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일차의료 중심의 이탈리아 국영의료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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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일차의료 중심의 이탈리아 국영의료제도
  • 문정주
  • 승인 2022.06.24 15: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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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주의 공공의료 다시 읽기-1]

국영의료라고 하면 쿠바를 떠올린다. 그와 동시에 의약품도 부족하고 낙후되고 비효율적이라는 부정적 편견이 동시에 따라붙는다. 국영의료하면 마치 나라가 망할 것 같은 걱정도.

그러나 모든 일에는 양면이 있기 마련이다. 우리는 코로나19 펜데믹을 겪어내면서 공공병원, 공공의료의 중요성과 감염병에 대비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몸소 깨달았다. 민영화된 의료 시스템의 세련됨과 빈약함도. 모든 국민에게 부여된 고유번호, 주민번호 때문에 누구 말처럼 공산주의국가처럼 치밀한 통제를 받으며 또한 안도했다.

정답은 없다. 다만, 무엇이 우리 현실에 적합한지 답을 찾고 적용하고 시도할 뿐이다. 

그래서 우선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공공병원 설립을 위해,  전국 각지의 의료취약지에서는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공공병원을 세우기 위한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10년 간 보건복지부 산하기관에서 공공병원을 평가하고 지원하는 일을 해온 의사, 문정주 선생은 제도적 한계를 확인하고 공공의료를 확대하기 위해서는 '상상력'이 필요하다는 마음의 결론을 갖고, 우리와는 전혀 다른 외국의 의료제도를 알리기로 했다.

그렇게 선택한 곳이 '이탈리아'였고, 마침내 지난 2020년 『뚜벅뚜벅 이탈리아 공공의료』를 펴냈다.

문정주 선생은 책에서 미처 다 하지 못한 이야기, 일차의료와 공공의료에 관한 이야기를 본지에 격주로 연재할 예정이다.

문정주 선생은 공공의료 연구자·가정의학과 전문의로. 종합병원 임상 의사로 12년을, 보건소 공무원으로 10년, 보건복지부 공공의료지원단 연구원으로 10년간 일한 뒤 서울의대 겸임교수,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상임감사를 지냈다.

해당 연재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편집자 주

2014년까지 십 년간 나는 보건복지부 산하기관에서 우리나라 공공병원을 평가하고 지원하는 일을 맡았다. 공공의료를 강화하는 정책 사업에 참여하는 뜻깊은 일이었지만, 실은 도달할 수 없는 목표를 띄워놓고 안간힘을 쓰는 일이었고 그런 점에서 매우 미약한 일이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 의료는 시장에서 마치 상품을 사고팔듯 거래된다. 시장의 수익 논리가 의료 현장을 지배하며 공공성은 의료에서 대수롭지 않은 듯 여겨진다. 정부가 관리하는 국민건강보험이 있어도, 환자를 대신해 의료비를 내주는 데 머무를 뿐이며 이와 같은 ‘시장형 환경’을 바꾸지는 못한다. 시장에서 승자는, 전체 의료기관의 95%를 차지하는 사립병원이다. 이 병원들은 건강보험이 정한 진료수가가 너무 박하다 하면서도 매출을 늘리고 기관 규모를 키우며 번성한다. 반면에 공공병원은 가난한 사람이 가는 곳이라, 비효율적이라 여겨지며 겨우 전체의 5%밖에 안 될 만큼 적다. 정부의 정책도 몇 안 되는 공공병원을 유지하는 선에서 머무른다.

공공성이 위축된 의료가 과연 지속 가능할까. 이미 곳곳에 위험이 보인다. 질병 예방을 소홀히 하고 치료에만 관심을 쏟아 비용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환자가 내야 하는 본인부담금이 무거워 계층 간 의료 이용에 격차가 벌어지고, 의료기관이 ‘사업이 되는’ 수도권과 대도시에 집중되니 대도시와 농어촌 사이에 의료 불평등이 점점 심해진다. 게다가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진행되는 인구 고령화가 모든 위험을 더 크게 더 심하게 부채질한다.

