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차의료 의사의 하루 - 진료실
상태바
일차의료 의사의 하루 - 진료실
  • 문정주
  • 승인 2022.08.09 17: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문정주의 공공의료 다시 읽기-3]

『뚜벅뚜벅 이탈리아 공공의료』의 저자, 문정주 선생은 공공성을 의료의 핵심으로 보고, 우리나라에 일차의료와 공공병원체계 도입이 시급하다는 관점에서 풀어낸 글을 본지에 격주로 연재할 예정이다. 

문정주 선생은 공공의료 연구자·가정의학과 전문의. 종합병원 임상 의사로 12년, 보건소 공무원으로 10년, 보건복지부 공공의료지원단 연구원으로 10년간 일한 뒤 서울의대 겸임교수,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상임감사를 지냈다.

해당 연재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편집자 주

이번 화에서는 일차의료 의사가 보내는 하루를 소개한다. 현장감을 위해 일차의료 의사가 화자로 나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써 보았다. 이 글에 나오는 일차의료 의사는 60대 중반으로, 알프스의 도시 비엘라에서 태어나 파비아 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3년간 일차의료 수련 과정을 마치고 가정의가 됐다. 이후 평생 고향에서 의사로서 활동하고 있다. 이 이야기는 2015년 때의 일로, 모두 실화다.

일차의료 의원 진료실. 가정의가 진료하던 중에 환자의 전화를 받고 있다. (제공=문정주)

월요일 아침 8시, 남편의 배웅을 받으며 출근길에 나선다. 자동차로 15분 정도 달려서 도착하는 작은 읍, 수백 년 된 성당과 장터 광장에서 조금 떨어진 주상복합건물 2층에 내 조그만 일차의료 의원이 있다. 이곳에 자리 잡은 지 벌써 이십 년이니 의원은 내게 제2의 집이나 다름없다. 벌써 나보다 먼저 와 기다리는 환자가 몇 명 있다. 일찍 문을 열어 환자를 맞이해준, 유일한 직원인 접수 담당 실비아에게 인사를 건네고 총총히 진료실로 들어가 가운을 걸친다.

아픈 사람들

"부온 죠르노!(안녕하세요란 뜻의 이탈리아어)"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들어서는 첫 환자는 사타구니에 림프샘이 만져지고 아프다는 30대 남성이다. 말을 시작하자 그칠 줄을 모른다. 생식기에 질병이 생겼을지 모른다며 불안해하는 그를 다독이며 증세를 파악한다. 비뇨기과 전문의 진료를 받을 수 있게 의뢰서를 쓰고 ‘단기간 내 진료 요함’ 칸에 체크해 건네주며 한시바삐 예약하라고 이른다. 자전거로 5분 거리에 있는 국영의료 종합외래진료센터에 가면 예약접수처가 있다. 환자는 용수철이 튀듯 일어나 나가며 고맙게도 작별 인사를 빼먹지 않는다. 

까만 머리에 키가 작은 중년 여성이 조심스레 들어온다. 고도 500m의 아름다운 산마을에 사는 사○○ 씨다. 한여름에는 산바람이 시원하고 겨울이면 알프스 스키장이 가까워 스키 타러 다니기에 좋은 그 마을은 주로 부자들이 사는 동네지만, 한편으로 사○○ 씨 같은 이주민도 산다. 정원 관리나 노인 수발에, 레스토랑 허드렛일에 일손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몇 년 전 그가 이곳 주민이 되어 국영의료에 가입할 때 가정의 명단에서 나를 선택해 등록했다. 아마도 나이 많은 여성 의사를 원했던 것이리라.

그가 내미는 것은 일요일인 어제 받은 응급실 진료 보고서다. 갑작스럽게 일어난 가슴 통증에 비엘라시 종합병원 응급실에 갔는데 혈압이 185/75로 매우 높았다. 의사가 진찰하고 심전도 검사를 한 결과, 혈압이 높기는 해도 통증 원인이 심장이 아닌 위장에 있다고 판단해 혈압약과 함께 위장약, 신경안정제로 치료했다. 다행히 그 약을 먹고 사○○ 씨는 통증이 가라앉아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나는 그의 가슴을 꼼꼼히 청진한 뒤 어젯밤에 잘 잤는지, 지금도 아픈지 물어보며 상담을 시작한다.

