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디테일에 있다(God is in the deta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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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디테일에 있다(God is in the detail)
  • 송필경
  • 승인 2022.05.12 17: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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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시론] 송필경 논설위원

‘의식의 혁명 없이 시각의 혁명은 없다.’ 새로운 양식은 새로운 의식에서 출발한다. 명작의 조건은 디테일이며 장인(匠人:Master) 정신의 특징은 디테일(detail)이 아름답다는 것이다.

미스 반 데어 로에(Mies van der Rohe: 1886〜1969)는 지난 1929년 바르셀로나 엑스포(만국박람회) 때 독일관을 지은 독일출신의 세계적 건축가이다. 엑스포가 끝난 뒤 독일관(Mies House)을 뜯지 않고 남겨둘 정도로 바르셀로나에서는 가우디의 성당만큼 소중히 여긴다.

그의 건축은 아주 심플하다. 그는 “Less is more; 적은 것이 더 많은 것이다”란 말로 유명하다. 그가 사망하자 뉴욕타임스 1면 오른쪽 박스 기사에 그의 사망 소식을 싣고 제목으로 뽑은 게 바로 “God is in the detail”이다.

미스 반 데어 로에에게 명작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니까 명작의 조건은 디테일이라고 대답했다. 미국이란 나라가 커가면서 국제적인 것을 자기들에게 갖고 와서 정신적 자산으로 삼으니까 참 부럽다는 생각이 든다.(미국이 독일인 미스 반 데어 로에를 자신들의 소중한 자산으로 삼았다는 점을 유홍준 교수는 강조했다.)

우리의 삶을 행복하게만 해준다면 그게 아프리카 이름 없는 나라의 것이라면 어떤가? 우리의 장인 정신은 아름다운 디테일의 극치인 부여에 있는 백제 금동 향로에 있다. 또 정인 정신의 집대성인 성덕대왕 신종에서도 볼 수 있다. 장중하고 아름다운 신종의 소리는 기계공학적 훌륭함과 함께 종에 새긴 1,037자 명문(明文) 속에서 장인 정신과 디테일을 잘 보여주고 있다.  

“부처님의 말씀을 받아쓰면 불경이고, 부처님의 모습을 만들면 불상이고, 부처님의 목소리를 만들면 종소리이니라.”

우리가 한국문화의 정체성을 찾을 때 과거에는 우리 문화가 당당하다는 것을 강조했지만 이제는 이를 넘어 세계사적 위상이 무엇인가로 바뀌었다. 문화란 우리 것만 연구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속한 동아시아와 이를 넘어 세계문화사 속에서 우리 창조성으로 우리 문화의 정체성을 찾아 봐야 한다.

- 지난 4월 9일 경주 ‘수오재(守吾齋)’에서 있은 유홍준 교수의 강의 ‘우리 시대 장인정신을 위하여’에서 일부 편집·요약

내가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가 나오자마자 읽었을 때 받은 감탄은 다산초당 가는 길 입구 윤단이란 분의 무덤 앞 동자석을 설명한 부분이었다.(1993년 초판 44쪽 참조)

묘지 석상인 동자석을 보고 “야무지면서도 귀엽고, 경쾌한 단순화 작업이 자못 현대적 감각을 풍긴다”라고 했던 유홍준 교수의 관찰력의 디테일은 미술을 바라보는 내 시각에 큰 충격을 주었다. 잘 알려진 웅장한 조형물에만 관심을 보이다가 주위 일상의 흔한 조형물에서도 창조적인 해석이 가능하다는 사례를 봤던 것이다.

‘진실이 하나만 존재한다면 동일한 화제(畵題, Theme)로 그렇게 많은 그림을 그릴 수 없다.’ 피카소의 말이다. 같은 현상이라도 다르게 설명하는 체계는 분명히 존재한다는 뜻이다. 평론도 마찬가지라 나는 생각한다.

