. 동대문 지하도를 건너서 돌산을 향해 걸으면서 곰곰이 생각해 봤다. 정말 주인아주머니 말씀대로 스물 셋일까? 처녀의 어느 곳을 보아도 믿어지지 않는 나이다. 나 보다 더 어려 보이는데…

주인집은 창신동 채석장 못 미쳐 넓은 운동장 같은 평지 한 가운데 위치한 전형적인 일본식 양옥이었다. 빨간 기와로 지붕 경사가 아주 급한 호화로운 집이었다. 현관문을 노크하자,
“네, 조금만 기다리세요.”
하면서 급히 무엇을 정리하는 소리가 들리면서 이내 처녀가 문을 열어 주었다. 현관문을 들어서자 왼쪽 부엌에 세수 비누와 타올이 있고, 따뜻한 세수물이 준비되어 있었다.
“재단사요, 세수하시겠어요. 잠바는 벗어주세요.”

나는 대꾸도 않고 시키는 대로 했다. 얼굴을 다 씻고 양말을 벗고 발을 씻고 방으로 들어갔다. 방엔 처녀의 마음을 한눈으로 짐작이 가게 차려진 밥상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에게는 분에 넘치는 식사였다. 양은 많지 않았지만 여러 가지 찬은 시장하던 나의 구미를 더욱 돋구었다. 내가 너무 탐스럽게 먹어 보이자 처녀는,
“재단사는 어쩜 그렇게 맛있게 잡수에요. 보고 있는 사람이 먹고 싶을 정도예요.”
“참 저녁식사를 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네 먹었어요. 너무 맛있게 잡수시니까 괜히 해 본 소리예요.”
식사가 끝나고 나자
“재단사요, 저쪽 방으로 가요. 음악 좋아하지 않으세요?”
“네, 좋아합니다만…”

나는 약간 당돌하면서도 거북하지 않게 나를 리드해가는 그녀가 더 없이 좋았다. 마루를 건너 처녀의 방을 들어서자 포근하고 율동적인 체리핑크가 감미롭게 흐르고 있었다. 방안의 분위기가 퍽 마음을 안정시켰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이런 안정된 분위기를 좋아하는 습관이 있었다. 언제나 들어올려나 하고 기다려도 처녀는 들어오는 기색이 없었다. 부엌에서 무엇을 씻는 소리만이 간혹 들릴 뿐이다…

들어오면 먼저 감사하다는 인사말을 어떻게 한다? 이름을 어떻게 불러야 될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쟁반에 과일을 담아가지고 처녀가 들어왔다.
“준비해 둔 것이 없어서 과자를 조금 사 왔어요.”
이렇게 상냥하게 말하면서 쟁반을 놓고 살며시 문을 닫고 큰 방으로 건너가는 것이다. 나는 반벙어리 이상으로 말수가 적었다. 어떤 말부터 해야 될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저 시키면 시키는 대로 행할 줄만 아는 아주 소극적인 태도를 취할 수밖에 몰랐다. 처녀가 시키는 대로 큰방에서 오랜만에 나에게는 호화로운 침실에 누웠지만 좀처럼 잠이 오지 않고 처녀가 빨아다 널어 논 나의 밤색 양말을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왜? 이런 극진한 대접을 받아야 하나. 집에서는 지금쯤 나를 애타게 기다릴 텐데... 저 처녀는 내가 무엇인데 이토록 정성스럽게 보살펴 줄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잠이 들었다. 주인 내외분이 수금을 가신지 4,5일이 지나고 그 사이 나는 가게에 남아있던 잠바와 코트를 거진 다 팔았다.
어느새 나는 처녀를 이모라고 부르고 있었다. 나는 이모를 무척 따랐다.

어제 아침 일찍 문을 열고 있을 때 주인아저씨께서 가게로 직접 오셨다. 아마 내가 매일 몇 시쯤 문을 여는지 직접 보려고 그르셨나 보다. 아침 6시 조금 지나서였다.
“보조는 매일 이렇게 일찍 문을 열어서?”
“네, 다른 가게보다 제일 먼저 여는 것이 좋기 때문입니다.”