‘우리나라에서 공공의료가 발전하려면 무엇보다 상상력이 필요하다.’ 십 년간 공공의료 정책 실무에 파묻혀 문득문득 떠올리던 생각이다. 위축될 대로 위축된 공공의료의 문제가 시설과 장비와 인력과 예산을 마련한다고 속 시원히 해결될 리 없다. 그보다는 현재의 틀에서 한발 벗어나 습관처럼 굳어 버린 생각에 한 뼘 거리를 두고 무엇을 바랄지, 어떤 변화가 필요할지, 꿈꾸고 상상하는 것이 먼저다. 그래서 직장을 떠나 자유롭게 되었을 때, 외국 의료제도를 알리는 책을 쓰기로 했다. 우리와 다른 것을 알려 사람들과 함께 변화를 모색하고 싶었다. ‘전혀 다른’ 제도를 알리는 것이 도움이 되리라 싶어 이탈리아의 국영의료를 선택했다.

‘의료’가 그대로 공공의료인 나라 

서유럽에서 의료제도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독일, 프랑스, 오스트리아, 스위스,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에서 지역 또는 직종별 의료보험 조합(질병금고)이 조합원에게 보험료를 거두어 의료 이용을 보장하는 사회보험 의료제도다. 조합은 모두 비영리 공익 기관이며 국가의 통제 아래 보험 재정을 관리해 필수 의료를 제공한다. 둘째는 영국, 아일랜드,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 아이슬란드, 스페인, 포르투갈, 이탈리아에서 국가가 세금으로 의료체계를 직접 운영하는 국영의료제도다. 가정의가 제공하는 일차의료를 토대로 필수 의료서비스를 폭넓게 공급하며, 일부 분야를 빼고는 무상이어서 환자에게 의료비 부담이 거의 없다.

이탈리아가 국영의료를 도입한 때는 1978년. 건강을 인간의 기본권으로 여겨 보호하고 가난한 사람에게 무상의료를 보장한다는 조항이 헌법에 마련된 것은 이보다 훨씬 더 전인 1948년이었다. 그러나 기득권층을 대표하는 우파가 장기 집권하면서 헌법의 그 조항은 긴 잠을 자야 했다. 변화는 20년이 지난 1968년에, 서유럽을 휩쓸던 68혁명으로 이탈리아의 사회적 관행과 기존 질서가 밑동부터 흔들리던 때 시작되었다. 혁명의 기운으로 민심이 출렁이고 지지층이 줄어들자 위기에 몰린 우파가 정치적으로 유연한 자세를 취했고, 반대편에 있던 공산당도 기존 틀을 벗어나 다당제를 인정하고 폭력 대신 점진적인 개혁을 추구하는 노선을 선택했다. 서로 적대시하던 양쪽 진영은 이때 단기간이나마 협력해 당시에 원성이 높던 불평등하고 부실한 의료보험제도 개혁에 나섰다. 진통 끝에 「국영의료법」이 의회를 통과했으니 헌법이 제정된 지 30년 만이었다.

앞으로 몇 회에 걸쳐 이탈리아 국영의료를 소개하려 한다. 글의 초점은 일차의료에 둔다.

1977년 6월 28일, 공산당 대표 베를링구에르(왼쪽)와 기민당 대표 모로(오른쪽)가 두 당 사이에 ‘역사적 타협’을 성사시키고 손을 맞잡았다. 미국과 소련이 주도하는 냉전으로 진영 간 긴장이 팽팽하던 시대, 전선 한 귀퉁이를 허무는 사건이었다. ‘타협’은 위태로웠다. 미국이 이에 대해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보였고 소련 역시 비우호적이었으며 이탈리아 국내에서도 극좌와 극우 양쪽이 모두 반발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바로 이 시기, 국영의료법이 의회를 통과했다(1978년 12월 23일). (제공=문정주)
1977년 6월 28일, 공산당 대표 베를링구에르(왼쪽)와 기민당 대표 모로(오른쪽)가 두 당 사이에 ‘역사적 타협’을 성사시키고 손을 맞잡았다. 미국과 소련이 주도하는 냉전으로 진영 간 긴장이 팽팽하던 시대, 전선 한 귀퉁이를 허무는 사건이었다. ‘타협’은 위태로웠다. 미국이 이에 대해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보였고 소련 역시 비우호적이었으며 이탈리아 국내에서도 극좌와 극우 양쪽이 모두 반발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바로 이 시기, 국영의료법이 의회를 통과했다(1978년 12월 23일). (제공=문정주)

우리나라에서 볼 수 없는 ‘긴 상담’

