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가족부 해체를 반대하며
상태바
여성가족부 해체를 반대하며
  • 송필경
  • 승인 2022.05.09 16:46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논설·시론] 송필경 논설위원

여성의 지위는 모든 문명을 들여다보는 하나의 비판적인 창이요, 도무지 변하지 않는 듯이 보이는 핵심요소다.

여성은 가정과 너무 가깝고 우리 모두가 여성에게서 태어나 사회에 들어왔으며 그 사실을 이해하느라 인생의 많은 부분을 보내는 까닭에 여성이 우리 자신의 역사에 무엇을 의미하는지 자의식을 갖고 반성해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하지만 국외자의 눈으로 다른 사회의 창을 들여다보는 것은 훨씬 쉽고 거기에서 우리는 곧 우리 방식과 그들 방식 간의 거리를 알아차릴 수 있다. 나를 포함해서 한국여성의 조건에 갈채를 보내는 외국인은 거의 없다. 최소한 최근까지도 첫인상은 최악이었다.

『한국현대사』를 쓴 시카고대학 역사학 교수 브루스 커밍스의 견해다. 이 책은 지난 2001년 출간됐지만 나는 브루스 커밍스 교수의 견해가 지금도 옳다고 보며 공감한다.

내 여성관은 엄마를 보면서 생겼다. 엄마는 만 36세에 1녀5남의 막내로 나를 낳으셨다. 나를 낳고 곧 장티푸스에 걸리셨다. 원래 몸이 약한데다가 다산을 하셔서 그 후 줄곧 병을 달고 사셨다. 나는 옆집 아줌마의 젖을 먹었다고 한다. 40대 초반에 전 치아를 상실하신 정도니 평생 잡수시는데 고통을 느끼셨다. 내가 치과의사 됐어도 어찌할 수 없을 정도였다. 

아버지는 교육 공무원이셨고 경제에 무관심하셨다. 병약한 엄마는 얼마 안 되는 유산으로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까지 겪으시면서 우리를 악착같이 키우셨다. 그러다보니 성격이 매우 날카롭게 예민하셨다.

내가 대학 다닐 때 60을 넘기셨고 개업해서 자리를 잡아 제대로 모셔볼 마음이 있었지만 지난 1991년 간암에 치매를 앓다 72세에 돌아가셨다.

엄마가 19살에 6대 종손인 아버지에게 시집오니 아침밥을 지어야 할 식솔이 40여 명이었다고 한다. 제사는 6대를 모시니 일 년에 12번을 지냈고 치매 앓던 시할머니를 20여 년 동안 모셨다,

연세가 들수록 자리에 눕는 경우가 많았다.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 형제들은 다 외지에 나가고 나만 집에 있었다. 편찮으실 때 내가 잔심부름하며 옆에서 간호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럼 옛날 기억을 많이 늘어 놓으셨다. “내가 시집와서 부엌일을 도맡아할 때 서방 줄려고 계란 하나를 몰래 숨겨 놓았다 시어머니에게 들켜 갖은 욕을 먹었다. 근데 네 아버지는 말이야…” 같은 푸념은 내가 수 십 번도 더 들었다.

나는 여성하면 엄마가 가장 많이 떠오른다. 조선시대부터 우리 여성의 삶을 나는 엄마를 통해 짐작해 왔다.

1970년대 초까지 버스에 차장이 있었다. 당시 버스는 한 사람이라도 더 타려고 항상 차가 미어터질 것 같았다. 차장은 차비를 받아야 했으며 겨우 매달려가는 사람을 어린 소녀의 연약한 신체로 안으로, 안으로 온 힘을 다해 밀어 넣어야 했다.

(사진제공= 송필경)
(사진제공= 송필경)

전태일 열사가 묘사했듯이 1970년대 내내 어린 여성 노동자들은 혹사 당한 기계였다. 1980년대에는 위장 노동자 취업이 성행했다. 여성 노동자들이 발각되면 조사받으면서 성희롱은 다반사에다가 성고문까지 당한 사례가 있었다.