아저씨께서 집으로 들어가시고 얼마가 지나자 이모가 아침밥을 가지고 왔다. 나는 지금이야말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할 때라고 생각하고 아무도 없을 때 하려고 벼르던 말을 했다. 지금 말하지 않으면 또다시 둘이 만날 기회가 희박하기 때문이다. 나는 용기를 다 내어
“이모, 실은 부탁이 하나 있는데요. 들어 주시겠어요?”
두근거리는 가슴을 애써 억제하면서 조심스럽게 이모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이모는 그 진주알처럼 희고 잘 정리된 치아를 살며시 드러내면서 양 볼에 보조개를 피운다.

“무슨 부탁인데요. 재단사가 나한테 부탁할 일이 다 있어요?”
“네, 여러 날을 생각해서 결론을 부탁드리는 것입니다. 한낱 철없는 어린아이의 장난으로만 생각하지 마시고 들어주세요. 사실 이모도 아시겠지만 저는 외로운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모를 알고부터는 이 세상에 누구보다도 명랑하고 즐거운 생활을 하고 있었어요. 며칠 사이였지만 정말 저에게는 더 없는 기쁨의 나날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주인아저씨께서 오늘 오셨기 때문에 지금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저는 형님이나 누님이 없습니다. 누님이 되어 주세요.”

나는 약간 부끄러움과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제하면서 빠르게 가슴속에 있던 말을 해 버렸다. 가만히 머리를 숙이고 듣고 있던 이모는,
“재단사, 말은 잘 들었어요. 그렇지만 나는 아직 마음의 결정을 하기 앞서 재단사에게 할 말이 있어요. 사실은 저도 재단사를 처음 볼 때 첫 인상이 좋았어요. 언니한테 재단사가 퍽 성실하고 일도 믿음직스럽게 잘하며 보통 청년들보다 다르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리고요, 며칠간 같이 있으면서 직접 재단사를 대하는 사이 언니의 말이 맞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런데 제가 한 가지 생각하지 못한 것은 이렇게 빨리 재단사가 말할 줄 몰랐어요. 저도 그 문제를 전혀 생각 안 한 것은 아니지만 이런 문제는 이렇게 빨리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재단사도 좀 더 생각해 보세요. 저 보단 더 모든 면으로 좋은 사람이 있을 거예요. 저도 재단사가 기대하는 그만한 사람이 되는지 생각해 보겠어요. 며칠 있다가 다시 한 번 만나요. 그때까지 생각해서 서로 확답을 교환해요.”

이모는 이렇게 말하고 가만히 나를 쳐다본다. 나는 일순간 패배감 비슷한 감정이 얼굴을 화끈거리게 하고 얼굴을 들 수 없었다. 아주 거절당한 것이 아닌데 얼마나 무안한지 쥐구멍이 있으면 기어들어 가고 싶다.

…(중략)…
오늘은 아침부터 우울하기만 하던 하늘이 기어이 울음을 터트리고야 말았다. 나의 답답한 마음을 알기나 한 듯이… 며칠 생각해보고 서로가 변치 않을 의남매를 맺고자 말하던 이모가 일주일이 다 되어 가는데도 한 번도 가게나 공장에 나타나질 않는다. 정말 너무 야속하다. 모처럼 느껴본 나 아닌 다른 사람의 정이었는데 벌써 끝이 났단 말인가. 그렇지 않으면 이모가 바쁜 일이 있어서, 좀처럼 시간이 없는 걸까?

이런 저런 공상을 하면서 가게에 우두커니 앉아 있을 때에 이모가 오는 것이다. 나는 너무 반가워서 하마터면 이모하고 소리를 지를 뻔했다. 받치고 온 우산을 접어놓으면서 하얗게 웃는다.
“이모, 왜 요사이 한 번도 오질 않았어요?”
나는 이렇게 반가움을 나타낸다는 게 도로 성난 사람이 하는 말투로 이모에게 말했다. 그러자,
“어머, 재단사 화나나 봐요. 나는 나대로 바빠서 못 왔는데 재단사도 화날 때가 있어요. ..호호?”
이렇게 말하자 나도 슬며시 웃고 말았다.