환자와 마주 앉으면 내 눈과 귀는 오로지 환자를 향한다. 환자가 말하는 동안 나는 종이나 컴퓨터에 뭔가 쓰는 것도 거의 하지 않는다. 따로 기록하지 않아도 환자의 모습이나 그가 하는 말이 마음속에 저장되면 다음번에 만났을 때 떠오른다. 대개 사람들이 가정의를 한번 정하고는 잘 바꾸지 않으므로 세월과 함께 저장된 기억의 두께만큼 환자를 이해할 수 있고 그 이해가 바로 일차의료의 토대가 된다고 나는 믿는다. 때때로 상담이 중단되는 것은 다른 환자가 걸어온 전화를 받을 때뿐이다. 간단한 문의는 실비아가 처리하지만 중요한 용건일 때는 내게로 연결한다. 특히 평일 오전 8시에서 10시 사이에 환자가 전화하면 반드시 받아야 하는 것이 국영의료 규칙이다.

사○○ 씨는 이탈리아어로 소통하는 데 어려움은 없지만, 자기표현을 꺼리는 편이라 말수가 적다. 나는 심한 통증으로 힘겨운 주말을 보낸 그를 위로하고 다시 한 번 고혈압약을 꾸준히 먹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위장 치료를 당분간 병행해야 하니 식생활에도 주의를 기울이라고 일러주며 처방전을 써준다.

혈압약, 당뇨병약이 무료다

우리 진료실에 오는 환자 대부분은 노인이다. 이탈리아가 손꼽히는 장수 국가라 고령 층 인구 비율이 유럽에서 최고, OECD에서는 일본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데다 고령층에게 고혈압이나 당뇨병 같은 만성질환이 흔하기 때문이다. 병이 있어도 건강해지려면, 합병증을 예방하고 일상을 유지하려면 약 복용이 필수인 만큼 노인들은 정기적으로 처방을 받으러 의원에 온다.

노인이라 해도 각양각색이다. 여든을 훌쩍 넘긴 나이에 모직 코트를 걸치고 실크 스카프를 날리며 멋진 걸음새를 뽐내는 할머니가 있는가 하면 투박한 잠바 차림에 무표정한 할아버지, 지팡이에 의지해 간신히 걷는 사람도 있다. 나는 일부러 수동 혈압계를 사용해 혈압을 측정해주며 환자와 거리를 좁힌다. 최근 건강 상태가 어떤지 물어보아 별다른 증세가 없으면 10분 이내, 무언가 문제가 있으면 30분 정도 상담한 뒤에 처방전을 쓴다.

가정의가 환자에게 해주는 모든 것이 무료다. 그뿐 아니라 내가 준 처방전만 있으면 환자는 약국에서 혈압약, 당뇨병약을 무료로 받는다. 약 외에 당뇨병 자가관리에 필요한 소변검사 스틱, 채혈침, 혈당 시험지도 처방전이 있으면 무료다. 이처럼 국영의료가 일차의료를 통해 만성질환 환자를 최대한 지원하니 이탈리아는 당뇨병을 효과적으로 관리하는 일에 1위 국가 자리를 수년간 지키고 있다(OECD 건강통계, 당뇨병 입원율). 

일요일에 가슴 통증으로 응급실 진료를 받은 고혈압 환자 (제공=문정주)
일요일에 가슴 통증으로 응급실 진료를 받은 고혈압 환자 (제공=문정주)

급히 왕진하러 간다

오전 진료를 마친 뒤 서둘러 자동차에 오른다. 아까 전화로 왕진을 와 달라는 한 환자가 있어 가봐야 한다. 읍 변두리에 있는 다세대 주택에 사는 젊은 여성 환자다.

현관 인터폰을 누르자 환자가 코 막힌 음성으로 답하며 문을 열어 준다. 얼굴이 발갛고 푸석하다. 누워 있던 몸을 간신히 일으킨 듯, 큰 수건을 몸에 둘러 치마를 대신했다. 나는 부엌 식탁에서 환자와 마주 앉아 증세를 묻고 목 안의 편도를 살펴보며 진찰한 뒤 간단히 상담하고 처방전을 써준다.