누구나 무심코 지나치게 마련인 비탈길에 있는 흔하고 작은 조형물에서 현대적 감각을 읽어내는 유홍준 교수의 예리한 눈매와 섬세한 표현력은 가히 미술 평론의 장인이라 할만 했다.

석굴암의 석불과 에밀레종(성덕대왕신종) 같은 세계적인 조형물을 이런 장인의 안목으로 해설했으니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시리즈는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고 문화유산답사 여행이란 유행을 낳았고 우리 문화유산을 보는 대중의 관심과 눈높이를 크게 높였다.

우리는 일상적 경험을 ‘귀납적’ 사실로 차분하게 관찰하기보다 ‘척보면 안다’는 식의 ‘연역적’ 전제로 성급하게 종교나 사상, 또는 예술의 원리를 단정하는 경향이 강하다. 내 삶을 반성해보면 나는 귀납적인 디테일에 약했다. 아니 자질구레한 일이라 무시하거나 경시했다. 거시적으로 조망한다는 명목으로 세밀한 묘사나 표현을 무시했다.

디테일을 우리말 사전에서는 ‘부분, 세부’라고 뜻풀이 한다. 삶과 공부(학문·예술·전공분야)의 모든 부분에서 ‘디테일’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삶의 대부분을 소비한 이제야 느끼고 있다.

전태일이 자기 손으로 쓴 ‘자기수련서’ 30여 항목과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권에 나오는 동자석.(사진제공= 송필경)
전태일이 자기 손으로 쓴 ‘자기수련서’ 30여 항목과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권에 나오는 동자석.(사진제공= 송필경)

나는 전태일 50주기를 맞기 1년 전인 지난 2019년 후반부터 『왜 전태일인가』를 집필하기 위해 A4용지 8백장 가량의 자료를 약 3개월에 걸쳐 읽었다. 원고지로 치면 6〜7천매 가량일 것이다.

전태일은 어린 시절을 거의 비렁뱅이로 보냈다. 때로는 어머니의 걸식으로 주린 배를 채웠고, 냇물에 떠내려 온 배추 잎과 무 조각을 건져 씻은 다음, 소금과 고춧가루를 뿌린 것을 맛있는 김치로 먹었다.

청년 시절은 청계천 평화시장이란 열악한 환경에서 노동자로 일했지만 자신에게 닥친 엄혹한 환경과 부당한 삶에 불평하기에 앞서 감사하는 마음을 먼저 지녔다. 자신과 가족의 처지가 비참했음에도 어린 여성 노동자의 비참함에 더 괴로워하며 그들의 아픔에 동참했다. 

어린 여성 노동자의 삶이 왜 이다지 힘들고 짐스러운지를 설명해 주는 이가 아무도 없어, 그들의 어깨를 누르고 있는 무거운 짐을 들어주기 위한 해결책을 찾아 혼자서 고민했다. 이 세상은 자기 혼자서만 사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살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는 장엄한 분신으로 끝난 전태일의 짧은 삶에 대한 내 평가는 이렇다.

남한 자본주의 사회의 근본적인 모순을 예리하게 포착한 지성인이었고, 모두에게 익숙해진 불합리를 바로잡기 위해 자신의 한 몸을 바친 실천 노동운동가였고, 불의에 맞서기 위해 예수에게 진실한 믿음을 구한 참다운 신앙인이었다.

초등학교는 2년 다니는 둥 마는 둥했고, 중학교 1학년 과정을 겨우 마쳤다. 그런데 그런 학력으로 우리 현대사에 가장 우뚝한 지성인이라니! 방대한 자료집을 읽으며 전태일 지성의 힘은 디테일에 있었다는 걸 발견했다.

전태일의 인간으로서 진정한 위엄은 자신에게만은 대단히 엄격했다는 사실이다. 날마다 자신의 소명을 점검하고 지난 하루를 반성하는 기도를 올렸다. 일상에서 먼지 한 톨이라도 영혼에 묻지 않게 애썼다. 어떤 숭고한 무게감이 기도하는 전태일의 정신에 자연스럽게 담겼다. 전태일은 침착하고 확신에 찬 인간으로 변모했다.