이모에게 나의 누님이 되어 주겠다는 대답을 들을 땐 하늘 끝까지 올라가는 기분이었다. 보잘것없는 나를 동생으로서 대하여 주신다는 누님의 정에 보답하는 것은 이 집 일을 지금보다 더욱 열심히 해서 누님의 언니네 집이 부자가 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라고 그 자리에서 굳게 마음에 다짐을 했다.

…(중략)…
오늘도 이모와 주인집에서 전축을 듣고 둘이서 화투 놀이를 하고 재미있게 하루를 보냈다. 그러나 나는 불안한 그 무엇이 나의 마음속에서 서서히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누님으로 만족할 줄 알았던 나의 감정이 누님을 떠나서 왜 내가 나이를 작게 먹었던가? 누님은 나보다 왜 나이를 많이 먹어야 되냐를 생각하고 언젠가는 나의 곁을 떠날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렇게 같이 재미있게 듣던 전축의 재즈곡이 아무런 음향을 나타내지 않는다. 언제까지고 같이 이 상태로 같이 살 수는 없을까? 누님이 나의 아내가 되는 길은 없을까? 그 하얀 손이 나 아닌 다른 사람의 손에 잡히면 나는 어떻게 하란 말인가. 아, 미칠 것만 같다. 이렇게 생각하면 할수록 누님은 더욱 나의 마음속에 확고부동한 뿌리를 내리는 것이다. 그렇지만 끝내 이루어질 수 없는 나 혼자만의 나쁜 욕심일 것이라면 더욱 더 깊이 뿌리를 내리기 전에 제거하여야 현명한 방법이 아닐까? 누구하나 나의 이 번뇌를 바로 잡아 줄 사람이 나의 주위에는 없기 때문에 나는 여러 날을 혼자 고민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어느 날, 나는 깊은 죄 의식을 깨달았다. 지금 이 시간 집에선 어머니께서 이 불효의 자식을 위해서 마음으로 정성을 드리고 계실 어머니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렇다. 지금 내가 이런 사치에 한 눈을 팔 시기가 아니다. 나는 우리 집의 장남이 아니냐. 집안의 모든 일을 책임지고 이끌어 나가야 할 내가 이 무슨 엉뚱한 일에 고민을 하다니. 남자가 한 번 누님이라고 정했으면 누님이지 무슨 다른 생각을 품다니. 그렇다. 이렇게 아름다운 누님께 그런 생각을 품는다는 것은 누님을 모독하는 것이 아닌가. 내일부터 누님을 만나지 마라. 어느 책에선가 심리학자가 인간은 만나지 않으면 자연히 멀어지는 것이라고, 그 말을 믿어 보기로 하자.

이렇게 결심한 나는 이 선생님께 편지를 썼다.

대구 청옥고등공민학교 다닐 때 존경했던 이희규 선생님께 그토록 짝사랑한 오금희를 소개하는 편지를 썼다.

다음은 1967년 2월 14일의 일기장이다.

오늘도 보람 없이 하루를 보내는구나. 하루를 넘기면서 아쉬움이 없다니. 내 정신이 이토록 타락할 줄은 나 자신도 이때까지 생각해 본적이 없다. 젊음을, 순수한 사랑을, 출세를 위해서 스승님에게 밀다니. 그렇지만 존경하시는 선생님이었기에