고맙다는 인사를 받으며 현관으로 나오는데 거실 소파에 앉은 남자 모습이 언뜻 보인다. 텔레비전에 열중해 이쪽은 쳐다보지도 않는 그는 환자의 남편이다. 아내가 몸살감기에 걸려 진료 받고 있건만 아무 관심도 없는 듯하다. 그러고 보니 전에 남편이 게임 중독에 빠졌다고 환자가 하소연했었다. 정신건강센터에서 치료받는다고 해 나아지기를 기대했는데 지금 모습은 걱정스럽다. 못 본 척 아무 기색도 비치지 않고 환자와 인사를 나누고 나왔다.

머리를 식힐 겸 점심을 먹으러 간다. 내가 애용하는 곳은 대형 마트 1층, 햇살이 환하게 쏟아지는 식당이다. 음식이 신선하고 맛있는데 값도 싸 점심시간이 즐겁다. 자동차를 주차하는데 큰딸한테서 전화가 왔다. 가정을 꾸리랴 직장에 출근하랴 바쁠 텐데도 날마다 엄마에게 전화해주는 좋은 딸이다. 

전문의가 보내는 보고서

월요일인 오늘은 오전에 이어 오후에도 진료실을 연다. 대개 오후에는 전문의 진료를 받은 뒤 보고서를 가져오는 환자가 몇 명씩 있다. 전문의가 보내는 보고서에는 진찰 소견, 검사 결과, 치료 방법, 약 처방 등이 자세히 적혀 있어 이에 관해 환자와 상담하다 보면 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코□□ 씨(82세, 남)가 노바라 대학병원 심장내과를 오전에 방문한 뒤 보고서를 갖고 왔다. 노바라는 이곳 코사토에서 동쪽으로 50km 거리에 있는데 대학병원이 있는 도시로는 가장 가깝다. 코□□ 씨는 2007년 가을에 급성 심근경색을 겪고 인공 심박동기를 피부 밑에 삽입해 심장내과 진료를 정기적으로 받아야 하는 환자다. 오늘 보내온 보고서에서 전문의는 심박동기 점검 결과를 설명하고 작동 상태가 양호하다고 했다. 그러나 심전도 소견으로 볼 때 환자의 심박동기 기능을 한 단계 높여야 할 것으로 생각돼 다음번에는 심장초음파검사를 한다고, 3개월 뒤 진료 날짜를 정해두었으니 이에 맞춰 의뢰해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보고서를 펼쳐 놓고 환자가 내용을 충분히 이해하는지 확인하며 상담한다. 그런 다음 그에게 필요한 심장, 혈압, 콩팥에 관한 약 열 가지를 처방해준다. 이미 8년을 그 많은 약과 함께 살아온 코□□ 씨의 표정은 담담할 뿐이다.

그가 돌아가고 얼마 안 있어 지△△△ 씨(66세, 여)가 왔다. 안경 왼쪽 렌즈에 거즈를 붙여 왼눈을 가렸고 묵직한 서류 가방을 메고 있다. 그는 석 달 전부터 물체가 두 개로 보이는 복시(複視) 증세가 생겨 안과와 신경과에서 진료 받았고 최근에 내분비내과 진료를 받았다.
"존경하는 ◇◇◇ 선생님께, 당신의 환자인 지△△△ 씨를 외래 진료했습니다."

내분비내과 전문의가 쓴 보고서는 이렇게 정중한 글귀로 시작되었다. 먼저 환자에게 갑상샘 질환의 가족력이 있는 것을 확인했다고 적은 다음 갑상샘에 관한 혈액검사 결과를 자세히 알려준다. 호르몬 검사의 항목별 결과, 세부 소견, 안과의 정밀검사 결과와 호르몬 검사 결과의 연결점을 설명한 뒤 결론적으로 환자에게 갑상샘 기능 항진증이 발생한 것으로 판단된다고 했다. 덧붙여서 정확한 진단을 위해 추가로 초음파검사와 혈액검사가 진행될 예정이라는 말로 보고서를 마무리했다.

