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양민학살 배상 판결을 환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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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양민학살 배상 판결을 환영하며
  • 송필경
  • 승인 2023.02.10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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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송필경 논설위원

1968년 2월 12일 베트남 중부 꽝남성의 작은 마을 퐁니. 한국군이 건장한 남자 1명 없는, 아녀자와 노약자만 있는 이 마을에 들어가 74명을 학살했다. 한국군을 감싸던 미군조차 학살이라고 감찰보고서를 낼 정도였다.

응우옌 티 탄(탄 아주머니)은 그 때 8살이었다. 어머니는 장에 가고 이모 집에서 놀고 있다가 총소리가 나자 이모와 사촌 아이들, 그리고 오빠와 함께 집 마당 땅굴로 들어갔다.

한국군은 마당 땅굴을 발견하자 기관총을 쏘고 수류탄을 터뜨렸다. 이모와 사촌들은 죽고 탄 아주머니는 복부에 창자가 튀어나올 정도의 관통상을 입고 쓰려졌다가 우여곡절 끝에 살았다. 탄 아주머니 오빠는 엉덩이에 총을 맞고 평생 걷지 못하는데다 성불구자가 되었다.

2014년 7월 30일, 구수정 선생이 이끄는 ‘베트남평화기행’의 일환으로 퐁니 마을을 찾아서 탄 아주머니의 ‘그날의 일들’을 들었다.

울음을 겨우겨우 참으며 악몽을 기억하는 증언을 마친 탄 아주머니는 눈물을 훔치며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조용히 물었다. “얘들과 여자뿐인 우리에게 한국군은 왜 총을 쏘고 수류탄을 던졌나요?”

(사진제공= 송필경)
(사진제공= 송필경)

갑자기 울먹이는 큰 소리가 났다. “아주머니, 우리가 잘못 했습니다” 보니 같이 간 이정우 교수가 쏟아지는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그러자 동시에 김명희 선생이 탄 아주머니 앞에 무릎을 꿇었다. 오랫동안 무릎꿇고는 탄 아주머니의 손을 꼭 잡고 흐느꼈다. 증언 사진을 찍는 동안 내 카메라 뷰파인더에 눈물이 흥건히 배였다.

탄 아주머니는 바로 그날 한국 성인을 가까이서 처음 만났다고 했다. 한국 사람은 험악한 도깨비보다 무서운 줄 알았다고 했다. 사죄의 눈물을 보고 한국 사람에게 비로소 마음을 열었다.

탄 아주머니는 2015년 4월 평생 무서워했던 나라, 한국에 왔다. 대구에도 들렀다. 경북대학교(이하 경북대) 이정우 교수의 주선으로 고엽제전우회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경북대에서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증언을 했다.

탄 아주머니는 2020년 4월 한국 양심인들의 도움을 받아 한국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를 했다. 그리고 지난 7일 한국 1심 재판부는 드디어 한국의 배상책임을 처음으로 인정했다.

2014년 처음으로 탄 아주머니를 만났을 때도 눈물을 많이 흘렸고, 어제도 재판 결과를 듣고 눈물이 맺혔다. 아무렴, 그래도 우리는 과거의 잘못에 대한 반성이 없는 일본보다는 나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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