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차의료 의사의 하루 – 가정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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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차의료 의사의 하루 – 가정방문
  • 문정주
  • 승인 2022.09.07 15: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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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주의 공공의료 다시 읽기-4]

일차의료 의사가 보내는 하루를 소개한다. 현장감을 위해 의사가 직접 화자로 나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써 보았다. 이 글에 나오는 의사는 60대 중반으로 알프스의 도시 비엘라에서 태어나 파비아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3년간 일차의료 수련 과정을 마쳐 가정의가 됐다. 이후 평생 고향에서 의사로 활동하고 있다. 지난번 글에 진료실에서 보내는 하루를 소개한 데 이어 이번 글에는 환자 집으로 찾아가 왕진하는 하루를 소개한다. 이 이야기는 2015년 때의 일로 모두 실화다.

이탈리아 북부이자 알프스 남쪽 끝자락인 이곳에는 볕 잘 드는 언덕마다 마을이 있다. 양이나 소를 키우는 목장이 전보다 많이 줄었어도 여전히 치즈 회사 등 농축산에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들, 평생을 고향에서 살아온 노인들, 직장에서 은퇴했거나 은퇴를 내다보며 산마을이 좋아 정착한 중노년층이 산다. (제공=문정주)
이탈리아 북부이자 알프스 남쪽 끝자락인 이곳에는 볕 잘 드는 언덕마다 마을이 있다. 양이나 소를 키우는 목장이 전보다 많이 줄었어도 여전히 치즈 회사 등 농축산에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들, 평생을 고향에서 살아온 노인들, 직장에서 은퇴했거나 은퇴를 내다보며 산마을이 좋아 정착한 중노년층이 산다. (제공=문정주)

나는 알프스에서 태어나는 복을 받았다. 햇살에 빛나는 아름다운 산을 머리에 이고 여름에는 물놀이, 겨울이면 스키를 맘껏 즐기며 자랐다. 의사가 된 뒤로 알프스는 내 일터다. 이탈리아 북부이자 알프스 남쪽 끝자락인 이곳에는 볕 잘 드는 언덕마다 마을이 있다. 양이나 소를 키우는 목장이 전보다 많이 줄었어도 여전히 치즈 회사 등 농축산에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들, 평생을 고향에서 살아온 노인들, 직장에서 은퇴했거나 은퇴를 내다보며 산마을이 좋아 정착한 중노년층이 산다. 저마다 이야기를 간직한 산마을 곳곳을 나는 환자를 왕진하러 누비고 다닌다.

일차의료 의사에게 왕진은 필수다. 거동이 불편하거나 호흡기 증세를 보이는 일부 환자를 위해 중요한 진료 방식일 뿐 아니라 가정생활 형편과 여건을 직접 볼 수 있어 환자를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요즘 젊은 의사 중에는 컴퓨터만 들여다보면 된다는 생각으로 왕진을 귀찮게 여기는 이가 있다고 하던데 그건 정말로 잘못된 생각이다. 환자가 지역 의료본부에 비치된 일차의료 의사 목록에서 내 이름을 선택해 등록했다고 해서 내게 대한 신뢰가 저절로 생길 리는 없으니 말이다. 의사는 환자를 이해하고 신뢰를 얻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며 그런 점에서 왕진은 귀중한 기회다.

요즘 들어 왕진이 사회적으로 중요해졌다. 평균 수명이 늘어 노년기가 길어진 데다 발달한 의학 덕분에 예전 같으면 치명적이었을 병에도 오래도록 삶을 누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노인 환자가 스스로 만성질환을 관리할 수 있게, 원하는 생활을 할 만한 건강을 지키게, 수술이나 입원 치료를 받은 뒤 회복이 순조롭게, 의료인이 환자를 찾아가며 돌봐야 할 필요가 커진 것이다. 

환자에게 왕진은 무료지만, 내게 왕진은 추가 수입원이다. 일차의료 의사가 받는 보수는 등록 인원당 금액이 정해지는 인두제(capitation)를 따른다. 등록 인원에 상한선도 1,500명까지로 엄격하다. 법적 신분은 자영업자지만 실제로는 국영의료 당국으로부터 봉급을 받는 공직자와 다를 바 없다. 다만 추가 수입이 있으니 왕진이나 예방접종 등 일부 활동에 대한 횟수별(행위별) 보수, 장애 환자나 만성질환자를 위해 가정돌봄에 참여한 데 대한 보상금이다. 왕진과 가정돌봄에 의사가 적극적으로 나서도록 제도적 장치를 둔 셈이다.