간단히 말해서 더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추가 검사 결과가 나와야 정확한 진단을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지△△△ 씨도 알고 있었으나 한편으로 불안한 마음에 여러 의문을 품고 있었다. 진료보고서와 검사결과보고서를 뭉치째 꺼내 뒤적이며 많은 것을 내게 물었고 나는 차근히 답하며 안과·신경과·내분비내과 전문의가 판단한 바를 그가 종합해 이해할 수 있도록, 진료 결과를 신뢰하도록 도왔다. 1시간이 넘도록 대화가 이어졌고 마침내 지△△△ 씨가 처음보다 밝아진 얼굴로 일어서면서 상담이 끝났다.

복시 증세로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환자가 서류를 한 보따리 갖고 와 상담하는 중 (제공=문정주)
복시 증세로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환자가 서류를 한 보따리 갖고 와 상담하는 중 (제공=문정주)

외국인 엄마와 아기

늦은 오후, 매우 드문 일이 벌어졌다. 태어난 지 몇 달 되지 않은 아기가 우리 진료실에 오다니. 작달막한 엄마가 자기키만 한 유아차를 기세 좋게 밀고 들어와 자랑스러운 듯 나를 바라본다. 아직 십 대 후반인(!) 젊디젊은 엄마는 영어권에서 집시라 하고 우리 이탈리아에서는 로마(Roma)라 부르는, 특별한 문화권에 속한 사람이다.

아기 엄마는 내가 자신에게 일차의료를 해주는 가정의이니 우리 아기도 선생님이 담당해 줄 수 있냐고 물어보러 왔다고 했다. 예방접종을 받게 하려고 종합외래진료센터에 갔더니 먼저 아기에게 일차의료 의사를 정하라 했다는 것이다. 나는 먼저, 젖살이 올라 통통한 아기 얼굴을 보니 엄마가 열심히 먹이고 돌보는 걸 알 수 있다고 칭찬부터 했다.

0~14세를 위한 일차의료는 따로 소아 가정의(Pediatra di libera scelta)가 맡는다. 그는 소아청소년과 전문의로, 신생아 때부터 진료하고 관찰하며 아이가 성장하는 내내 건강관리를 돕는다. 아이뿐 아니라 부모와도 상담하며 자녀의 신체적 정서적 발달 단계를 이해하고 이에 따른 변화를 수용할 수 있게 돕는다. 소아 가정의 명단은 시 보건의료본부에 있어 부모가 그중 한 사람을 선택해 아이를 등록하면 된다. 이탈리아 사람이면 누구나 알만한 상식이라도 외국인에게는 설명이 필요하다. 내게 물어보러 와준 그 엄마 덕분에 나는 곤히 잠든 아기 얼굴을 맘껏 바라보는 호사를 누렸다. 

건강증명서를 써주다

저녁 무렵 거의 마지막 환자로 고등학생이 왔다. 학교 스포츠 클럽에 가입하는데 건강증명서를 내야 한다고 했다. 가정의가 제공하는 일차의료에 ‘건강증명서 발급’이 포함되므로 당연히 내가 해줘야 할 일이다.

학교가 요구하는 것은 학생이 건강한지에 관해 가정의의 진찰 소견과 종합 의견을 적은 간단한 증명서였다. 다만 심전도 검사 결과를 첨부해야 했는데, 다행히도 우리 의원에 심전도계가 있어 쉽게 해줄 수 있었다. 수동 혈압계 외에는 유일한 의료장비인 이 심전도계는 팩시밀리와 연결해 즉시 판독 결과를 얻을 수 있는 편리한 기계다.

학생을 반듯이 눕게 하고 팔다리와 앞가슴에 전극을 붙인 다음, 팩시밀리에 정해진 번호를 누르고 수화기를 심전도계의 둥근 면에 밀착시킨 뒤 심전도 측정을 했다. 검사지에 심전도가 기록되고 끝으로 정상 결과라는 판독이 나와서 건강증명서 발급을 완료할 수 있었다. 학생도, 같이 온 부모도 기뻐했고 내 마음도 좋았다.

귀가

이제 퇴근한다. 가을이 깊어지니 이 시간에 벌써 어둠이 깔린다. 핸드폰을 자동차에 연결하고 출발해 큰 소리로 “카사(Casa)!”라고 말하자 집으로 전화가 걸린다. 곧 남편 음성이 자동차 스피커로 들려온다. 나 이제 가요. 그래, 맛있는 저녁밥이 기다리고 있어요. 남편은 요리가 취미라 맛있는 걸 해준다. 홈스위트홈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