…(중략)…
좀 더 현실적으로 냉정해야 할까? 이때까지 많은 여자들 곁에서 일을 했지만 누나만큼 나를 따르고 한 시도 빼놓지 않고 생각하게 한 사람은 그녀 혼자뿐이다. 사귀어  온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분명히 그녀는 한 여성으로써 모든 것을 다 갖춘 사람이다. 선생님께 편지를 한 것이 잘한 것이지 못된 것인지는 나 자신도 모르겠다. 다만 한 가지 목표를 행하여 행했을 뿐이다. 솔직히 지극히 사랑하는 사람을 나의 앞날의 출세를 위해서 이 공장에서 완전한 재단사가 되기 위해서 내 스스로 절제할 수 없는 감정의 포로가 되기 이전에, 한참 피어나던 사랑을 찍어버린 것이다. 마음에 내린 뿌리가 아무리 강하다고 하더라도 줄기 없이 뿌리가 얼마나 더 존재하겠는가. 곧 퇴화하고 말겠지. 부디 동심을 버리고 현실에 충실하라.

…(중략)…
이런 일기를 쓰면서도 미련이 남았다고 할까? 혼자 서울대 법대 뒤 낙산동에서 시집을 놓고 외롭고 고독으로 가득 찬 마음을 마음껏 외롭게 만들어서 어떤 한 구석에 외로움을 즐기는 취미가 하루하루 늘어만 갔다. 공장 일을 하지 않지만 하루도 빠지지 않고 출근을 했다. 일이야 할 것 없어도 매일매일 출근하는 것이 의무라고 생각했다. 또 다른 이유는 점심 한 끼를 얻어먹기 위해서, 하루하루가 무척 지루하고 바람 없는 해변처럼 단조로움보다는 나으리라. 벌써 3월 달이지만 일은 시작하지 않는구나.

전태일은 오금희를 만나고 짝사랑하다가 1967년 2월 14일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하여 67년 3월까지 썼다. 어린 시절 회상 수기는 67년 2월 무렵까지 생활을 훗날 정리한 것이다. 

이 일기는 이루어질 수 없었기에 포기한 사랑의 아픔을 애틋하게 기록했다.
다음은 일기들을 요약해 보았다.

"67, 2月 15日
오금희. 안녕. 이 선생님에게 편지를 씀으로써 그대는 영원한 천사와 같이 사랑해선 안 될 사람. 부디 행복하소서. 진심으로 두 손 모아 주 앞에 기원합니다. 이 선생님. 사모하는 오금희. 두 사람을 위해서는 나의 미약하나마 힘닿는 데까지 행복을 비리라. 이로써 잠시나마 나의 심에 자리를 잡았던 연인을 잊어야 할 때가 왔는가 보다. 부디 행복하소서.
…(중략)…
인생은 나그네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느냐, 목숨을 걸고 사랑을 해도 못 맺을 사랑이기에 사랑의 운명 속에 외로운 나, … ”

“67, 2月16日
잠시나마 나에게도 행복은 있었다. 그렇지만 이젠 행복의 종소리가 끝이구나. 종을 울리는 것 같은 짧은 순간을 못 잊어 애태우다니. 어저께 아니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희망과 용기를 주던 그 사람, 영원한 추억으로 끝나리.
…(중략)…
어두운 밤이 가면 아침이 오고 장미는 시들어도 다시 피련만 사랑은 불사조인가 물망초던가. 내 가슴 벌레 먹는 그 님이건만 남몰래 이 노래를 님께 바치리.”

“67, 2월 18일
오늘은 그런대로 재미있는 하루였다.
이모와 같이 화투를 치고 같이 웃고 즐겨으니깐. 그리고 전에 신청한 ‘연합 중고등 강의록’ 안내서가 아침에 배달되었으니까.
나에게 지금 이 성격이 나쁜지 좋은 성격인진 몰라도 한푼 없는 내가 어떻게 강의록을 받을 생각을 하니 전기곤로와 대목에 산 맘보바지와 입고 다니는 잠바를 팔아서 620원을 만들 결심을 하고 오늘은 기분이 좋아서 일기를 쓴다.
‘나에게는 배움을 빼고 나면 아무것도 없다.’
그렇지만 그 기분도 한때, 벌써 고독감이 전신을 역습해 오는구나.”