노인을 위한 왕진

오늘은 수요일, 종일 왕진하는 날이다. 국영의료 규칙에 따라 일차의료 의사는 진료실을 일주일에 5일, 하루에 적어도 2~3시간씩 열어야 하는데 하루 중 어느 때 진료실을 열지, 왕진에는 시간을 어떻게 배정할지 등은 자기 마음대로 정할 수 있다. 그래서 수요일 진료를 야간 시간대로 돌리고 오전과 오후 시간 전부를 들여 왕진을 다니기로 했다. 마을도 집도 띄엄띄엄 떨어져 있는 이곳에서 연달아 여러 집을 방문하려면 시간을 통째로 들이는 편이 좋다.

오늘은 고령 환자를 찾아가 독감백신을 접종할 예정이다. 지역 의료본부에서 받아온 백신을 아이스박스에 넣어 자동차에 싣는다. 그런데 아차, 아직 시동을 켤 때가 아니다. 오래된 가죽 가방, 내게 든든한 동료와도 같은 그 가방을 빼놓고 떠나면 절대 안 된다. 청진기, 혈압계, 알코올 솜, 업무 수첩, 국영의료 처방전 용지, 메모장과 필기구를 넣어둔 이 가방이 있어야 왕진에 실수가 없다.

“안녕하세요!”

첫 집이다. 거실에 들어서며 반가움을 담아 큰 소리로 인사했건만 식탁 앞에 앉은 노인은 그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본다. 80세를 훌쩍 넘긴 고령에 매일 인슐린 주사를 맞는 당뇨병 환자인 그는 몇 해 전 중풍으로 뇌 기능이 크게 손상되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천천히 다가오는 부인도 자기 몸을 겨우 움직일 수 있을 뿐이다. 나도 조용히 혈압을 재고 백신을 놓아 드린다. 말은 없지만 두 분 모두 내가 자기들에게 익숙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안다. 나를 신뢰하는 마음에 두려워하지 않고 몸을 맡긴다.

명랑한 목소리로 분위기를 띄우는 사람은 부인의 여동생이다. 그 또한 이미 노인인데도 다행히 건강해 언니 부부를 돌본다. 나는 식탁 위에 준비된 혈당 기록지를 살펴보고 환자 약통에 약이 넉넉하게 있는지 점검한 뒤 그와 이야기를 나눈다. 약 복용 관리, 혈당 측정, 인슐린 주사, 게다가 집 관리까지, 쉽지 않은 일을 여동생은 씩씩하게 해내고 있다. 높은 선반 위에 놓여 있는 수십 년 전 두 노인이 까만 머리칼에 젊은 남녀였던 사진이 흘깃 눈에 들어온다. 오늘따라 애잔하다.

왕진 온 의사가 약을 처방하는 모습을 할머니와 딸 부부가 바라본다. (제공=문정주)
왕진 온 의사가 약을 처방하는 모습을 할머니와 딸 부부가 바라본다. (제공=문정주)

“안녕하세요!”

이번 집에서는 내 인사말에 화답해 “안녕하시오!” 소리가 활기차게 퍼진다. 할머니는 거동이 불편해 바퀴 달린 보조기를 붙잡고 있지만, 밝은 미소가 얼굴에 가득하다. 딸 부부도 반갑게 인사한다. 얼마 전 부부가 직장을 은퇴해 이곳에서 같이 살게 된 뒤 할머니가 더욱 밝아졌다. 혈압을 재고 백신을 접종한 다음 내가 자리에 앉자 기다렸다는 듯 할머니가 큰 소리로 말을 꺼낸다. 요즘 자기 상태와 증세를 설명하며 궁금한 점을 이것저것 묻는다. 차근차근 답하며 딸 부부와 넷이서 건강관리, 생활관리, 독감 예방 등에 관해 이야기를 나눈다.