이탈리아에서 일차의료 의사를 가정의medico di famiglia라 부른다. 가정의는 3년간 일차의료 전문 과정을 수료한 전문의이며 자기가 맡은 개인과 가족을 진료하고 상담해 질병예방, 진단과 치료, 재활 등 의료 전반을 이용하게 돕는 의사다. 이탈리아에 거주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국영의료에 가입할 수 있는데 가정의를 선택해 등록해야 가입 절차가 완료된다. 지역 명단에서 의사 이름, 의원 주소, 진료실 운영 시간 등을 확인해 원하는 의사를 골라 등록한다. 등록한 사람은 가정의에게서 언제든 건강에 관련된 도움을 받을 수 있고 진료실에 가기 어려울 만큼 아프면 왕진을 요청할 수 있다. 가정의가 해주는 모든 것이 무료다.

이탈리아 일차의료 의원은 우리나라 개인의원과 많은 점에서 다르다. 커다란 간판이 없고, 하루에 두서너 시간만 문을 열고, 복잡한 기계를 들여놓지 않는 등. 그러나 그중에도 제일 큰 차이는 바로 ‘긴 상담’이 아닐까 한다. 한 사람당 짧으면 10분에서 길면 40분을 가정의는 환자와 대화하는 데 쓴다. 온 정신을 집중해 귀 기울여 듣고 답한다. 이럴 때 시간의 주인은, 진료실의 방 주인은 의사라지만, 명실공히 환자다. 그가 묻고 싶은 것을 다 물어야, 충분한 답을 받고 작별 인사와 함께 일어나야 상담이 끝난다. 환자에게 돈 한 푼 받지 않는 일차의료 의원에서 무엇이 이처럼 긴 상담을 가능하게 할까, 

첫째는 의사와 환자가 맺은 ‘관계’다. 가정의에게 환자는 이미 오랜동안 관계를 맺어 ‘잘 아는’ 사람이고 환자에게 가정의는 ‘믿을 만한’ 의사다. 집으로 왕진도 오곤 했던 그는 환자 자신을 여러모로 이해한다. 반겨주는 가정의와 마주 앉아 환자는 거리낌 없이 이야기한다. 증세 또는 찾아온 이유, 생활환경, 검사나 치료에 관한 질문과 자기 의향, 나아가 가족의 건강문제 등. 가정의에게는 환자의 이야기가 진찰 소견만큼이나 중요하다. 치료에 무엇을 고려할지, 생활환경이나 일터에 위험 요인이 있는지, 자가관리가 가능할지, 전문의에게 의뢰해 세부적인 진료와 검사를 받게 할지, 판단을 올바로 내리는 데 밑거름이 된다.

이와 같이 신뢰받는 의사-환자의 관계를 국영의료에서는 제도적으로 보호한다. 누구든 자기 가정의를 선택해 등록해야 국영의료 카드를 발급받고, 가정의가 처방한 치료약과 의료용품이 약국에서 무료고, 가정의가 의뢰한 검사나 전문의 진료는 병원이나 진료센터에서 약간의 본인부담금만 내고 받을 수 있다. 선택한 가정의를 언제든 바꿀 수 있으나 대개 사람들은 잘 바꾸지 않는다. 고향에서 평생 사는 것이 보통인 이탈리아에서 의사-환자의 유대 관계는 수십 년 이어지기도 한다.

둘째는 아플 때 쉴 수 있는 사회적 제도다. 이탈리아는 국영의료 제공에 더해 유급 병가를 국민에게 보편적 권리로 보장한다. 제조업, 서비스업, 농업, 수산업, 예술공연 등 어떤 분야에서 일하든 ‘아프면’ 병가를 낼 수 있다. 정규직뿐 아니라 비정규직, 수습 직원도 마찬가지며 실직했더라도 고용이 종료된 뒤 두 달 이내에 병에 걸리면 같은 보장을 받는다. 우리나라에서는 건강보험을 통해 의료 이용이 보장될 뿐, 유급 병가는 공무원과 일부 공공기관 직원만 받을 수 있고 그 외 직장인들은 ‘업무상’ 아플 때만, 다시 말해 업무 중 다쳤거나 업무의 영향으로 병이 났을 때만 근로기준법 제78조에 따라 병가를 신청할 수 있다. 일반적인 질병으로 치료받거나 요양하려 하면 자기 연차 휴가를 써야 하니, 이탈리아에 견주면 국민의 권리가 크게 제한된다.