전태일은 최후의 결단을 내리기 전에 자기 훈련을 위해 실천해야 할 여러 디테일한 항목을 골라놓고 스스로 묻고 다짐했다. 선한 삶, 진지한 삶, 지혜로운 삶. 새로운 삶에 어울리는 자신의 모습을 가꾸기 위해서였다.

- 나는 인생의 명확한 목적을 가지고 있는가?
- 친구나 동료, 윗사람에 대하여 성실하고 솔직한가?
- 나는 도덕적으로 결백한가?
- 나의 목적을 이룩하기 위하여 자기 수양에 노력하고 있는가?
- 장래를 위한 지식을 쌓기 위하여 연구를 게을리 하고 있지 않는가?
- 두뇌의 능률을 유지하기 위하여 신체적 에네르기의 사용을 절약하지 않으면 안 될 육체적인 약점이 없는가?
- 마음에 나쁜 영향을 끼칠 좋지 못한 습관은 없는가?
- 딴 의견이 있을 수 있는 경우에 딴 사람의 의견만을 좇는 일이 있는가, 없었는가?
- 나는 일에 대하여 빈틈이 없고 또한 일하는 태도가 훌륭하다고 볼 수 있는가?
- 나는 나의 일생의 궁극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만한 인물인가?

이런 항목 30여 개를 정하고 매일 점검하기 위해 기도를 했다. 불과 20세 남짓한 노동자가 자신을 단련하기 위해 스스로에게 질문한 마음 자세의 품격이 어찌 이렇게 엄격하면서 정갈할 수 있겠는가?

자기 능력의 한계를 물은 까닭은 자신의 판단을 올바르게 갖추기 위해서였다. 그러고 나서 도덕적으로 바른 길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게 걸었다.

유교 경전인 『중용(中庸)』에 “숨은 곳에서 보다 자신의 모습이 더 잘 드러나는 것이 없고 미세한 것보다 더 뚜렷한 것이 없다”란 구절이 있다. 이 말의 뜻은 ‘신은 디테일에 있다(God is in the detail.)’는 말과 같다.

대충 보면 쉽게 보이는 일도 제대로 해내려면 예상했던 것보다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철저하게 쏟아 부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디테일(detail)은 중용에서 나오는 ‘은미(隱微;숨어 있는 미세한 것)’의 뜻과 매우 닮았다.

세상을 맑게 보려면 자신의 눈에 있는 때를 먼저 벗겨야 한다. 전태일은 자기 정신에서 한 톨의 ‘은미(디테일)’한 부분도 철저하게 점검했다. 전태일은 자기수련서에 적은 대로 자신에게 진실하게 묻고 정직하게 답했다. 전태일은 20살 갓 된 젊은 노동자였지만 이 세상의 참과 거짓이 무엇인지 알았다.

예술적 디테일 강한 유홍준은 종소리에서 부처님의 음성을 들었을 것이고, 디테일한 자기수련을 위한 기도를 하면서 전태일은 예수의 음성을 들었을 것이다. 시각의 혁명을 일으킨 유홍준, 의식의 혁명을 일으킨 전태일, 어느 분야에서든 특출한 이들은 디테일에 강했다.

다음은 파스칼의 『팡세』에 나오는 구절이다.

섬세한 정신에 있어서는 그 여러 원리들이 흔히 사용되며 모든 사람의 눈앞에 놓여 있다. 사람들은 머리를 쓰거나 노력할 필요가 없다. 오로지 문제는 좋은 눈을 갖는 것인데, 이것만은 꼭 좋아야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원리는 극히 미묘하고도 수가 많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런데 하나의 원리라도 놓치면 오류에 빠진다. 그러기에 그 모든 원리를 파악하는 데는 퍽이나 맑은 눈이 필요하고, 그 다음 이미 알고 있는 원리에서 그릇된 추론을 하지 않기 위해서는 올바른 정신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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