2000년대 들어서도 여전했다. 여성 검사조차 상급자에게 성희롱을 받았다. 최근 아니 지금도 사회 곳곳에서 여성은 성폭력에 노출되고 시달리고 있을 것이다.

내가 호찌민을 존경하는 이유는, 지난 1890년에 유학자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그 시대 사람으로서 여성을 진심으로 존중했기 때문이다.

호찌민은 1930년대부터 베트남 전 민족에게 존경받는 애국자였다. 특히 해외에서 호찌민은 전설적인 영웅으로 널리 알려졌었다.

한 번은 태국(?)에서 독립운동단체를 방문했을 때였다. 베트남인이 사는 산골 집을 들렀다. 주인이 손님이 호찌민이라는 사실에 너무나 감격해 아내에게 음식 준비를 빨리 하라고 호령을 했다.

얼마 지난 뒤 주인이 슬그머니 부엌으로 갔다. 곧바로 비명이 들렸다. 호찌민이 부엌으로 가니 주인이 아내를 심하게 때리고 있었다. 이유를 물어보니 음식 준비를 빨리 하지 않아서였다고 했다.

호찌민은 주인을 방으로 불렀다. “당신들이 나를 왕처럼 모시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부인과 가족을 진정으로 존중하는 것이 진정 나라를 위하는 일”이라고 엄하게 훈계했다.

1953년 가난한 농업국가 북베트남은 세계최강의 산업국가 프랑스·미국의 연합군과 전쟁을 치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베트남 전 역사에서 엄청나게 중요한 독립혁명전쟁이었다. 이 엄중한 전쟁 중에 호찌민은 전쟁을 치르는 전 인민에게 다음과 같이 호소했다.

“여성을 존중하라, 인류 인구의 절반은 여성이다. 여성을 해방하지 않는 혁명은 혁명이라 할 수 없다.”

나는 지금 젊은 남성들이 여성 때문에 어떤 분명한 불이익을 받는지 자세히는 모른다. 여자는 남자의 갈비뼈로 만들었다던가, 여자가 몸 파는 일이 인류 최초의 직업이라느니 하는 남존여비의 생각은 우리 사회는 물론 양(洋)의 동서(東西)를 떠나 예부터 지금까지 인류를 지배한 완고한 생각이었다.

특히 조선사회는 세계의 다른 어떤 국가에서보다 더 가혹하고 더 오래 지속한 남존여비의 관념이 지배했다.

최근 수 십 년간 격세지감을 느낄 정도로 여성 존중이 사회적으로 실천·발전하고는 있지만 아직 만족하기에는 턱이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남과 여의 존재 무게를 재는 수평저울 눈금은 중심에 이르지 못하고 아직도 남성 쪽으로 많이 기울어져 있다고 나는 본다.

나는 엄마에게서 오랜 관습이란 무거운 짐을 짊어진 여성의 꼬부랑 모습을 보았다. 내 딸이 애를 키우며 직장에 다니고 있는 힘겨운 모습을 지금 보고 있다.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나는 엄마를 가장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을, 결혼하고는 아내가 가장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을, 지금 이 나이에 딸 손녀 아들 손녀 둘이 가장 소중한 사람이라는 걸 느끼며 살고 있다. 엄마, 아내, 손녀 모두 여성이다.

여성가족부를 해체하려는, 곧 집권할 당의 대표가 여성에게 하는 말이 너무나 천박하다. 여성의 문제는 과거의 문제가 아닌 지금, 이곳, 2022년의 문제로 여전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호찌민의 말처럼 진정한 민주정치(혁명)를 이루려면 진정한 여성 해방이 있은 다음에야 비로소 가능하다. 나는 여성가족부 해체를 반대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고라니 2022-05-10 12:28:56
그러는 글쓴이는 박원순 안희정의 피해자가 2차가해를 당할때 뭐라고 씨부렸냐?
진심으로 궁금하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