일을 쉴 수 있어야 진료받고 상담도 한다. 걱정 없이 쉴 수 있게 법으로 보장하는 나라에서 사람들은 아프면 병가를 내고 가정의를 만나 이야기도 나눈다. 불안하거나 조급해 하지 않고 시간을 넉넉히 들여 질문하고 의논한다.

볼로냐 보르고-레노 CdS. 인구 6만명, 일차의사 7그룹 46명, 소아과 8명이 포함되는 네트워크 (출처= http://salute.regione.emilia-romagna.it/news/ausl-bo/al-via-la-casa-della-salute-borgo-reno)
볼로냐 보르고-레노 CdS. 인구 6만명, 일차의사 7그룹 46명, 소아과 8명이 포함되는 네트워크 (출처= http://salute.regione.emilia-romagna.it/news/ausl-bo/al-via-la-casa-della-salute-borgo-reno)

상병증명서

어느 오후, 삼십 대로 보이는 여성이 어딘지 불편한 자세로 진료실에 들어온다. 두툼한 옷을 껴입었는데 평소 힘든 일을 하는지 손이 거칠다. 허리가 아프다며 진찰받고는 무언가를 부탁한다. 처방전을 쓰던 가정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노트북 앞으로 옮겨 앉아 뭔가를 작성한다. 온라인 ‘상병증명서’다. 환자 이름, 주소, 병명, 예상되는 요양 기간 등이 입력된다. 가정의가 국립사회보장공단에 이 증명서를 보내면 환자가 유급 병가를 인정받고 상병수당을 지급받는다. 발병한 지 4일부터 20일까지 임금의 절반, 21일부터 180일까지 임금의 2/3가 지급된다.

상병수당은 유럽에서 사회보장의 기본이다. 19세기에 노동자는 장시간 일하고도 겨우 푼돈을 임금으로 받았다. 다치거나 아파서 일하러 나가지 못하면 당장 생계비가 떨어져 어린 딸을 성냥팔이에 내보내기도 했으니, 1845년에 출간된 안데르센의 동화 『성냥팔이 소녀』가 당시 노동자 가정의 절망을 생생하게 전한다. 그 뒤 1880년대에 최초로 독일에서 아픈 노동자에게 생계비로 수당을 지급하는 제도가 시행돼 빈곤 가구의 생계를 보호했다. 20세기 들어 의학이 고도화하면서 국가가 직접 의료를 제공하거나 의료비를 보장하는 의료보장이 발전하게 되었는데, 병을 앓는 노동자에게 생계비가 필요하다는 데는 변함이 없어 상병수당도 유지되고 있다. OECD 회원국 중 공적 재원을 통해 상병수당을 지급하지 않는 나라는 한국, 이스라엘, 스위스, 미국뿐이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무급’ 병가가 보장되고 스위스와 이스라엘은 기업의 재원으로 노동자에게 유급 병가를 주도록 국가가 규제하므로 전혀 제도를 갖추지 못한 나라는 실제로 우리뿐이다.

명색이 의사지만, 내가 상병증명서 발급 광경을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상병수당이 없는 우리나라에서 살아왔으니 그럴 수밖에 없는데, 가장 놀라웠던 것은 그 증명서가 매우 간단히 발급된다는 점이었다. X선 촬영이든 혈액검사든 아무런 검사 없이, 아무런 증빙 자료도 없이, 가정의는 간단한 문구 몇 줄만으로 증명서를 완성했다. 우리나라에서 공식적인 효력을 갖는 문서가 되려면 거의 예외 없이 의사의 진찰 소견이나 판단에 더해 진단 검사를 시행하고 결과서를 첨부하게 하는 것과 달랐다. 가정의에 대한 사회적 신뢰, 일차의료에 대한 법적 신뢰를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나를 잘 아는, 내가 믿는 의사

‘상병수당을 어떻게 받을 수 있나’라는 제목으로 이탈리아 국립사회보장공단이 게시한 안내문 첫 줄에 이렇게 쓰여 있다. “당신의 담당 의사에게 가세요.” 

우리에게도 ‘담당 의사’가 있기를, 아플 때 ‘나를 잘 아는, 내가 믿는 의사’를 만나 긴 상담을 할 수 있기를, 그의 도움으로 아픈 몸을 쉬게 할 제도를 우리도 만들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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