식탁에는 할머니가 복용하는 약이 줄지어 놓여 있다. 집에 약이 얼마 남지 않아 내가 온 김에 처방전을 받으려고 준비해 둔 것이다. 고혈압과 고지혈증에 식도염을 앓는 할머니는 혈압 강하제, 혈액 응고 방지제, 이뇨제, 식도염 치료제, 담석 방지제를 매일 복용한다. 나는 가죽 가방에서 국영의료 처방전 용지를 꺼낸 뒤 꼼꼼히 하나하나 처방한다. 할머니와 딸 부부가 조용히 나를 지켜보는 것이 느껴진다. 따스한 눈길 안에 왕진에 대한 고마움, 내게 대한 신뢰가 담겨 있다.

함께하는 가정돌봄으로

이탈리아는 가족을 중심에 두는 문화가 강한 나라로 많은 사람이 고향에서 가족과 함께 살아간다. 부모, 형제, 자녀 간 유대도 매우 깊다. 쇠약한 노인이나 중증 환자가 생기면 가족 중 누군가가 돌봄 책임을 맡는다. 환자 수발이 힘에 부치면 보조 인력을 고용하기도 하지만, 어떻게든 가족의 책임 아래 환자를 간호하고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집에서 지낼 수 있도록 정성을 다한다.

중증 환자를 돌보는 가정을 위해 일차의료 의사가 할 일이 많다. 우선 자주 왕진하며 환자 상태를 살펴야 한다. 적어도 한 달에 한두 번, 상태가 나빠지거나 임종이 가까워지면 그보다 더 자주 왕진해 필요한 의료를 제공한다. 또한 돌보는 가족이 지치지 않도록 그에게도 관심을 기울인다. 가족의 부담이 너무 커지면 지역 의료본부에 요청해 간호사, 사회복지사, 요양보호사가 방문해 돕게 할 권한도 일차의료 의사에게 있다.

오늘 왕진 대상자 중에는 상태가 나쁘거나 마지막 단계에 있는 환자는 없으나 자주 왕진해야 하는 환자가 있다. 2개월 전에 암 수술을 받은 죠○○○ 할머니다. 퇴원한 직후부터 지금까지 매주 한 번씩 왕진했다. 수술은 병원에서 하지만, 퇴원 뒤 증세를 가라앉히고 수술 부위를 돌보며 경과를 관찰해 합병증을 예방해야 할 책임은 일차의료 의사에게 있기 때문이다.

“안녕하세요!”

인터폰을 누르자 할머니가 반가운 얼굴로 현관문을 연다. 지난달만 해도 수술 부위 통증으로 힘들어했는데 이제는 예전처럼 반짝이는 눈과 밝은 표정을 되찾았다. 혈압을 재고 독감백신을 접종한 뒤 할머니가 꺼내둔 통합 가정돌봄(Assistenza Domiciliare Integrata) 기록부를 펼쳐 간단히 할머니의 오늘 상태를 기록한다.

돌봄 기록부는 지역 의료본부가 배포해 관리하며 의사뿐 아니라 돌봄에 참여하는 다른 인력도 함께 사용한다. 기록부를 보면 돌봄 인력이 가정의, 소아 가정의, 간호사, 물리치료사, 사회복지사, 요양보호사, 상담심리사, 영양사, 언어치료사로 다양하고 그 외 다른 분야도 참여할 수 있게 되어 있다. 만약 같이 한꺼번에 할머니 집을 방문해 돌봄 활동을 벌이면 단박에 종합병원급 의료를 실현할 만한 구성이다. 인력 모두는, 자영업자인 가정의만 제외하면, 지역 의료본부나 지방자치단체에 소속된 공직자다. 국영의료 당국(보건의료)과 지방자치단체(복지)가 연합해 제공하는 공공서비스가 통합 가정돌봄인 것이다. 물론 환자에게 무료다.

사실 중증 환자를 돌보려면 여러 분야 간 협력이 꼭 필요하다. 질병에 따라서는 합병증이 몇 가지씩 겹치기도 하고 환자를 수발하는 기간이 길어지면서 가족 간 갈등이 생기는 등 어려움이 닥치기 때문이다. 이런 가정을 효과적으로 도와 환자가 가족의 따스한 보살핌을 받게 하려면 다양한 분야에서 함께해야 한다.