“67, 2月 19日
혼자 냉방에서 잠들기란 정말 외롭고 고독한 것이다.”

“67, 2월 26일
…(중략)…
저녁에는 누나네 집에서 누나와 화투치기를 재미있게 했다. 정말 시간가는 줄 모르고 웃으면서 재미있게 놀았다.
며칠 후 조용히 만서서 누라라고 부르고 태도를 확실히 하고 누나로 대해야겠다.”

“67, 3月 23日
어제 저녁 12시부터 오늘 아침 1시 반까지 누나를 생각하는 마음을 그리느라고 잠을 못 자서 오늘은 일하면서 졸았다. 그렇지만 누나가 저녁에 공장에 와서, 하 조금도 피곤한지를 모르겠다. 지금 이 시각에도 이야기하고픈 금희 누나

누나, 지금 이 시각에 무얼 생각하세요.

나는 잠 못 이루네. 잠 못 이루네.
…”

전태일은 일기에 유행가 가사와 많은 시들을 적어 놓았다. 사춘기에 흔히 접하는 김소월 시가 많았다. 『못 잊어』, 『밤』, 『초혼』, 『산유화』, 『옛 이야기』, 『진달래 꽃』 같은 시들이다. 사춘기 사랑의 아픔을 짐작케 하는 시다.

수기에는 외국 서정시인 3명이 등장한다. 영국 여류시인 크리스티나 로세티(Christina Georgina Rossetti; 1830-1894)의 『내가 죽으면 사랑하는 이여』, 노벨문학상을 탄 아일랜드 시인으로 W.B 예츠(William Butler Yeats; 1865-1939)의 『패니에게』, 스코틀랜드 서민의 소박한 감정을 표현한 로버트 번스(Robert Burns; 1759-1796)의 『내 사랑은 빨간, 빨간 장미꽃』이 있다.

또한 수기에는 청춘 시절 젊은이들이 한 번은 빠져봤을 소설이 등장한다. 그 수기는 아래와 같다.

희한한 상쾌감이 마음에 꽉 차있네. 그렇지 말하자면 달콤한 봄날의 아침나절 같이. 나는 온 마음을 함빡 쏟아져. 이 상쾌감을 은미하며 즐기고 있네. 나는 이렇게 홀로이 살면서, 마치, 나 같은 사람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 같은 이 지방에서 즐거운 생활을 보내고 있는 것일세. 나는 행복하여 고요한 현재의 생활의 정서 속에서 푹 잠기어 버리고 말았네. 그 때문에 제작은 조금도 없어. 지금 같아서는 그림은 통 한 장도 못 그릴 것 같네. 그러나 이러고 있는 지금의 경지보다도 더 한층 위대한 화가가 피어본  일은 지금까지  단 한번도 나에게는 없어.

그리운 벗이여 사람의 마음은 참 이상한 것일세. 그러게까지 좋아하면서 헤어질 줄 모르던 자네와 헤어져버린 것이 지금에 와서는 오히려 즐거운 마음이 들거던, 자네는 섭섭하게 생각하겠지. 그렇지만 나를 용서하여 주리라 믿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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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이 지방 젊은 사람들이 무도회를 개최한 일이 있는데, 거기에 나도 참석하게 되었네. 처녀들과 같이 마차를 타고 가는 도중에  'S 샤르 롯데'라는 처녀를 같이 데리고 가기로 되었네.

      JW 꿰에테(1749년-1833년)
         요한 볼프간 꿰에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전태일 수기장에 있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 관한 단상. 괴테를 꿰에테로 표기했다.(사진제공= 송필경)
전태일 수기장에 있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 관한 단상. 괴테를 꿰에테로 표기했다.(사진제공= 송필경)

이 수기에서는 괴테를 꿰에테로 표기했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사랑』 은 감수성이 지나치게 풍부했던 청년이 이룰 수 없는 사랑의 포로가 되어 슬픔을 못 이겨 자살한다는 이야기다.

주인공 베르테르는 약혼한 여자 롯데에게 첫 눈에 반한다. 하지만 롯데가 곧 결혼하자 베르테르의 사랑의 희망은 사라져 버린다. 게다가 돈은 있지만 시민 계급 출신이어서 귀족 사회에서 모욕을 당해 울분에 휩싸였다.

베르테르는 생각이 많았던 햄릿처럼 자신을 향해 한탄한다.

“아아, 좀 더 단순한 성품으로 태어났더라면 나는 태양 아래서 가장 행복한 인간이 될 수 있을 텐데!”

전태일 역시 그 나이 젊은이처럼 사랑의 열병을 심하게 앓는다. 4살이나 많고 자신보다는 훨씬 부를 많이 지닌 연상의 여인에 비해 찢어지게 가난한 자신의 가정환경으로 인한 자괴감 때문에 전태일은 고민한다.

이 고민 때문에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사랑』을 읽으며 자신을 베르테르로, 오금희를 샤를 롯데로 투영했음직 하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어느 날, 나는 깊은 죄의식을 깨달았다. 지금 이 시간 집에서는 이 불효한 자식을 위해서 정성을 드리고 계실 어머니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렇다. 내가 지금 이런 사치에 한 눈을 팔 때가 아니다.”

이룰 수 없는 사랑 타령을 우울하게 하다가 문득 정신을 차린다. 반드시 수행해야 할  더 큰 의무가 이미 전태일의 가슴 깊이 자리를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아, 좀 더 단순한 성품으로 태어났더라면 나는 태양 아래서 가장 행복한 인간이 될 수 있을 텐데!”

베르테르가 자신에게 한탄한 이 말을 우리는 전태일에게도 적용할 수 있지 않을까. 다재다능했던 전태일이 현실적인 면에 좀 더 단순했다면 개인적인 욕망을 충분히 충족했으리라.

개인 성품이 단순하지 않았던 전태일은 자신이 부양해야 할 가족도 마음에 걸렸지만, 어린 여성 노동자를 짐승처럼 부리며 인간의 고귀한 인격을 모욕하는 노동착취를 떠올렸다. 그래서 베르테르처럼 개인적인 사랑 타령 같은 지극힌 개인적인 욕망을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전태일은 판단하지 않았을까.

위대한 업적을 남긴 인물의 삶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고집스러울 정도의 강한 집중력으로 목표한 가치를 이룰 때까지 단 한 치의 곁눈도 팔지 않는다. 충동을 제어하고 자신을 극복해 내는 사람에게 대적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 법이다.

“저는 죽는 게 두렵지 않습니다. 죽음을 겁내는 사람은 참되게 죽을 수 없어요. 우리는 죽음을 가치 있게 만들어야 합니다.”

수많은 사랑의 염문을 뿌리며 비극적인 사랑을 경험한, 샹송의 여왕으로 불리는 프랑스의 국민가수 에디뜨 피아프(Édith Piaf; 1915~1963)가 죽음을 앞두고 한 말이다.

전태일의 죽음은 베르테르의 죽음과 달랐다. 차라리 에디뜨 피아프를 닮았다. 고통 받는 어린 여성 노동자들에게 향한 연민은 죽음과 맞바꾼 참으로 가치 있는 사랑이었다. 지극하고 숭고한 휴머니즘이라 불러야 마땅하다.

정말이지 우리는 전태일의 삶을 보지 않고는 가진 자의 욕망이 철철 넘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무엇이 인간의 소중한 가치인가를 알 수 없다. 전태일이 있고 나서 남한의 양심적인 사회의식은 다시 태어났다고 말해도 틀림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우리 사회가 지금도 고통스러운 것은 전태일이 그토록 원한 노동과 인간을 존중하는 가치를 아직도 전혀, 또는 제대로 실현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정직하게 물어보자. 그리고 정직하게 답을 해보자!
지금, 우리 사회는 과연 ‘사람이 먼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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