고맙게도 죠○○○ 할머니는 순조롭게 회복해 가정의인 나 외 다른 분야 인력을 청할 일이 없었다. 이제는 왕진 횟수를 격주나 한 달에 한 번으로 줄일 단계에 왔다. 할머니 손녀가 색칠해 붙여놓은 알록달록한 알프스와 해님 그림 아래서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눈다.

죠○○○ 할머니 집에서 나오니 벌써 점심시간이다. 은행 일도 볼 겸 읍내 옛 장터 광장에 들어가 차를 세우는데 때마침 맞은편 빵 가게에서 나오는 사람이 있다. 손에 든 하얀 통에서 가느다란 녹색 튜브가 길게 나와 있어 눈에 띈다. 한눈에 보아도 산소통과 산소 튜브다. 그가 입은 두툼한 잠바 위로 올라간 튜브는 목 한가운데에 꽂혀 있다. 아, F□□□ 씨다. 내 등록 환자는 아니지만 그를 안다. 1년쯤 전에 후두암이 발견돼 수술 치료를 받았다. 후두를 제거해 코와 입으로 호흡할 수 없어 목에 숨구멍을 만들어 기관에 연결해 산소를 흡입한다. 후두와 함께 성대까지 제거해 언어 장애도 안게 되었다. 

왼손에 산소통을, 오른손에 빵 봉지를 들고 유유히 걸어가는 그를 바라본다. 같이 점심 먹을 식구가 많은지 봉지가 크고 묵직해 보인다. 가슴이 뭉클하다. 몸이 불편해도 환자 노릇에만 머물지 않고 빵을 사러 나온 그에게서 강한 기개와 낙천을 느낀다.
  
문득 그의 집에 있을 통합가정돌봄 기록부를 떠올려 본다. 어떤 인력이 참여했을까. 죠○○○ 할머니를 왕진하는 나처럼, 그를 담당하는 가정의도 수술 뒤 몇 달 동안 매주 한 번은 왕진했을 것이다. 간호사도 방문해 기관절개관을 관리하며 가래를 배출하게 도왔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언어치료사가 방문해 식도나 보조기구를 이용해 말할 수 있도록 도왔을 것이다. 옛 목소리를 되찾지 못해도 가족과 간단한 대화 정도는 할 수 있게 언어 재활을 도왔을 것이다. 사회복지사도 방문해 그를 위해 새롭고 적절한 사회 활동을 찾고 참여하게 도왔을 것이다. 그렇게 그는, 여러 인력의 ‘통합’ 돌봄을 통해, 비록 불편하게 호흡하고 산소통 없이는 잠시도 살 수 없지만, 일상생활을 회복해 오늘처럼 빵을 사러 나올 수 있었으리라.

후두암 수술 뒤 산소 튜브를 목에 꽂고 지내는 노인이 갓구운 빵을 사러 햇살 아래 나들이를 했다. (제공=문정주)
후두암 수술 뒤 산소 튜브를 목에 꽂고 지내는 노인이 갓구운 빵을 사러 햇살 아래 나들이를 했다. (제공=문정주)

의사 그룹 모임

오후에도 몇 집을 방문하고 의원으로 돌아왔다. 오는 길에 간단한 음식을 사다가 요기하며 6시 30분부터 야간 진료실을 열 준비를 한다. 피곤하지만, 오늘 밤 9시에 있을 그룹 모임을 생각하면 힘이 난다.

의사 그룹은 이웃해서 일하는 일차의료 의사들의 연합체다. 가까이 있으므로 자주 모인다. 회원들은 최신 의학 정보를 같이 나누고 누군가 휴가 등으로 진료실을 닫아야 할 때 그를 대신해 환자를 진료해주기도 한다. 오랫동안 교류해 가족이나 다를 바 없을 만큼 소중한 회원들이다.

오늘 밤에는 통합가정돌봄에 관해 논의하기로 했다. 그 의의에는 누구나 공감하지만, 돌봄에 참여하는 인력 간 협력 방식에 관해서는 논의가 더 필요하다. 국영의료 당국은 우리 일차의료 의사가 리더 역할을 맡아 조정해주기를 바라는데 그건 간단치 않은 일이다. 환자를 위해 좋은 방안이 무엇일지, 어쨌든 여럿이 모여 머리를 맞대면 지혜를 얻을 수 있을 테니 걱정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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